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돌아갈 수 없는 18

전두환의 죽음에 1980년 봄을 회상함.

1979년 10월 26일은 모든 것이 정지된 날이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룬 지도자 박정희 그동안 학습되어 왔던 두가지 면을 가진 인물의 죽음과 함께 나라 전체는 비통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대가 공존하며 숨죽였었다. 당시 대학교2학년이었는데 학교는 나는 당연히 문을 닫았다. 그 이후 다시 학교문을 연 것인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문을 열었어도 아마 잠시였을 것이고 곧 다시 문을 닫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박정희세력의 무력을 두려워 했고 박정희는 대학생들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두려워 했었다. 그러니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요 대학교마다 탱크와 총을 든 군인들이 장악했다. 전철을 탈 때마다,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우리들은 가방을 검색당..

어머니의 사진 한장...

어머니는 숙대를 다니셨다. 식품영양학과라 하셨다. 공강시간이면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다니셨고 전차를 타고 내릴 때면 연애편지가 수북히 쌓였었다는 농담도 하실만큼 즐거웠던 추억이 많으셨다. 교수들은 당시 소속학교에 별 구애를 받지 않고 강의를 다니셨었나 보다. 서을대교수가 와서 강의한 문화사는 오픈북으로 시험을 쳤는데 방심하시다 낭패를 보았었다고. 어떤 친구는 노트를 빌려가 놓고 시험이 끝나고서야 돌려주는 못된 경쟁력을 갖췄었고, 나중엔 그 친구가 교수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아들들과 딸들의 집을 바꾸면서 이삿짐을 정리하는 가운데 직경 3센티도 안되는 정도의 작은 흑백사진 하나가 튀어나왔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이다. 전쟁의 참화를 겪어내던 시절이었으니 그 속사정은 모른다. 어려움과 ..

약혼30주년...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몇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날은 좋았었다. 나는 푸른 빛이 나는 양복을 입었고 그녀는 옅은 분홍색 한복을 차려 입었었다. 큰처남이 제시했던 중국집 대신 둘이 함께 다니던 지하실 작은 개척교회 예배당을 택했다. 나의 어머니 매형 누나 조카들 그녀의 어머니 오빠들 언니들 조카들 그리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온 친구들 몇으로 가득찬 예배당에서 조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했고 작은 처남이 사랑에 관한 노래를 특송으로 불러주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체면도, 형식도, 치장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14K 금반지를 예물로 서로 손가락에 끼워주고 그냥 사랑하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곧 미국으로 떠나실 어머니를 위한 우리들의 약혼식이었다. 기념 사진을 ..

아내의 어린시절 피아노...

마눌님이 국민학교 5학년 때 피아노 배운지 반 년 남짓 넘어서 동네 학원연합^^에서 하는 대회 나가서 5학년 중 1등 상을 받았더랬습니다. 상 주는 양반이 너무 빤질하시고 무성의해 보여서 어린 시절의 아내 모습이 훅 가려지지만 그 양반 왼손으로 덮어 버리고 상받는 소녀만 가만가만히 자세자세히 보면 볼수록 이렇게 예쁘고... 예쁘고...하~ 돌아갈 수 없는...! 국민학교 6학년 베토벤의 소나타를 쳤었다고^^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금상을 탄 것같다는...ㅎㅎ malmiama2017.01.06 22:19 신고 그 때 그 시절...두루 예뻤던 추억이군요^^ 답글 수정/삭제 주방보조2017.01.07 00:11 모든 것이 좋았을 때지요^^ 예쁘고 공부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는 잘사는 집 막내딸... 지금은 칠..

