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스크랩] (4) 글쓰기

주방보조 2011. 8. 16. 18:58

이규보(1168~1241) 선생은 고려의 계관시인으로 불린다. 백운거사, 삼혹호 선생 등의 칭호가 낯설지 않거나 <동국이상국집>과 <국선생전>, <백운소설> 등의 저서가 떠오른다면 국어와 국사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그분의 작품, 특히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서사시 <동명왕편>과, <슬견설>이나 <경설> 같은 수필 작품, 그리고 <논시중미지약언> 같은 문학평론을 읽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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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핸드폰을 8개월만 써도 원시인이고, 8년 세월이면 사조가 뒤집히는 시대를 살면서 8백년전 책을 들먹이면 머쓱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밀레니엄이 두 번씩 지나도 읽어야 하는 분들도 있지 않은가. 중국의 공맹이 그렇고, 유대의 예수가 그렇고, 인도의 싯타르타가 그렇다. 이분들의 가르침은 싫으나 좋으나 인류의 정신적 양식이다. 또 그만큼은 아니라 해도 호메로스나 키케로, 셰익스피어나 정주, 그리고 퇴율과 다산의 작품은 여전히 감동과 교훈을 준다.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도 바로 그런 분잭인데, 한국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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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거사는 한국 문화사에 세 가지 원형을 제공한 분이다. 첫째, 그는 술/노래/글을 좋아하는 한국식 지식인의 원조다. 스스로 지은 호가 삼혹호(三酷好)선생인데 “세 가지를 ‘지독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세 가지는 물론 술/노래/글이다. 이후, 조선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애국자와 매국노, 민주 인사와 어용 인사를 불문하고 백운거사의 후예를 자처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 세 가지를 진짜로 좋아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유행이 된 것이다. 그런 유행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백운거사는 한국 지식인들이 두고두고 모방할 원형을 제시한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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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민족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단군사를 처음 기록한 <삼국유사(1281)>와 <제왕운기(1287)>보다 거의 1세기 전에 쓰인 <동명왕편(1193)>은 고구려 건국사를 그린 장엄한 서사시다. 당시 동명왕 건국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피지배층인 세간에서는 '신통하고 이상한 일' 정도로 여겼고, 지배층 유학자들은 ‘황당하고 기괴하여 배격할’ 것으로 보았다. 백운선생은 이를 <구삼국사>가 기록으로 남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로 하는 한편,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가 동명왕편을 생략해 버린 것을 비판하면서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겠다며 그 저술의도를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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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백운소설> 서두에서도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를 예로 들면서 “그같이 굳센 기상을 나타낸 작품이 후대에는 말이나 다듬느라고 맥이 빠져 다시 나타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고,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명성을 얻었어도 끝내 그 나라 문인일 수 없었다”면서 그의 중국 사대주의를 비판했다. 말하자면 백운거사는 민족정신 중심의 문학 평론을 편 민족 문학의 원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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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선생이 제시한 세 번째 문화 원형은 글쓰기 철학이다. <동국이상국집> 22권 마지막 글 제목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인데 “시 속의 은밀한 뜻을 논한 짧은 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백운선생은 시인이 피해야할 “마땅치 않은 아홉가지 문체”를 지적했다. 이른바 <구불의체(九不宜體)>다. 이 아홉 문체를 극복한 시라야 감상과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하며, 또 이 원칙은 “시뿐 아니라 문에도 적용된다(不獨詩也 文亦幾矣)”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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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선생이 마뜩치 않게 여긴 첫 번째 문체는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다. “귀신을 실어 수레를 채운 문체”라는 말이다. 수레란 글을 가리키는 말이겠고 귀신이란 죽은 사람들이다. 죽은 사람들로 글을 채웠다는 말이다. 새롭지도 않고 개성도 없는 진부한 글일 수밖에 없다. 이런 글은 가치가 없다. 대안은 무얼까? 백운선생만큼 생생한 용어는 아니지만 “신선개성체”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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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할 두 번째 문제는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다. “서투른 도둑이 쉽게 잡히는 문체”다. 왜 도둑일까? 표절이기 때문이다. 왜 ‘서투른’ 도둑일까? 내용도 제대로 모른 채 베끼기 때문이다. 이해도 없고 인용도 없이 표절하는 못된 글쓰기다. 그러니 쉽게 잡힐 수밖에 없다. 졸도이금을 피하려면 자기 생각을 써야하고 남의 생각을 빌려 와도 확실한 이해와 인용이 있어야 한다. 이를 “독창명인체”라고 부르자.

