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스파르타와 아테네, 리쿠르고스의 개혁(조정희님 글)

주방보조 2013. 3. 2. 15:06

1.스파르타와 아테네

고대 그리스가 하나의 통일국가가 아니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때로는 서로 패권을 놓고 각축했고 때로는 연합해서 페르시아에 대항했던 여러 도시국가들을 뭉뚱그리는 이름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테베와 코린트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 말고도 20여개 이상의 도시국가들이 에게해 주변에 더 있었던 점을 일단 알아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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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의 중심 국가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반면 스파르타는 그에 버금가는 국가거나 다소 야만적인 병영국가로 아는 사람이 많다. 수년 전 개봉된 <삼백(300)>이라는 영화 덕분에 스파르타의 인지도가 조금 높아졌지만, 호전적인 병영국가 이미지는 오히려 강화된 감이 있다. 그러나 이건 오해다. 고대 그리스의 중심 국가는 아테네가 아니라 스파르타였으며, 고대 그리스 문명을 대표한 것도 바로 스파르타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나라의 존속 기간과 패권 보유 기간만 보아도 스파르타가 여러 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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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존속 기간.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시작이라고 보는 기원전 750년경부터 본격적인 도시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해서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맞은 후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에게 망할 때까지 약 5백년 남짓 존속했다. 스파르타도 시작은 아테네와 비슷하지만 아테네가 망한 후에도 2백여 년이 더 지난 기원전 143년에 로마에 복속되었다. 스파르타의 존속 기간은 약 7백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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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패권 기간을 보자. 고대 그리스의 고대(Archaic period, 750-500 BCE)는 스파르타가 패권을 확립해 간 시기다. 기원전 7-8세기 스파르타는 이웃 도시국가들을 침공해 땅과 인구를 늘렸다. 그러나 6세기 중반에 이르자 남은 주변 도시국가들이 정복하기 어려울 만큼 강했으므로 정책을 바꿔 연맹을 결성했다. 이게 바로 고대 그리스 최초의 지역 동맹인 펠로폰네소스 연맹이고 맹주는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510년 아테네의 내분을 틈타 아테네에 괴뢰정부를 세울 정도였다. 자존심 상한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에 맞설 힘을 모으기 위해 권력을 시민에게 나누어 주는 민주정치를 시작했고, 이는 아테네의 내부 문제를 봉합하면서 황금시대를 여는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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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이은 고전시대(Classical period, 500-323 BCE)의 전반기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이 2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시기이다. 아테네는 490년의 마라톤 전투와 449년의 살라미스 해전 등에서 승리하면서 강성해졌고, 페르시아 치하에 있던 그리스인 식민지들을 해방시켜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델로스 동맹을 결성해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맞섰다. 두 동맹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에서 충돌했고 결과는 아테네의 패배였다. 아테네는 아테네 성벽을 허물고 함대를 해체하고 해외 식민지를 모두 넘기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수용하면서 스파르타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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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도 약해졌다. 거의 30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인적 물적 손실이 컸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코린트 전쟁(기원전395-387)에서 테베와 코린트 등의 도전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결국 기원전 371년 테베에게 패배해 헤게모니를 넘겨주게 된다. 테베의 패권조차 10년도 되지 않아 무너졌고,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은 누구도 패권을 행사할 수 없을 만큼 약해졌다. 그 틈을 타서 북쪽에서 강성해진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전역을 침공했고(기원전 338년), 스파르타를 제외한 다른 모든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에 편입되었다. 스파르타는 해외 식민지들을 규합해 근근이 세력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147년 로마에 복속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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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해 보자.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에서 완전한 패권을 누린 적은 없지만 그나마 스파르타와 경쟁이라도 할 수 있었던 시기는 1차 페르시아 전쟁 발발(기원전 490년)로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종결(기원전 404년)까지의 약 80년뿐이었다. 이때가 아테네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반면 스파르타는 테베에게 주도권을 내준 기원전 371년까지 약 380년간 패권을 놓지 않았고, 이후에도 마케도니아 제국의 침공을 물리쳤고 로마 제국에까지 맞서다가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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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아테네 보다는 스파르타가 강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어째서 우리는 그리스 하면 스파르타보다 아테네를 떠올리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가 읽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거의 모든 서술이 아테네인들이나 아테네 편을 들던 사람들의 기록이기 때문이겠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데모스테네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이 바로 그들이다. 