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무슨 무슨 주의(主義) (4): 그리스도 주의 (2)

주방보조 2004. 2. 8. 03:43
<제113호> 무슨 무슨 주의(主義) (4): 그리스도 주의 (2) 2003년 08월 14일


안디옥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채택했었는지 아니면  남들이 붙여준 것인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일 수도  있고, 안디옥 시민들이
교인들에게 붙여준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
라"는 표현으로 보아 안디옥 시민들이 교인들에게 선사한 이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스스로 그 이름을 쓰기로  했다면 아마도 '...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더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또 한가지 예가 사도행전 26
장28절에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은 전도활동을 벌이던 중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빌미로 로마 황제 앞에서  정당한 재판 받기를 요구하는데, 그에 앞서
유대 총독 베스도(Festus)와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2세 (Herod Agrippa II) 앞에서 일차 피고
진술을 하게 됐지요.

바울의 청산유수 같은 자기 변호를 들은 아그립바가  말합니다.  "네가 몇 마디 말로 나까지
그리스도인을 만들려고 하는구나."  아그립바가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미 널리 퍼진 말이 됐다는 뜻이겠습니다.

물론 아그립바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썼을 때는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니었을 겝니다.  왜
냐하면 바울이 재판받던 당시,  로마의 지배자들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법률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과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키는  말썽꾸러기들었으니까요.  게다가
그들의 주장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종하는 예수는, 유대 당국자들의 고소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하다
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범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형수를 추종하는 것만도 제정신이
아닌 일이지요.  게다가 그 예수가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킬 메시아이며,  죽었지만 다시 살
아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메시지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던  로마인들에게는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하늘로 올라갔다가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주장한단 말입니다.  
당시로서는 미친 사람들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그 재판 자리에 있던 유대 총독 베스도가 바울더러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소리까지 질렀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베스도더러 "베스도 각
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덧붙였는데, 아그립바의 '그
리스도인' 발언은 그 직후에 나온 것입니다.

아그립바의 '그리스도인' 발언이 상당히 경멸적이거나  적어도 조소를 품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당시 집권자들은  아그립바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사형수 추종자' 정도의 비하적 의미로  사용한 것은 제자들과 성도
들 사이에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보낸 편지(베드로전서, 4장15-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을 받더라도 범죄자로서가 아니라 예수주의자라는 이유로 고난을  기꺼이 받으라는 것입
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고난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널리  알림으로써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살인자,  도적, 행악자, 간섭꾼  등의 이름과 나란히 사용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리스도나 예수라는 이름은 그런 범법자들과 거
의 같은 수준으로 거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이름을 회피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권유도 물론 포함돼  있습니다.  예수 혹은 그리스도라는 이름
을 그런 일반 범죄자들로부터  분리해 내는 일을 할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그 이름을 사용하면서 행위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베드로의 권유를 충실히 따른 것 같습니다.   덕분에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범죄자를 연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게 됐
습니다.

비록 로마 집권자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경멸과  수치의 뜻으로
사용하거나 인정한 것과는 달리, 안디옥에서 그 이름이 처음 사용됐을 때에는 긍정적인 뜻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고 본을 보였던 안디옥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
의 면에서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시민들에게 모범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안디옥 교인들을 바라본 안디옥 시민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고 불렀다면 그건 분명 부러움과 존경의 뜻이 담기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게다가 안디옥 교인들도 그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이 당
시에 이미 기승을 부리던 교회내 분파주의를 청산하는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이방인 중에서도 헬라인과 로마인 및 각 지방
의 원주민들이 대체로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은 다른 모든 민족을 이방
인이라고 얕잡아 봤지요.  로마인들은 자기네 식민지 종족들을 존경했을 리가 없었을 게구요.  
('벤허'라는 영화에도 그렇게 나오지요?)  헬라인들은  철학 종주국민임을 자부하면서 스스로
만 문화인이라 여길뿐 다른 모든 종족들을 야만인 취급했었습니다.  

