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어리석다'에 대하여 (8): 한국 원숭이 (2)

주방보조 2004. 2. 8. 03:47
<제117호> '어리석다'에 대하여 (8): 한국 원숭이 (2) 2003년 08월 24일


(앞에서 계속)

고려와 조선의 시인들은 주로 원숭이의 '소리'를 노래했습니다.  
먼저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이규보의 시에도
'원숭이 소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예컨대 "북산에서 다시 놀면서-2수(重遊北山二首)"에 두 번,
"감로사에 남긴 시(次韻同年文員外題甘露寺)"에 한번,
그리고 "슬품을 꿈꾸는 노래(夢悲賦)"에 한번씩 '원숭이 소리'가 나옵니다.

1.
지는 해에 나는 새 그림자 지는데
달밝은 공상에는 원숭이 소리네
2.
놓여난 학이 된 몸 이젠 누가 구속하랴
놀란 원숭이 돌아치며 나를 대충 위로하네
(이상, 重遊北山二首)

내 좋은 글귀찾아 진 빚을 다 갚고저
서리와 원숭이 동무삼아 이 산곡에 머물러라
(次韻同年文員外題甘露寺)

안개는 어둑어둑 먼산을 덮어가고
원숭이는 서로 조상하듯 애처로이 울고
뭇새들은 지저귀기를 마지않았도다
(夢悲賦)

이렇게 이규보의 원숭이는 주로 소리를 통해 형상화돼 있는데,
그것도 대개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원숭이 소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슬픈 원숭이 소리'는 이규보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예컨대 정지상도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와
"등고사에 올라(登登高寺)"라는 시에서 원숭이 소리를 그렸습니다.

(題邊山蘇來寺)
山月漸白啼靑猿 산월은 창백하고 원숭이 울음 푸르도다
奇哉尨眉一老衲 기이해라 삽사리 눈썹의 노스님
長身不夢人間喧 세상 일 모두 잊고 앉아만 있구나

(登登高寺)
"따스한 햇살에 제비는 날아 별전(別殿)에 오고,
휘영청 달밤 잔나비 울음이 빈산에 울려온다."

정지상에게로 오면 원숭이 소리는 몽땅 '울음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규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원숭이의 울음소리는
전부 애절함과 얽혀 있지요.  
그래서 원숭이 울음소리는 "참백한 산월"과 어울리기도 하고
"빈산"에 울려 퍼져 적막함을 더해주는 촉매제입니다.

원숭이 소리의 애절미는 고려시대에만 그치지 않고
조선 시대까지 계속됩니다.  
우선 김종직의 아래 시를 보시지요.

....................................................
내가 시로서 경치를 읊으매 날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매 잔나비마저 그 울음을 멈추도다.

원숭이가 울다 그쳤다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정철의 "장진주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한때 좋아했던 시라서 해당부분 뿐 아니라 모두 옮겨놓아 보겠습니다.

한 잔(盞) 먹사이다 또 한잔 먹사이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사이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정철, 將進酒辭)

맨 마지막 부분에 원숭이가 나옵니다.  
원숭이 울음소리를 '휘파람 소리'로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군요.  
그러나 이규보나 정지상의 시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원숭이 울음소리"라는 청각 요소와
"무덤"이라는 시각적 배경이 어울려서
소슬함과 외로움과 무상함과 애절함.... 등을 자아내려고
아주 애를 쓴 시입니다.

애절한 원숭이 소리 이미지는 남자들 뿐 아니라
여류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16세기 조선의 여류문인 매창 이향금의 <선유(仙遊)>라는 시의 일부를 보시지요.

삼신산 선경속에는/
난초 피어 마치 취미가운데 있고/
학은 구름속 깊은 나뭇가지에 울고/
잔나비 눈덮인 산등에서 울다/

잔나비는 주로 더운 지방 밀림에 사는 동물인데도
"눈 덮인 산등에서" 우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원숭이의 최북단 서식지로 알려진 일본에서는
원숭이가 영하 20도의 추위에도 견디기는 합니다만.)  
원숭이의 특징을 그 울음소리로 잡은 것은
조선의 남자 시인들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이규보와 정지상과 정철과 이향금의 시를 보면서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는, 어째서 이들 시인들은 한결같이
원숭이의 '캑캑캑...' 거리는 소리를
'슬프거나 애절하거나 소슬함이 배 있는 울음소리'라고 해석했을까?  
거의 천편일률적이다시피...  
원숭이 울음소리를 듣고 좀 다른 걸 느끼고 형상화할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둘째는,
그들은 과연 원숭이 울음소리를 정말 듣고서 그런 시를 썼던 것일까?  

물론 대상을 직접 듣거나 보아야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원숭이 소리를 울음소리로 듣든, 애절한 소리로 듣든,
그건 전적으로 시인의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일이겠습니다.
그런걸 전문용어로 "시적 자유"라고 한다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들이
중국인들의 시상(詩想)을 베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예컨대 당(唐)나라의 두 시인 이태백과 두보의 시에 나오는
원숭이 이야기를 잠깐 보겠습니다.