예컨대 스파르타의 인물들을 그나마 자세히 다룬 <플루타르크 영웅전> 같은 책은 한국인들의 애독서에 끼지 못한다. 언제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과 같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번역본도 별로 많지 않은데다가 심지어 아이들 읽는 위인전 정도로 개작되어 유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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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다르다. 청소년들에게 플라톤의 <대화>가 추천 도서 정도라면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은 필독서다.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이 배출한 인물들을 다양하고 균형 있게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로마의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인생과 사회와 정치와 문화를 논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서양에서는 아테네 못지않게 스파르타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집적돼 있다. 실감나는 예가 위키 백과사전이다. 거기 수록된“아테네의 역사”와 “스파르타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스파르타에 대한 서술이 아테네의 것보다 두 배 가까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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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나 서양인의 인식과 달리 우리가 스파르타보다 아테네를 더 중시한 것은 우리의 시대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해방 이후 반세기 이상 한국 사회는 정치적 군사독재와 경제적 대기업 독점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러다보니 독재나 전제주의와 쉽게 동일시되는 스파르타는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향이 많은 반면 아테네는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민주화의 교훈을 제공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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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둘 다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한 계급사회였고, 둘 다 시민 계층이 국정에 참여하는 민주국가였다. 아테네의 통치제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진 편이므로 스파르타의 체제를 간략히 보자. 관전 포인트는 과연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비해 비민주적이거나 전제적이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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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가 리쿠르고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초기의 스파르타는 극단적인 민주정과 전제정치, 무정부주의와 군주제를 왔다 갔다 하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상원 제도를 도입하면서 스파르타 정부는 안정을 찾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상원은 배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바닥짐(ballast) 역할을 했다고 한다. 왕은 원래 두 사람이었는데 이는 일인 독재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28명으로 구성된 상원이 두 왕이 가진 권력을 합친 것만큼의 권력을 가졌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최고 결정은 언제나 두 왕과 상원, 즉 30명이 합의, 혹은 표결을 통해서 내리도록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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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왕과 상원의 결정이 최종 결정은 아니다. 실질적인 결정권은 시민들이 갖고 있었다. 상원이 하는 일은 시민들이 투표할 사안을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투표는 민회를 통해 이뤄지는데, 이 민회는 아테네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이뤄졌다. 선전포고와 같은 중대한 외교 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문제는 민회에서 투표로 결정되었다. (선전포고는 델포이 신탁에 따르는 것이므로 전쟁 선포권도 왕이나 상원이 가진 게 아니다.) 다만, 투표가 일부 시민의 선동과 부화뇌동으로 호도되었을 경우에 한해서 상원은 민회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일시적으로 민회를 해산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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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 개혁 이후 130년 뒤에 등장한 테오폼푸스 왕은 자진해서 왕권을 더 축소시켰다. 행정을 담당할 5인 장관(ephors)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 제도 때문에 왕권 약화를 우려하는 아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덕분에 스파르타는 더 오래 지속될 것이오.” 그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메세네나 아르고스 등 왕권이 강력한 도시국가들보다 스파르타는 탄탄한 의사결정과 행정력으로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침공도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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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스파르타는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권력이 분화되어 두루 분산된 민주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이 군주제와 민주제, 귀족정과 과두정 등으로 변동을 겪는 동안 스파르타의 정치제도는 리쿠르고스의 개혁 이래 로마에 무너질 때까지 7백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이는 오늘날의 영국이나 일본을 닮은 왕정과 민주정의 절묘한 결합으로 정치가 대단히 안정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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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가 이처럼 오랫동안 정치 안정을 이루면서 고대 그리스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리쿠르고스의 개혁 덕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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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미레

