잠언 365

잠언 488(31:1-9)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찌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찌니라"(31:8-9) 르무엘왕은 성경에 언급된 적이 없는 이름의 왕이므로 이방의 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일설에 르무엘은 솔로몬의 소시적 이름이고 그의 어머니 밧세바가 준 교훈이라는 설이 있으나 무리한 주장으로 보입니다. 극단적 유대교인들처럼 이방인들에게 마음의 문이 닫힌 이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왕이 해서는 안 될 일들 세가지를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이렇게 서술 합니다. 첫째, 여자에게 힘을 쓰는 것...성적 쾌락에 빠진 왕은 나라일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런 자의 정신상태가 정상일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여자때문에 망했는지(경국지색) 역사가 잘 ..

잠언 487(30:32-33)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30:32-33) "깨달음의 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알고 깨달은 자는 지혜롭게 피할 것은 피하고 삼가할 것은 삼가합니다. 이런 자들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만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지 못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반복하여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왜 자신이 진노의 표적이 되었는지 모르는 진짜 어리석은 자들도 허다합니다. 그런 중에도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이들은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문제를 수습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르면 이를 수록 좋..

잠언 486(30:29-31)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30:29) 사자, 사냥개, 숫염소, 그리고 당활 수 없는 왕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격성이 매우 강한 존재들입니다. 아굴이 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이들을 본받으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때는 물론 우리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위풍당당할 필요도 있겠지만 항상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요. 사나운 왕을 만났을 때에 사자를 피하듯, 사냥개를 멀리하듯, 숫염소를 상대하지 않듯 하라는 의미로 저는 읽었습니다. 아굴의 이 잠언은 제안을 하고 결론은 듣는 사람에게 맡긴 것이니 자유롭게 생각해 본 것입니다. 혹 다른 이해가 있으시면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절대왕정의 시대엔 왕이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자처럼 어떤 상대든 압도 ..

잠언 485(30:24-28)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30:24)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므로 겨울의 황폐함을 견뎌낼 수 있고 사반(오소리의 일종인 사반, 토끼, 오소리, 너구리, 바위나구리 등으로 번역되는 데 습성은 시리아의 rock hyrax가 가장 닮았다고 합니다)은 바위 사이에 집을 지어 안전하게 살고 메뚜기는 떼를 지어 나아감으로 거칠 것이 없으며 왕궁에 있는 도마뱀은 아마 왕궁의 크기와 폐쇄성의 보호를 받아 살아가므로 잡힐 일이 없습니다. 아굴은 이 네 생명체를 통하여 약하지만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지만 약한 자라고 꼭 강자의 먹이만 되란 법이 없습니다. 지혜가 생명을 보존하게 하고 번성하게 합니다. 닥쳐올 환란을 대비하는 것, 피할 처소를 마련하는 것..

잠언484(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30:21-23) 요즘 세상엔 이상한 일이 하두 많아서 아마 이 잠언을 말한 아굴이 이 시대에 사람이었다면 견딜 수 없는 번민에 사로잡혀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지도력이 있어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중적 인기가 높으면 아이라도 되는 것이 지도자이고 정직하고 성실한 자 보다 무모한 투기꾼이 큰 재산을 모으기도 하고 여자가 예쁘면 모든 죄가 용서 된다는 농담이 그저 농담만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굴의 잠언의 요체는 질서를 깨뜨리는 일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치는 능력에 따라 각자의 역..

잠언 483(30:18-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30:20) 증거가 없거나 부족하면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것이 많은 행악자들이 법의 맹점을 빠져 나가는 방식입니다. 아무리 정황이 그 범죄를 증명하는 듯 보여도 자백하지 않고 증거가 없으면 결국은 무죄방면되는 것입니다. 물론 증거가 명백하게 있어도 시효가 지난 것은 죄를 묻지 아니하기도 하니 이 세상의 법이란 죄를 심판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흔적이 남지 않는 죄를 범하는 일엔 매우 담대합니다. 악인은 흔적만 남지 않는다면,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영원히 속일 수만 있다면 어떤 죄인들 마다하지 않으려 하며 악인을 잡아야 하는 이들은..

잠언 482(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30:17) 십계명은 약속있는 첫 계명으로서 효의 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아굴은 불효에 대한 잔인한 심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여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짐승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근본 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자기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사실 분리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모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사용하신 생명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하나님의 마지막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

잠언 480(30:11-14)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30:11) 아굴은 네가지 인간들을 적시하여 놓았습니다. 첫째는 부모를 괴롭히는 자식들이고 둘째는 위선자들이고 세째는 오만한 자들이고 네째는 갑질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무리가 있느니라"고 하고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너무나 당연히 저들의 약함과 그 결말을 아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네 종류의 무리를 무엇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들이며 인간의 본분을 잊은 자들이며 생존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무리"(NIV- THOSE WHO, KJV-A GENERATION)입니다. 무리는 자기들끼리 생각과 행동을 공유하는 자들이며 그 무리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변호하고 ..

잠언 478(30:7-9)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30:7-8) 허탄과 거짓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상태는 마음밖 환경의 문제입니다. 인간을 올바르고 행복하게 하는데에는 마음이 정직한 것이 제일 중요하지만 마음에 영향을 주는 환경도 마음 그것에 못지 않게 중요함을 이 잠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정직하지 않은 악한 것이 도사리고 있으면 결국 그것이 그를 망하게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 연약한 존재여서 부하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기 쉽고 가난하면 그때문에 피치 못하게 범죄하여 하나..

잠언 476(30:2-4)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30:2) 배움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절대적 지식과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감히 아는 것이 있다고 할 처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며 그보다 낮은 차원의 하나님의 피조세계, 그 가시적 대상들에 대하여도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미미하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아는 것이라고는 겨우 오감으로 경험한 것뿐, 거의 대부분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엇인가 배우기 위해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는 일이 결코 억지스럽거나 위선적일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승에게 배우려 해도 자기 주장을 접고 겸손히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