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어리석다'에 대하여 (7): 한국 원숭이 (1)

주방보조 2004. 2. 8. 03:46
<제116호> '어리석다'에 대하여 (7): 한국 원숭이 (1) 2003년 08월 22일


'어리석다'를 살피는 중입니다.  
어리석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보'는 타고난 어리석음, '어림'은 성장 미달의 어리석음,
'미련함'은 고집스런 어리석음이라고 했고,
원숭이 마음이라고 풀리는 '우(愚)'는
원숭이처럼 똑똑한 듯 보이지만 결국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이라고 했습니다.

우(愚)의 뜻을 살피려고
중국 고사 조삼모사(朝三暮四)와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孫悟空)을 관찰했었습니다.  
단장(斷腸)이라는 고사를 통해서도
원숭이가 꼭 교활하거나 어리석은 것만은 아니며,
애절한 모성을 가진 동물로 중국인들에게 비쳐진 바 있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사람들이 원숭이를 보던 관점이었지요.  
조삼모사든 손오공이든 단장이든 모두
중국 책에 기록된 중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에게 원숭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한국 사람들도 원숭이를 교활하거나 멍청하다고 봤(혹은, 보고 있)을까요?  
극진한 모성애의 화신으로 보고 있을까요?

우스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제대로 원숭이관을 가질 수 없는 입장이었다는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에는 원숭이가 없었으니까요.  
그게 참 이상하기는 합니다.  
중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는 원숭이가 한국에서 서식한 흔적이 없답니다.

원숭이가 주로 남방에 사는 동물이기는 하지만
한국에 서식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일본 원숭이만 보더라도 영하 20도에서도 잘 살고 있으니까요.  
요즘 일본 관광 패키지 중에 '온천욕하는 원숭이 구경'이 꼭 들어가잖습니까?

일부 학자들은 '원숭이가 한반도에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라는 게 원숭이를 소재로 한 한국 문화가 적지 않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거야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어려운 말로는 '남의 문화 베끼기'이고
쉬운 말로는 '문화 전파'라고 합니다.

한국의 원숭이에 대한 지식은
다른 문화에서 유입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원숭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원래 원숭이는 '꼬리긴 원숭이' 원(猿)과
'꼬리없는 원숭이' 성(猩)을 합쳐서 '원성(猿猩)이'였는데,
모음변화가 일어나서 '원승이'를 거쳐
오늘날의 '원숭이'가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런데 원숭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이 그때까지 원숭이를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원숭이라는 말 대신에 '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1446년에 출판된 "훈민정음 해례"에 "납 爲猿"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납이란 원숭이다"는 뜻이지요.  
"납"이 "원숭이"라는 고유어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오랜 문헌입니다.  
그 뒤에 출판된 16세기 이후의 한자 학습서들(훈몽자회나 유합 등)에 보아도
원(猿)과 신(申)자의 새김이 모두 '납'입니다.  

이 '납'은 그 후 '날쌔다, 빠르다'는 뜻의 '재다'와 합쳐져서
'잰납' --> '잰나비' --> '잔나비'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도 간간이 쓰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잿납 --> 잰나비 --> 잔나비'로 변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어떤 게 사실이었는지는 알기가 어렵답니다.

아무튼 두 세대 전만 해도
'원숭이'보다는 '잔나비'가 훨씬 더 보편적인 말이었습니다.  
19세기말에 시작해서 20세기초까지 번역이 끝난 한글 개역판 성경에
원숭이가 딱 두 번 나오는데,
그때도 한자어 어원인 '원숭이' 대신 고유어 어원인 '잔나비'를 썼습니다.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 (열왕기상 10장22절)

"왕의 배들이 후람의 종들과 함께 다시스로 다니며
그 배가 삼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옴이더라" (역대하 9장21절).

솔로몬 왕의 행적을 같은 맥락에서 기록한 두 성경 구절에서
'잔나비'가 두 번 나옵니다.  
보시다시피, 잔나비는 당시 유다에서도
'금과 은과 상아와 공작'에 버금가는 아주 진기한 보물에 속하는 짐승이었지요.

적어도 15세기에 '납'이라는 말이 있었다 해도
그게 곧 한국에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건 원숭이를 희귀한 동물로 본 기록이 여기저기 많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세조 실록에 보면 세조 12년 (1466년)에
일본 왕이 사신을 보내면서 원숭이를 선물로 보냈답니다.  
이를 본 김종서가 희귀한 동물이라고 신기해하면서
그 예찬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는 원숭이가 국가간 공물로 선택될 정도로 희귀한 동물이었고,
따라서 1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원숭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겝니다.