2011/9/1

 

2.리쿠르고스의 개혁

(앞글 <스파르타와 아테네>에서 계속)

 

스파르타의 역사는 리쿠르고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리쿠르고스가 살았던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쿠르고스가 올림픽 조약을 주도했다고 했지만, 스파르타 왕 연대기를 계산해 보면 리쿠르고스가 첫 번째 올림픽 경기(기원전 776년경)가 열리기 훨씬 전에 생존했었다고 주장도 있다. 리쿠르고스가 호메로스(기원전 800년 전후)와 만난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고, 플루타르크는 리쿠르고스가 헤라클레스의 11대손이자 프로클레스 왕의 6대손이라는 주장도 소개했다. 헤라클레스가 전설의 인물이라 해도 프로클레스는 역사의 인물이므로 연대 추정이 가능하다. 이 주장들을 종합해 볼 때 리쿠르고스는 적어도 기원전 8세기 중후반(대략 기원전 750년경)에 활동했던 사람이며,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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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 출생 당시 스파르타의 정세는 무질서하고 폭력이 난무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 에우노무스 왕과 그의 형 폴리덱테스 왕은 제명에 죽지 못했다. 리쿠르고스는 형수가 유복자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조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왕위를 잇게 했다. 자신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조카가 성장할 때까지 해외여행을 떠난다. 이때 그는 아테네와 크레테를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주유하면서 스파르타 개혁을 위한 구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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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는 크레테에서 탈레스를 만나 정치학을 배웠고, 소아시아에서는 이오니아와 크레테의 생활방식을 비교 연구했다. 그가 호메로스의 시를 처음 접했던 것도 이오니아에서였는데 그의 시가 스파르타의 생활과 정치에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단편으로 흩어져 있던 호메로스의 시를 모아 집대성했다. 이어 그는 이집트에서 계급제도를 연구해 스파르타 계급 구조의 기초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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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주유를 마치고 스파르타로 돌아왔을 때 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왕위에 욕심이 없음을 보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조카 카릴라우스 왕으로부터도 환대를 받았다. 귀국 직후 리쿠르고스는 개혁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원로회(senate)을 설치한 것이다. 28명으로 구성된 원로회는 두 왕과 동등한 권력을 갖게 했다. 권력이 분점되어서 독재이나 전제주의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원로회는 배의 무게중심을 잡는 바닥짐 같은 제도가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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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의 또 다른 작업은 토지개혁이다. 모든 시민의 토지를 환수해 균등하게 재분배한 것이다. 시민 한 사람당 본인 몫으로 보리 칠십 메디므니와 배우자 몫으로 십이 메디므니, 그리고 약간의 기름과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는 땅을 배정받았다. 지나친 빈부 격차를 사회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한 그가 빈익빈 부익부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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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민의 평등을 일상생활 수준으로 확대하려 했으나 반발을 예상하고 두 가지 간접적인 방법을 시행했다. 첫째가 화폐 개혁이었다. 그는 금은 등의 귀금속 화폐를 폐지하고 모든 돈을 쇠로 만들었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화폐는 무겁기만 하고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쇠돈을 식초에 담갔다가 사용하게 함으로써 돈을 녹여서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지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되니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돈을 모으려는 관행이 사라졌다. 거래 목적이든 치부 목적이든, 쇠돈은 너무 무겁고 너무 부피가 크고 볼썽조차 사나웠다. 십 므나 정도의 돈만 가지고도 웬만한 방이 가득 찼고 이를 옮기려면 여러 필의 소에게 메워 끌게 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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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돈에 관련된 거의 모든 종류의 범죄가 사라졌다. 무거워서 돈을 훔치기도 어려운데다가 설사 훔친다 해도 숨길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일소되었다. 쇠돈은 뇌물로 주고받기도 불편하고 들키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또 시민들 사이의 소송도 사라졌다. 민사 소송의 대부분은 재산에 대한 것인데 시민들이 경제생활이 엇비슷한데다가 각자 과부족을 느끼지 않을 만큼 풍족하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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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 보석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치품들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사치품 제조업이 쇠퇴했다. 스파르타의 공예인들은 사치품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식탁이나 의자, 침대 등의 생필품을 만드는 데에 재주를 기울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스파르타의 가구와 생필품은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가장 튼튼하고 우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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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법은 주택 제한법이었다. 모든 집의 대들보는 도끼로만 다듬어야 하며, 문은 톱으로만 만들도록 했다. 이로써 주택의 규모가 저절로 제한되었다. 나무의 크기가 집의 크기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또 인공미 없는 목재 대들보와 문에 어울리도록 맞추다 보니 주택의 장식도 저절로 제한되었다. 