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돌아갈 수 없는

전두환의 죽음에 1980년 봄을 회상함.

주방보조 2021. 11. 28. 16:05

1979년 10월 26일은

모든 것이 정지된 날이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룬 지도자

박정희

그동안 학습되어 왔던 두가지 면을 가진 인물의 죽음과 함께

나라 전체는 비통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대가 공존하며 숨죽였었다.

당시 대학교2학년이었는데

학교는 나는 당연히 문을 닫았다. 

그 이후 다시 학교문을 연 것인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문을 열었어도 아마 잠시였을 것이고 곧 다시 문을 닫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박정희세력의 무력을 두려워 했고 박정희는 대학생들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두려워 했었다. 그러니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요 대학교마다 탱크와 총을 든 군인들이 장악했다. 전철을 탈 때마다,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우리들은 가방을 검색당했고 신분증이 없으면 버스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끌려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운 세상이었다. 

1212사태가 나고

전두환이 그 빛나는 대머리와 무뚝뚝한 목소리로 우리들 앞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생각하기를 참 다행스럽게도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다.

가택연금 상태의 정치인들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이제 곧 세상ㄴ은 저들 중 한 사람에 의한 진보된 민주주의가 곧 실현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개학을 하고

학교는 개학초부터 시끄러웠다. 학생들은 선동되었고 학교를 박차고 밖으로 나아갔다. 한동안 학교 앞에서 대기하던 백골단이라 부르던 기동타격대의 대항이 있었으나 4월이 되면서 그들의 방어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화문으로 서울역으로 나아갔고 조직화 되었으며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었다.

5월엔 서울시내는 내가 보기에 데모와 최류탄이 일상이 되었다.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구자였던 나비넥타이 김 교수님은 부총장으로 복귀하셨으나 그는 학교 장문에서 학생들의 가두행진을 간곡히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밀물처럼 문을 박차고 나서는 그 젊음들을 어찌 막을 수 있었으랴.

그의 혜안이 보는 미래. 온 세상을 통제불능으로 만들고 한꺼번에 잡아버리려는 신군부의 전략은 대학생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 대략 10.26 이후부터 광화문 무교동에서 누님의 화방 일을 돕기 위하여 일하고 있었고 새학년이 시작되면서는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 1시부터 화방에서 밤11시까지 일 했었다.

서울의 봄 1980

가게문은 절반은 열리고 절반은 닫았다. 문 닫은 날이면 친구들이 와서 바둑두고 카드도 하고 술도 마시며 노는 놀이터가 되었다.  공부는 이래저래 할 형편은 못되고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야무지게 먹었던 꿈은 사라졌으며 불안정한 세상의 요동 속에 중간고사를 망치고 한과목을 위드로 시킨 나는 찾아오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2학년 말부터 시작된 즐거운 가게 생활에 싶이 젖어갔다. 가게 밖은 날마다 시끄러웠다. 어떤 날은 셔터를 내리고 있는데 페퍼포그연기가 새어들어와 모두 탈출을 해야만 했었다. 

과연 그 김교수의 예언대로

5월17일 서울은 계엄령이 떨어졌고

다음날 5월18일 광주에선 419에 이어 두번째로 권력에 의해 민주와 자유를 외치는 수백의 민간인 희생자를 내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때 최고권력자는 대통령 최규하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전두환이었다.

학교는 문을 다시 굳게 닫았고

누님의 가게는 결국 7월에 문을 닫았다. 막대한 손실을 남긴 채.

그리고 나는 리포트로 대신한 기말고사를 대충 작성해 제출했고 C로 도배된  기가막힌 성적표를 받았었다.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전두환, 그가 드디어 11월 23일 죽었다.

사죄도 사과도 받아줄 사람이 없을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때문인지, 그는 사과도 사죄도 남기지 않고 갔다. 이 세상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마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적다 할 수만은 없는 공로들도 모두 용서받지 못한 자의 수욕 속에 묻혀 버릴 것이다.

 

사족:

그의 작은 아들이 목사?가 되었다는데

그가 대신 사죄할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바른 목사라면 응당 아버지의 죄를 짚고 가야 할 것이라 생각 하는데...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으리라. 

 

 

  • 왕언니2021.11.30 15:18 신고

    전두환의 죽음은 60대 이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참 많은 생각과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것 같습니다.
    나는 79년 4월 쯤인가 남편의 광주발령으로 그곳으로 이사를 갔고
    10.26때 tv로 생중계되는 박대통령의 장례식을 보며
    그래도 한때는 새마을운동으로 전국민을 잘살게한 대통령이
    부인도 총격으로 잃고 그마저 부적절한 공간에서
    부하의 총격에 죽었다는게 너무 불쌍해서...
    자식 둘을 결혼시키지 못하고 갔다는게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연이은 12 12, 이듬해 5.18 을 광주의 현장에 살면서
    공수부대의 만행과 ,도시전체의 봉쇄를 겪으며
    혼란의 1년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때 까지 참 특별한 경험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그럴진대 광주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기막힌 시간이었겠어요?
    딸기밭에서 시체를 거두는 헬기를 본 이후로 한동안 딸기를 먹지못했고
    한동안 5월이 되어 햇딸기가 나와도 먹지 못했습니다.