세 번째 부실한 문체는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다. “큰 활을 당겼으나 감당이 안 되는 문체”다. 너무 어려운 압운(押韻)을 선택해서 쩔쩔매는 글이다. 너무 크게 베어 물었다가 씹지도 못하고 어그적 거리고 있는 형국이다. 요즘으로 치면 학식과 능력이 모자라면서 거대 담론을 늘어놓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겠다. 그러니 반대말은 “적당능숙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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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음주과량체(散酒過量體)다. “술을 마시되 양을 지나친 문체”다. 백운 선생이 평생 술을 즐겼지만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당시 평균 수명보다 훨씬 높은 73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과음자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횡설수설과 동어반복이다. 논리도 없는 말을 자꾸 되뇌이는 것이다. 그러니 그 반대는 “논리간결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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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부실 문체는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다.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끌어들이는 문체”다. “험(險)한 글자로 사람을 미혹(迷惑)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경한 용어와 개념을 어거지로 끌어들여 읽는 이를 혼란에 빠뜨리는 글이다. 그러니 반대말은 “개념용이체”이겠다. 확실한 개념으로 쉽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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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선생이 지적한 여섯 번째 부실 문체는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이다. “남을 강제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문체”다. “말이 순하지 못한데 애써 끌어다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친 표현이나 견강부회가 좋은 글일 리 없다. 그러므로 ‘강인종기체’의 반대는 “어순유연체”라 하겠다. 말이 순하고 흐르듯 자연스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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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부실 문체는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다. “촌놈들이 모여서 떠드는 문체”다. 백운거사는 “일상어를 많이 쓰는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이는 조심스럽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김병언이나 천상병의 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일상용어가 많지만 그걸 폄하하는 사람은 없다. 촌부의 특징은 식견과 판단력이 모자라 사소한 일에 열을 올리거나 중요한 일을 비웃는 것일게다. 그러므로 촌부회담체의 반대를 “중요진솔체”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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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선생의 여덟번째 부실 문체는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다. “존귀한 것을 멸시하고 범하는 문체”다. 백운선생은 “깨뜨리기 좋아하고 피할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풀었다. 자연과 인간은 존귀하며, 그것을 관통하는 원칙과 상식도 그렇다. 존귀한 것을 능멸하는 글이 좋은 글일 리 없겠다. 따라서 ‘능범존귀체’의 반대말은 ‘보양존귀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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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실 문체는 낭유만전체( 滿田體)이다. “강아지풀이 밭을 가득 메운 문체”다. 백운선생은 “말이 거친데 깍지 않는 것”이라고 풀었다. 글은 쓰고 난 후에도 여러 번의 퇴고로 잘 다듬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친 글은 읽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내용 전달도 어렵다. 그러므로 낭유만전체의 반대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삭췌세련체’라고 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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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의체는 시를 잘 쓰기 위해 피해야 할 문체들이지만 다른 문장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학술 논문은 물론 블로그 포스트를 쓸 때에도 따르면 좋을 원칙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앞으로 이런 저런 글을 적지 않게 쓰게 되겠지만 백운거사의 구불의체 회피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가며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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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백운선생이 구불의체를 논한 바로 그 글은 철저히 구불의체를 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겠다. 이 글은“내가 깊이 생각해서 나름으로 체득한 것”이라고 했으니 재귀영거체나 졸도이금체가 아니다. 누가 읽어도 분명히 알 수 있는 내용을 재치있고 재미있게 표현했으니 만노불승체나 음주과량체, 혹은 설갱도맹체도 아니다. 논리와 경험으로 논지를 차근히 설명했으니 강인종기체도 아니고, 중요한 주제를 쌍스럽지도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게 설명했으니 촌부회담체나 능범존귀체도 아니다. 또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다듬어져 있으므로 낭유만전체도 아니다. 한마디로 백운선생의 <구불의체>는 그 자체가 빼어난 문학평론일 뿐 아니라 자신이 제시한 평론의 기준을 스스로 잘 지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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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좋은 글의 열 번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글을 쓸 때에는 요지와 기준이 분명해야 하지만 자기 글도 그 기준에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티눈들보체”의 반대 개념으로 “자기성찰체”라고 이름붙일 수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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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선생의 글쓰기를 공부하다보니 <십필의체(十必宜體)>가 되었다. 선생께서 평론으로 가르치시고 실천으로 본을 보이신 것이니 만큼 앞으로 글쓰기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아야겠다. 이를 한데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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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선한 생각을 개성 있게 쓴다 (신선개성체); (2) 독창적으로 쓰되 남의 생각은 완전히 이해하고 분명히 인용한다 (독창명인체); (3) 능력에 맞는 주제로 능숙하게 쓴다 (적당능숙체); (4) 논리적으로 간결하게 쓴다 (논리간결체); (5) 분명한 개념을 쓰고 쉽게 쓴다 (개념용이체); (6) 말을 순하게 쓰고 흐름은 부드럽게 한다 (어순유연체); (7) 중요한 주제를 가려 진지하게 서술한다 (중지진솔체); (8) 원칙과 상식을 지키고 기른다 (보양존귀체); (9) 잘 다듬어서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게 쓴다 (삭췌세련체); (10) 쓴 내용을 스스로 지켰는지 반성한다 (자기성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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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잘쓰기... 생각만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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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미레

20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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