장곡행

http://blog.daum.net/jncwk/13749508 김순옥2015.09.10 08:26 신고 사진속의 인물 말고는 별로 변한 게 없는 모습이네요. 물론 나무는 훌쩍 자랐겟지요? 답글 수정/삭제 주방보조2015.09.10 14:53 누나의 말로는 저희집이 장곡국민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가서 꺽어지는데 있었다는군요. 아래서 두번째 장곡슈퍼가 그 시절에도 가게였다면...제가 저기서 돈도 없이 오징어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다 혼나고 울던 곳일 것입니다. 저 가게 뒤쪽이 저희집이었을테니까요...^^

대학졸업...사진 하나

이 사진은 대학졸업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놈입니다. 뒤에는 모두들 노천광장에서 졸업식을 하고 있는데 혼자 졸업생 대열에 착석하지 아니하고 빠져나와 그들과 등 돌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학 선배이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도 망원렌즈로 훑어보다 실패했다면서 나무라셨고, 신입사원 졸업식에 꽃들고 찾아 오셨던 과장님은 저를 찾지 못하여 회사에서 잠시 놀림감이 되셨다고 합니다. 1026,1212,518...을 겪으며 더러운 세상에 대하여 좀 냉소적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 표정이 그 시절 제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듯 하여 좋아하는가 봅니다. 세월이 32년이나 흘렀습니다. ㅎㅎ...다섯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던, 저 철없이 당당했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졌습니다. 주방보조2014...

1964년과 1966년의 기록...그리고 1975년

옛 친구가 선사했던 007가방을 번호를 잊어버려서 오랫동안 열어보지 못했었습니다. 20년도 더 창고에 틀어박혀 있던 것을 오늘 꺼내서 망치로 번호키를 부수고 열었습니다. ㅎㅎ...타임캡슐이었습니다. 경건의 일기 노트들, 집안 어르신의 서예 받아놓은 것, 상후가 진실과 나실에게 보낸 성탄카드, 다이어리,몇가지 상장들과 증서들 그리고 그 안에 제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의 기록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다 잃어버렸는데 이 타임캡슐안에서 이 놈들만 잘 보존이 된 것입니다. 1학년 때의 생활통지표는 내일이면 50년이 되는셈이네요. 반백년...^^ 전의 기록입니다. 이건 1966년...3학년 한재웅2013.12.31 19:51 신고 사료적 가치가 큰 문서를 발견하셨군요^^ 앞으로 50년만 더가..

어머니의 구부러진 새끼 손가락...

어머니를 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잘 아는 분과 만나 대화 하는 중에 어머니의 글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의 글씨가 참 훌륭했다고 기억하시고 계시다고... 제 어머니는 글씨체가 참 독특하셨습니다. 예쁘거나 단정하거나 균형잡혔다기보다는 힘있게 쭉쭉 뻗은 칼날같은...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의 훌륭하다는 평에 대하여는 글쎄요... 어머니는 숙대를 나오시고 적지않은 기간동안 교직에 몸담으셨었습니다. 좌골신경마비로 쓰러지시고 교단을 떠나셔서 몇년후 몸을 겨우 회복시키셨을 때는 다시 교직으로 돌아가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비 후유증은 그 이후에도 어머니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른 손... 제가 국민학교 1학년 때 세들어 살던 ..

우열반의 추억...

초등학교 6학년 5월에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성적은 급전직하 ...거의 바닥을 향하였습니다. 처음은 19등 마지막은 90여등... 뺑뺑이로 당첨된 학교는 동도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우열반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1반 2반, 9반 10반은 우등생 반...3,4,5,6,7,8반은 열등생반. 저는 1학년 5반 ...열반 ...당연한 결과 (1학년 5반 봄소풍 동구능... 가운데는 정말 착했던 차문덕이란 친구, 오른쪽 친구는 기억이 안남) 이 해는 학기마다 우열반을 다시 편성했습니다. 참 잔혹한 시절이었지요. 저의 반에선 세명 정도가 우수반으로 2학기때 반을 옮겨 갔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초등학교의 악몽을 떨쳐버리고 ... 돌반에서 1등을 달리던 저는^^ 2학기때는 1학년 10반...우수반으로 영전되어 갔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