1.
취한 채 이별하는 강가에는 귤 냄새가 풍긴다
생각하면 그댄 상산 달 아래에서
잔나비 소리에 시름도 꿈속에 잠기리.

2. 가을 밤
가을 바람 속에 잔나비 울어
시름 없는 사람도 애를 끊나니.
(이태백)

風急天高猿嘯哀 바람 차고 하늘은 높은데 잔나비 울음 슬프고
渚淸沙白鳥飛회 물은 맑고 모래 하얀데 새는 날아 내려 앉네.
(杜甫-登高)

이태백과 두보는 모두 8세기를 살았던 사람이고
중국에서는 시성(詩聖)과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시의 쌍벽을 이루는 시인들입니다.  
중국에서 유명했던 시인들이었을 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에서도 그 두 사람의 시를 흠모했던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의 시는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 오면서도 문인들에게 애송됐고,
자연히 한국의 문인들은 그들의 시상을 베끼는 데에
(나쁜 말로, 이어받는 데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중국시인의 시를 워낙 좋아한 나머지
"한국에는 원숭이가 없다"는 간단한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고
시를 쓴 것이지요.

사대주의에 푸욱 젖은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식 원숭이 이미지를 베껴대는 데에 정신을 팔았지만,
그 이전의 삼국시대에는 원숭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나오는 귀토설(龜兎說)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인도 불경 '자타카 본생경(本生經)'에 수록된 설화를 한번 보시지요.

"바닷속에 용왕이 살았다.  
왕비가 애를 배서 입덧을 하는데
원숭이의 염통이 먹고 싶다고 했다.  
용왕은 원숭이 염통을 구하려고 뭍으로 나갔다.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먹는 원숭이를 만났다.  
용왕은 '이곳은 별로 안 좋으니까
아름답고 열매 많은 바닷 속으로 안내하겠다.'고 꼬셨다.  
솔깃한 원숭이는 좋아라 용왕 등에 업혀 물 속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용왕은 그만 사실대로 얘기를 해버렸다.  
놀란 원숭이는 용왕을 보고
'염통을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왔으니 얼른 다시 가지러 가자.'고 했다.  
용왕은 원숭이를 다시 뭍으로 업고 나왔다.  
뭍에 닿자마자 원숭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용왕을 비웃었다."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별주부전 혹은 수궁가와 비슷하지요?  
사실 별주부전과 수궁가는 조선시대 작품이고,
그 설화를 처음 기록한 사람은 고려시대 김부식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나오는
"귀토설(龜兎說)"이 그것이지요.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을 좀 보시지요.

"642년(신라 선덕여왕11)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가
백제에 복수하려고 고구려에 청병(請兵)을 하러 갔다가
오히려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의 반환을 요구받고 억류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구려 왕의 총신(寵臣)인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술을 대접하였더니
취한 선도해가 귀토(龜兎)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춘추는 여기에서 암시를 얻어 고구려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용궁의 용녀(龍女)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토끼의 간(肝)을 약으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북은
그 일을 자청하여 육지로 나가 토끼를 꾀어오던 도중
이 사실을 등에 업힌 토끼에게 실토하자
놀란 토끼는 꾀를 써서 말하기를
“원래 토끼는 간을 꺼냈다 집어 넣었다 할 수 있는데,
마침 속이 답답하여 꺼내서 볕에 널어 놓고 왔으니
도로 가서 가져오겠노라”고 하였다.
이 말에 속아서 거북은 토끼를 다시 육지까지 업고 가서 내려놓자
토끼는 거북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달아나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그 후 《별주부전(鼈主簿傳)》 《수궁가(水宮歌)》 등의 소재가 되었다."

이 정도로 비슷한 설화라면 우연히 같아진 이야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베꼈다고 봐야지요.  
어느 쪽이 베끼고 어느 쪽이 베낌을 당했는지를 알려면 시간차를 보아야 합니다.  

기록대로라면 한국의 귀토설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7세기입니다.  
그러나 본생경 이야기는 적어도 4세기면 중국어 번역이 끝난 상태입니다.  
구전 혹은 기록된 인도 설화는 그보다 훨씬 전이겠지요.  
그러니 이 설화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에까지 들어온 것으로 봐야할 겁니다.

용원설화(龍猿說話)가
히말라야 산맥 혹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중국 대륙을 건너
한반도까지 들어오는 동안 몇 가지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우선 원숭이가 토끼로 바뀌었고,
염통이 간으로 바뀌었고,
용왕이 직접 나서는 대신 별주부를 대신 보내는 것 등입니다.  