고종3년(1866년)에 국왕이 왕비를 맞은 사실을 중국에 알리기 위해
연행사가 파견됐었습니다.  
당시 25세의 젊은 선비 홍순학이
연행사 대표 김인겸을 수행해 연경에 다녀왔습니다.  
홍순학은 자기 기행문을 가사로 지어서 제목을 "연행가"라고 붙였습니다.  
거기보면 '낙타와 원숭이 등 처음 보는 동물'이 신기하다며
자세히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해도 원숭이는 조선에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고려와 조선시대 문학 작품에는 원숭이를 노래한 것이 꽤 됩니다.  
정지상이나 김종부나 이윤종 등의 한시에도 원숭이가 나오고
정철이나 홍순학의 시조나 가사에도 나오고,
심청전과 심청전, 춘향전과 옥단춘전, 금방울전 같은 소설, 사설 혹은 판소리 작품에도
원숭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동물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다 보니까
거기에는 어떤 한국 고유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센 장수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교활하거나 혹은 남의 흉내나 내는 어쭙잖은 동물로 비유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서글픈 울음의 동물로 그리는가 하면,
모성애의 극치로 그려놓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작자와 연대기 미상이나 조선 후기 소설로 추정되는 금방울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진중으로부터 일원 대장이 나서니
얼굴은 관운장같고 곰의 등에 이리의 허리요 잔나비의 팔일러라.
위풍이 늠름하고 위의가 정제하여 당당한 풍도는 사람을 놀래고
현헌한 위엄은 북해를 뒤침과 같았으며..."

원숭이가 관운장과 곰과 이리와 비슷한 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위풍이 당당한 사람을 묘사하는 비유로 원숭이를 쓴 것이지요.  

또 증산도의 도전 9편 53장에 보면
상제가 도깨비를 불러 제사 음식을 가져오도록 명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도깨비의 딴 이름이 바로 '잔나비'이고
그 도깨비들의 대장 격인 잔나비의 형상이 "몸집이 크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 생각하는 원숭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잖습니까?  
원숭이를 본적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원숭이를 관운장이나 곰, 혹은 도깨비 같은 풍채 좋고 위엄 있는 장수상으로 그린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중국의 원숭이 이미지를 베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장수형으로 형상화할 건수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으로는, 두 가지 쯤 됩니다.  

첫째는 앞에서 본 바대로 서유기의 손오공(孫悟空)입니다.  
손오공은 불경 전수의 임무를 마치고 나서
그 공로로 부처로 승격되는데(成佛)
그때 새로 얻은 부처 이름이 "투전승불(鬪戰勝佛)"입니다.  
무슨 뜻인지 금방 짐작이 가시지요?  
"싸워서 이기는 부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로써 손오공은 초기의 망나니 이미지를 벗어나,
여의봉을 꼬나들고 근두운을 타고 다니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전 무패의 장수불이 된 것이지요.  
중국에서 원숭이를 때로 장수형으로 형상화하는 데에는
바로 그런 문학적 상상력이 깔려 있습니다.

원숭이를 호전적인 장수형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백원전(白猿傳)이라는 소설입니다.  
태평광기(太平廣記) 444권에 나오는 백원전은,
서기 6세기경 당(唐)대의 시인 구양순을 풍자하기 위해 쓰여진 작자 미상의 소설입니다.  
내용은 제목대로 "흰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작품 초입에 보면 "험중한 촉산에 7척 거구의 큰 원숭이"라고 묘사돼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원숭이를 기골이 장대한 장수로 그렸던 것은
'손오공'과 '흰 원숭이'로 형상화됐던 문학적 상상력 때문일 것입니다.  
금방울전이나 증산도의 도전에 나오는 장수형 원숭이 이미지는
바로 손오공(孫悟空)과 백원(白猿)의 이미지를
그대로 '베꼈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요.  
실물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베낀 것은 '장수형 원숭이' 이미지 뿐은 물론 아닙니다.  
사설로 읊어진 심청가에 보면
"산협(山峽)의 잔나비는 자식 찾는 슬픈 소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 "옥단춘전"에 보면 이런 대목도 나옵니다.

"... 울며 호소하는 이혈룡을 실은 배가
대동강을 따라 내려갈 제,
산천에는 황금같은 꾀꼬리가 버들 속을 왕래하고,
좌우편의 뻐꾹새들은 제 신세를 한탄하여
이리 가서 뻐꾹뻐꾹 저리 가서 뻐꾹뻐꾹 울음 울고,
무심한 잔나비는 부라질을 일삼는구나."

'잔나비의 부라질'이 뭔지 아시는지요.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부라질'은
'젖먹이의 두 겨드랑이를 껴서 붙잡고 좌우로 흔들며,
두 다리를 번갈아 오르내리게 하는 짓'이라고 풀려 있습니다.  (야후 국어 사전).  
그렇습니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를 놀리는 모습이지요.

잔나비가 자식을 찾는다는 둥,
새끼를 데리고 놀고 있다는 둥의 모습은
앞에서 본 단장(斷腸) 고사에 나오는 원숭이 이미지를 베낀 것이지요.  
특히 심청가에서는 "산협"이라는 장소를 명시함으로써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단장 고사의 출생지라고 볼 수 있는
서촉의 협곡지대를 가리키니까요.

새끼를 생각하는 극진한 마음을 가진 원숭이 이미지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어미와 새끼 사이의 진득한 정"으로까지 형상화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원숭이의 '부라질'을 소설에 끼워 넣는 사태가 생긴 것이지요.  
더구나 고려와 조선시대에 제작된 그림이나 연적, 청자 등에
원숭이 모자상을 그리거나 새겨넣은 것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고려시대의 작품
"청자(靑磁) 모자원형연적(母子猿形硯滴)"입니다.  
이름에 나타난 바대로 "원숭이 어미와 새끼를 새겨넣은 청자 벼루"이지요.  
이 연적은 한국의 국보 27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한국 원숭이" 계속 됩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