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무슨 무슨 주의(主義) (5): 기독(基督)

주방보조 2004. 2. 8. 03:44
<제114호> 무슨 무슨 주의(主義) (5): 기독(基督) 2003년 08월 15일


'그리스도주의'는 세 차례에 걸쳐 올린 무슨 무슨 주의(主義)에 대한 글의 결론 격입니다.  그
런데 바로 지난 글에서 기독(基督)이라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써 보려고 했더니, <성경의 한국 개념> 97호 칼럼에서 벌써 말씀드린 적이 있더군
요.

당시에 독자 한 분(최병창님)께서 제기하신 질문에  대답을 드리기 위해서 답글 난에 올렸던
글입니다.  그 글이 조금 더 포괄적인 면이 있길래, 약간만 다듬어서 무슨 무슨 주의(主義)의
'덧붙이는 글(補論)'로 삼습니다.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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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한국 개념> 97호 칼럼 답글.

두서없이 시작한 한국 개념 가꾸기에 대해 좋은  의견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짐작하셨
겠지만 "메국 이름 바꿔주기"는 심심풀이나 사소한 트집잡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
글살이와 마음살이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지적하고 그 두  가지를 점차 일치시켜 가자고
시작한 조그만 움직임입니다.  

말글살이와 마음살이가 어긋났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 두 가지는
어긋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 중의 한가지가 잘못  됐다면 다른 하나도 저절로
잘못 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사람의 마음살이는 곧바로 말글살이를  통해  표현되고,
반영되고, 또 적극적으로 틀 지워지는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이런 말글살이와 마음살이의 밀접한 연관성은 제 주장이 아닙니다.  많은 언어학자들과 심리
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이미 다 주장해 놓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말글살이에서 이상한 점이 자꾸 발견된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살이가 헝클
어져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마음살이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제대로 된 문화를
일구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살이가  결집된 총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남의 나라 말글의 음운론과 어휘론에 바탕을 둔  "미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이
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상해진 말글살이에  우리의 마음살이가 적응을 한 결과겠지요.  
저는 그것을 좀 다시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었습니다.

최병창님께서는 "기독(基督)"라는 이름에 대해서 비슷한 생각을 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전
적으로 동의합니다.  "기독"이라는 이름도 역시  내 마음살이를 반영하는 말글이지만 그것은
곧 내 마음살이가 좀 잘못돼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기독(基督)이라는 이름은
일종의 사생아입니다.  원래는 基利斯督라는 한자어 이름을 줄여서 基督이라고 쓰고 '기독'이
라고 읽는 것이지요.  

전 이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으로 조사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중국에서 먼저 쓰
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19세기 중엽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 이름인지도 잘 모르겠습니
다.  기원의 불확실성을 논외로 한다고 해도 基利斯督라는 이름이나 그것의 줄임말인 基督은
한국말글의 음운론이나 어휘론에 적합한 이름이 아닙니다.

基督을 한국식 한자음을 따라서 '기독'이라고 읽는다면, 基利斯督도 '기리사독'으로 읽어야  합
니다.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을 겝니다.  그러나 그걸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찌리쓰
뚜(ji3-li4-si3-du3)가 됩니다.  그나마 헬라어 '크리스토스'와  비슷해지지요.  한국말 '그리스
도'에 비하면 형편없는 음차입니다만, 그래도 중국어에서는 그게  원음에 가장 가까운 발음입
니다.  뜻글자로 그정도 나마 음차를 할 수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일본사람들도 基利斯督과 그 축약형인 基督을 받아들여  자기네 발음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부호인  카다카나를 사용하면 キリスト라고 쓰고 "키리스토"라고 읽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基督이라는 한자어 이름을 사용하지만 그것을 읽을 때는 반드시  キリスト라고 읽
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基利斯督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基督이라는 축약된 후에 일
본으로 수출됐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에 음운체계가 훨씬 탁월한 한국말로는 크리스토스를 중국식  基利斯督나 일본식 キリス
ト보다 훨씬 원음에 가깝게 음차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한국의 성
경 번역자들은 중국과 일본이 채택한 基利斯督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순한국말로
'그리스도'라고 음차 번역을 해 낸 것이지요.  한국말 특성을 살린 대단히 훌륭한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훌륭한 번역을  완성해 놓고서도 여전히 基利斯督이니 基督이라
는 말을 쓸 뿐 아니라 그걸 '기리사독'이니 '기독'이라고 읽고들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건 대
단히 어이없는 일입니다.  컴퓨터를 개발해 놓고서 주판알 퉁기는 격이니까요.

基利斯督이나 基督은 중국말로 "크리스토스"라는 헬라어  이름을  음차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원어에 그다지 가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게 자가네 나라 말글을 사용해서 음차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지요.

반면에 한국말로는 基利斯督의 중국식 발음보다 훨씬  원음에 가깝게 음차할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토스'라고 쓰면 거의 완벽한 음차가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훌륭한 음차어를
제쳐놓고서 "기독"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쓰고 있는 게 지금 한국 사람들의 실정입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이 채택한 "그리스도"라는 음차어에도 한국말글의 음운론과  어휘론에 비추
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 나타납니다.  첫째는 헬라어 원어 이름 "크리스토스"의  마지막 음
절인 '스'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점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헬라어 이름 '크리스토스'는 사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크리스토'라는 고유명사와 '스'
라는 주격조사(혹은 접미사)가 합쳐진 말이지요.  그래서 '크리스토'가 목적격일 경우에는 '크
리스톤'이 되고 여격일 경우에는 '크리스토,'  그리고 소유격일 경우에는 '크리스튜오'가 됩니
다.  