제 관심을 끈 것은,
어째서 설화 주인공이 인도에서는 원숭이였다가
한국에 와서는 토끼로 바뀌었을까요?  
사실 그건 당연한 이야깁니다.  
인도야 원숭이 천국이었겠지만
한국에는 원숭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삼국시대만 해도 외국 설화를 받아들이더라도
한국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숭이가 없는데 원숭이 이야기를 해 주면
그걸 듣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설화는 고차원적인 철학 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있으라고 퍼뜨리는 민간용입니다.  
그러니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듣는 이들이 친숙한
(그러면서도 원래 설화의 의미를 가급적 유지할 수 있는)
동물로 바꿨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바로 토끼로 낙착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민간에서는
'서글픈 울음소리'와는 다른 원숭이 이미지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경박하고 흉내내기 잘하는 동물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그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두 속담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잔나비 밥 짓듯 (한다)"는 속담은
무슨 일이든 깊은 생각없이 설렁설렁 해 치우는 모양을 빗대는 속담입니다.  
둘째, 남을 흉내 내어 한 일이 제 격에 맞지 않은 경우를 비유해 이르는 말로
"잔나비 잔치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슬픈 모정'이라는
중국식 원숭이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반면에,
상민들은 원숭이를 '경박하고 남 흉내나 내는 동물'로 형상화했습니다.  
물론 그 두가지 원숭이 이미지 중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후자입니다.  
'슬픈 모정의 원숭이 소리' 이미지는 중국식 이미지일뿐 아니라,
다분히 문인들의 시작(詩作)에나 등장하던 허구였기 때문이겠습니다.  
실제로 원숭이를 본 사람들은
원숭이를 모정의 화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거든요.

그럼 민간에서는 어떻게
'경박하고 흉내 잘 내는 원숭이'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요?  
원숭이가 한반도에 서식하지는 않았지만,
평안도나 황해도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원숭이를 들여와서
노리개로 삼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8세기 조선 영조시대에 류의양(柳義養)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경남 남해로 1년4개월 동안 유배를 갔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남해문견록"을 썼는데
자기가 황해도에 파견됐을 때의 일이 잠깐 기록돼 있습니다.

"내 이전에 해서(海西·여기서는 황해도 지방)원으로 갔을 때
도임초 각면에 분부하여,
'거사 들이나 중, 광대들이나 요지경이나
잔나비같은 잡된 것들을 민간에 붙여두지 말라'하고 금하니
인접한 곳에서 오던 것들이 소문 듣고 경지(境地)에 들지 못하니,
사년을 가니 조용하던 것이니
이일이 '예기(禮記)에 공교한 것 가지고 다닌 것 금하라' 하는 것과 같은지라."

도인들이나 중이나 광대같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금했고,
요지경이나 잔나비 같은 청나라에서 들어온 물건들을 금지했다는 말이지요.  
그런 게, 역시 중국 책인,
예기(禮記)에 공교한 것을 갖고 다니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군요.

어쨌든 이런 기록으로 봐서, 민간에 원숭이가 선보이기는 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간간이 "신기한 물건"으로 구경거리 삼아 들여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선비들 뿐 아니라 상민들도 원숭이를 직접 관찰할 기회는 있었던 것이지요.  

원숭이를 직접 본 상민들은
그게 금방 '경박하고 흉내 잘내는 동물'이라고 파악해 버렸고,
그런 형상화가 속담에도 반영되고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는 원숭이를 두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두 가지의 '원숭이 형상화'가 이뤄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슬피 우는 모정"이고
다른 하나는 "경박하고 흉내 잘 내는 동물"입니다.  
전자는 중국식을 베낀 것이고,
후자는 직접 관찰에 의한 것입니다.  
전자는 양반과 사대부들의 원숭이 이미지이고,
후자는 상민들의 원숭이 이미지입니다.  

오늘날 전자는 사라져 버렸고, 후자는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도 "슬피 우는 원숭이 모정"은 중국 것으로
주체적이지도 않고 독창적인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사실도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남은 상민들의 원숭이 이미지,
즉 '경박하고 흉내 잘 내는 동물'이라는 원숭이 이미지가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그저 중국 것이라면
자기들에게 없는 동물에 대한 시상(詩想)까지도 베껴대고는
'조오타'면서 고개를 끄덕여 대던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야말로
원숭이들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 원숭이( ) 마음(心)을 가진 선비들을
'어리석다(愚)'고 부르면
지나친 실례가 될까요?

요즘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 것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쓰고 들여와서 행세하려는 사람들을
원숭이 같은 족속들이라고 부른다면,
정말로, 큰 실례가 될까요?

그건 실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구요?  

"머리 앓고 피 토하여 가며, 나라일을 연구하지 않고,
오직 남의 입내만 내어 마치니의『소년 이태리』를 본떠 회(會)의 규칙을 만들며
손일선(孫逸仙)의『군정부 약법(約法)』을 번역하여 자가(自家)의 주의를 삼아
특유한 국성(國性)이 없이 인판(印板)으로 사업하려는 놈들이 갈 지옥은
'잔나비지옥'이니라."

일찍이 80년쯤 전에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하늘꿈"이라는 글에서
"특유한 국성(國姓)"을 살리려 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베끼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미리 미리 설파해 놓으신 말씀입니다.

핑계하지 못하시겠지요?
잔나비 지옥이 가까웠습니다.
들을 귀 있는 분들은 들으십시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