    몇가지 잘한것을 덮는 그의 결정적 잘못을 사과 하고 참회하고 갔다면
    그나마 속죄 받을 수도 ? 있었을텐데 ....
    남아있는 자식들이 죽을때까지 아버지의 업보?를 대신 짊어지고 살게 뻔하니 불쌍합니다.

    답글
    • 주방보조2021.12.01 16:42

      광주에 계셨으니 역사의 산 증인이신 셈이네요. 군사독재가 끝나는 일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었나 봅니다.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노태우처럼 가족들이라도 참회하고 반성하였으면 좋겠습니다.

  • 시골마을 주민2021.11.30 22:04 신고

    1979년 저는 시골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교감선생님의 동생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어서 여러 고급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교감선생님이 대통령감이 삼김도 정승화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무실의 누구도 전두환을 생각하지는 못했지요.
    면단위의 시골이라 1212도 518도 언론을 통해서밖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의 비극은 한달 후 춘천에 왔다가 동아리 후배를 통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공 개헌 홍보에도 강제 동원되어 본의 아니게 계도를 다녔지요.
    가정방문 가서는 개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고 상담만 하였고, 반상회에서는 상부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홍보물을 낭독하고 한마디도 제 의견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사들을 주 3회 오전수업을 시키고 가정방문 홍보를, 며칠에 한번씩 반상회에 동원해서 홍보를 하고 기권방지를 지시하고 예상자 명단을 보고하라고 했지요. 투표율을 올리려고 혈안이 되었지요.
    제가 거주하고 있던 면에서 3000명이 투표했는 데 반대가 6표가 나왔습니다.
    동료 교사들의 반대표만도 10표는 넘었을 터인데....
    적어도 오공헌법은 민의가 아닌 강압적인 요식절차를 거친 그들의 통치 규칙인 것입니다.
    사과도 안하고 전은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샤가 그를 심판할 것입니다.

    답글
    • 주방보조2021.12.01 19:20

      박정희의 유신이후 통치를 그대로 물려받았는데다 거기에 곱을 더하였으니 오직 힘으,로 밀어붙여서 국민을 꼼짝 못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도우사 이 나라가 민주화 되고 더욱 번영하고 ... 마지막까지 자기 잘못을 못 뉘우치고 간 것이 참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잘한 일만 기억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신경 쓰지 않는...내로남불 말입니다.
      전두환의 고집이야말로 내로남불의 근원입니다.

  • malmiama2021.12.01 07:48 신고

    대학 축제 전 날 터진 10.26. 다음해 내내 이어진 혼란스러웠던 세상.
    운동권과 거리를 두었으나 운동권에 휩싸였던 시절...드라마틱한 사건이 많았지만
    피해 당사자,가족이 아닌지라 미안하게도
    어느덧 기억에서 많이 희미해졌네요.
    ....
    40여년 전 사진..살벌한 세상과 달리 주방보조님은 따뜻해 보입니다.^^

    답글
    • 주방보조2021.12.01 19:26

      저는 누님 가게 장사 안 되는 것만 걱정하던 방관자였습니다. 전두환 나쁜놈 욕하면서 그런데 왜 데모를 하필이면 여기까지 나와서 하나...다른 곳에서 하지...뭐 그런 입장이었지요. 나중에 안 서울역 회군?(어차피 가게문을 못열어서)에 참여하여 모였다가 왜 그런지도 모르고 용산을 거쳐 노량진까지 걸어갔던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저 날이 마침 따뜻하였습니다.^^

  • 들풀2021.12.01 15:19 신고

    그러네요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늙어버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너무나도 어린아이들 같기만 합니다.
    그시절에 우리는 참 우울했는데..

    사진속 저분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멋스러우십니다.

    답글
    • 주방보조2021.12.01 19:31

      정말 우울했었지요.
      모이기도 힘들었지만, 모이면 모두 한탄과 분노로 시간들을 메꿔나갔습니다.
      저때 배운 것이 욕, 고스톱, 포커, 바둑,,,같은 것 뿐입니다.

      교신이는 저 사진에 대해 네 나이때 아버지야 하니 힐끗 보더니..아버지는 무척 노안이셨네요 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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