집안의 다른 가구들과 장식들도 대들보와 문에 어울리도록 만들거나 배치했고, 이 때문에 시민들은 집을 검소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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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의 개혁 중에도 가장 독특한 것은 식사 제도였다. 스파르타 시민들이 공동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도록 한 것이다. 공동 식당은 15명 정도가 함께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마련돼 있었는데, 같이 식사할 사람들은 만장일치의 투표로 결정되었다. 공동 식사의 메뉴는 식탁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공급했는데, 각 회원은 한 달에 보리 35리터, 포도주 30리터, 치즈 3킬로그램, 돼지고기 2킬로그램을 제공했고, 때로는 생선이나 고기를 사기 위해 별도의 돈을 조금 냈다. 혹은 제사나 사냥으로 별도의 음식이 생기면 이를 보내어 함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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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동 식탁에서는 음식은 기름지거나 풍성하지 않았으나 멤버들이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어서 토론과 농담이 성행했다. 어른들 사이의 토론과 농담은 재미있고 유익했기 때문에 회원들은 자녀들도 이 식탁에 동참시켰다. 심지어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의 부유층은 자녀들을 스파르타에 보내 교육시키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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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식사에도 예외조항은 있었다. 제사나 사냥 때문에 식사에 늦은 사람은 음식을 요청해서 자기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아기스 왕이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 왔을 때 집에서 식사하려고 자기 음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플루타르크의 기록에는 거절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식사 시간에 늦지 않았으므로 안된다는 것인지, 제사와 사냥만 예외가 인정되므로 전쟁 때문에 늦은 것은 예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화가 난 왕은 다음날 집전해야 할 제사를 무시했다가 과태료까지 내야 했다. 스파르타의 법은 왕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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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을 위한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한때 부자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대낮에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이에 물리력으로 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개혁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때 아르칸데르라는 청년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은 리쿠르고스는 한쪽 눈이 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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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리쿠르고스는 제사와 전쟁, 여성 정책과 교육 정책 분야에 획기적인 개혁법을 도입했다.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은 값싼 것이어야 한다거나 한 상대와 너무 자주 혹은 너무 오래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은 일견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제물이 비싸지면 제사가 소홀해 질 것을 염려한 것이고, 한 상대와 너무 자주 전쟁을 하면 스파르타의 전력과 전략이 노출되어 점점 싸우기가 어려워진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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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정책에서는 유약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를 내다 버리는 등의 극단적인 처사가 스파르타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지목되곤 했지만 그 밖의 다른 교육정책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도시국가의 부유층이나 귀족들은 자녀들을 스파르타에 유학보내고 싶어했다. 스파르타는 그런 관행을 적극 회피했는데, 이는 스파르타 사회의 비밀과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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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스파르타의 남녀평등 정책은 시대를 초월한 놀라운 것이었다. 시민이라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게 대접받았고, 남성이 여성을 대접하는 법과 여성이 남성을 대하는 법에 대한 자세한 규정을 남겼다. 요컨대 여성은 출산과 양육으로 스파르타의 번성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남성은 전쟁으로 스파르타의 존속에 기여하는 것을 권리 겸 의무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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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가 여러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것이 오늘날까지 세세히 남아 있지 않다. 그의 개혁법은 불문법이었기 때문이다. 레트라(rhetra)라고 불리는 스파르타의 불문법 중에는 "어떤 레트라도 글로 써두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있었다. 글로 써두면 복잡해지기만 할뿐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레트라는 종이가 아니라 시민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조정과 변형을 거치면서 스파르타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 생활을 지키는 규범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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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의 개혁을 망라해서 소개할 수는 없지만, 빼놓고 싶지 않은 것이 두 가지 있다. '노래'에 관한 규정과 '말'에 대한 규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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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미레

201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