다시 말해 '크리스토스'의 맨 마지막 음절 '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주격을 표시하는 접미사
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한자어에서도 이  마지막 음절 '스'는 표기되지 않았고  한국어
번역에서도 빠지게 된 것이지요.

그 점은 '예수'라는 번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나타난   '이에수스'라는 이름
은 한국말 성경에서는 마지막 '스'를 빼버리고 '예수'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영어에서는 이 주격접미사 '스'를 유지해서 '지저스(Jesus)'라고 부릅니다.  관행상 그
렇게 되었겠지만 다른 이름을 번역할 때와는 다르게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번역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지저스'라는 영어 번역어보다는 '예수'라는  한국말  번역어가 훨씬 헬
라어 발음에 가까운 더 좋은 번역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둘째는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에서 두 거센소리(激音), 즉 첫 음절의  '키읔'소리와 넷째 음절
의 '티읕'소리가 예사소리(平音)인 '기역'소리와 '디귿'소리로 바뀌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
서 개역 한글판의 표기는 '크리스토'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건 좀 문제가 됩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로 번역할 때에는 평음이나  격음, 심지어 경음의
구별이 뚜렷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중국말과 일본말에서는 그 구별이 별로 중요하
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중국말에서 헤어질 때 인사말로  쓰이는 '再見'은 흔히 '짜이찌
엔'하고 발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치엔'으로  발음할 때도 있고 '자이지엔'으로 들릴
때도 있습니다.  예사소리 '지읒'과 된소리 '쌍지읒,' 그리고  거센소리 '치읓'의 구별이 별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본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래어 표기용 일본말 표기체계를 カタカナ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에 따라서 '가다가나'라고도 읽고, '카타카나'라고 읽는가 하면 심지어 '까따까나'라고 읽
어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습니다.  일본말에서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사소리(平音)
와 된소리(硬音)와 거센소리(激音)가 자음표기법에서  구별되지도 않고 또 그  구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말 자음체계에서는 그 세 가지 소리는 엄격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세
가지 자음은 서로 혼동될 여지가 없이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 세 가지를 혼동해서 쓰면 의
미가 흔들립니다.  예컨대 '가지'와 '까지'는 서로 영 다른 말인 것이라는 말이지요.

예사소리와 된소리와 거센소리가 뚜렷이 구분된다는 것은 한국말의  자음체계가 잘 발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음  체계를 잘 활용하면 세계  각국의 말을 아주 훌륭하게
음차해서 적어낼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한국말을 이용해서 헬라말 이름을 '크리스토'라고 원
음에 아주 비슷하게 음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사소리와  된소리,  거센소리의 구별이
거의 없는 중국말과 일본말의 음차법을 베끼는 바람에 '그리스도'라는 음차어 (정확히 말하면
중국어나 일본어로 음차된 것을 한국말로 재음차한 말)를 갖게 된 것이지요.

이런 점으로 볼 때,  한국말의 잠재력을 최대한  살린 음차어는 '크리스토'가   될 것입니다.  
기존의 '그리스도'는 그나마 원음에 가깝기는  하지만  거센소리를 살리지 못한 단점이 있기
때문이고, '기독(基督)'이라는 말은 중국식 음차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데에 불과한 이
상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리스토'라는 원음에도 가장 가깝고 한국말 음운론과 어휘론에도 맞는 이름
을 제안해도 반발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관성(慣性) 때문입니다.  그 동안 그렇게 써
왔기 때문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지요.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한번 버릇이 들면 무서워집니다.  익어버린 버릇은
어떤 논리나 추론으로도 설득되지 않고 계속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문제삼으
면 인격적이거나 도덕적인 도전으로까지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기독(基督)'이나 '그리스도'라는 말 대신에 '크리스토'라는 말을 써서  얻어지는 이점
은 무엇일까요?  그런 게 있다면 그나마 설득하기가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이 듣고 혹할만한 가시적인 이점을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기껏 할 수 있는 말이래
야 "말글살이를 제대로 해야 마음살이가 제대로 되고, 그래야 제대로 문화를 가꿀 수 있다"는
말 정도이겠습니다.  

물론 이런 대전제에는 누구나 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진국의 많은 학자들이 확
증해 놓은 일종의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대 전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이름, 또
는 하나의 개념을 따져 놓으면 반발에 부딪힙니다.   '메국'이라는 이름이 그렇고 '크리스토'
라는 이름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글살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온 사람들의 마음살이가 이미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것을 자꾸 지적하는 것이 바로 제가  시작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한국 말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메국'이나 '어메리카 연주국'이라는 말보다  '미국'이나 '아메
리카 합중국'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정상은 아니기 때문
입니다.  또 '그리스도'나 심지어 '기독'이라는  말이 '크리스토'라는 말보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동안 시도한 이런 저런 글쓰기는 바로 그런 '자연스러운 익숙한 것'을 '이상하고  낯
선 것'으로 뒤집어 보기 위한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하고 낯선 것'을 '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으로 느끼는  우리의 마음을 한번 더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