그런 종족간 대립은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대
우하거나 따로 가르치는 관행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까요.  그런  분파적 관행은 상당히
뿌리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인들이 타의로든  자의로든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되면서  분파적 관행이
사라질 수 있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회심하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니
이방인이니 헬라인이니 로마인이니 원주민이니 하는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그들은 그 새 이름에 '예수'라는 자연인 이름을 넣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역
할이자 지위를 넣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의 개인 추종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담당했던 구세
주로서의 사역, 즉 복음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안디옥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대신에  '예수인' 혹은 '예수주의자'라고 했었다
면 헬라인이나 로마인 등의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을 것
입니다.  권력을 가진 로마인들이나  문명을 자랑하던 헬라인들의  눈에 '예수'라는 자연인은
멀리 떨어진 원방 지역의 원주민 지도자에  불과했을 겁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이가 갈리도록 혐오스런 신성모독자의 이름에 불과했잖습니까?

그래서 안디옥 교인들이 수동적으로든, 혹은  주체적으로든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시 사회상황에서 최선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외적으로는 경원이나 질시의 감정
을 잠재우고, 대내적으로는 분파주의(특히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파주의)를 억누르면서
일치와 화합을 다질 수 있었으니까요.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들이 판치던 세상은  괜찮은 세상이었더랬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교
를 혹독하게 탄압했던 초기 로마 시기의 귀족들은 그리스도인 며느리  얻기를 선호했다는 말
이 있습니다.  (그게 역사적인 사실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영화 '쿼바디스'
에는 그런 장면이 자주 나오잖습니까?)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당시의 문란하고 부패한  로마
관습을 쫓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고집스럽게 순결을 지키고 검소한 삶을 사는 바람
에, 집권자들까지도 '며느리 삼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일설에는 그런 결혼
에서 태어난 귀족 자손들이 로마를 그리스도교 국가로 뒤집어 놓는데  기여했다는 말도 있습
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예수쟁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처
럼 이 이름도 다소 경멸적이고 비하적인 표현이었지요.  예수쟁이들이 기승을 부리던 1920년
대와 1970년대에 유행하던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당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굉장히
열심히 예수님'만'을 믿기'만' 했기 때문이겠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와 로마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수용하고  그 뜻을
점차 긍정적으로 바꿔 나갔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예수쟁이들은 그 이름을 스스로 수용하지
도 않았고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해 내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한국 예수쟁이들의 열심은 예수쟁이가 아닌 사람들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열렬한 것
이었지만, 그 '지나쳐 보이는 정도' 때문에 '쟁이'라는 다소 얕잡히는 표현이 나왔던 게 아닌가
싶군요.  

왜 지나쳐 보였겠느냐고요?  글쎄요.  그건  당시 예수쟁이들이 당면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도외시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 천당'  혹은 '오직 예수' 이라는 당시의 표어에
잘 드러나듯이 한국의 예수쟁이들에게는 일제 강점이나 독재 정치 같은 '세상 현상'에는 그다
지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관심을 두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포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와 독재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까지 했었지요.  그렇다고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처럼 행실이라도
똑 부러지게 그리스도인다웠는가 하면 뭐 그렇지도 않았잖습니까?  

교회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아 가면서  신사 참배를 했고, 해방 후 50년
이 지나도록 그걸 공개적으로 회개한 적이 없습니다.  또 70년대 이후 교회 지도자들은 시시
때때로 독재자들을 위해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고 각종 매체를 통해  그들을 정당화시키는 꼭
두각시 노릇까지 했잖습니까?  그러니 한국에서 예수쟁이라는 이름이 초대  교회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가 없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사실 예수쟁이라는 말도 그다지 나쁜 말이 아닙니다.  '쟁이'라는 말이 한자말에 밀려 비하적
인 표현으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래의 뜻은 '무슨  일이든 전문적으로, 습관적으로, 혹
은 직업적으로, 미친 듯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한국 예수쟁이들의 행실만 뒷받침
됐었다면 아마 지금쯤 예수쟁이라는 말도 '그리스도인'처럼 긍정적인 뜻을 갖게 될 수 있었겠
지요.  

지금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쟁이'라는 말을 되살리고 마음과 행실을  그 이름 값을 하도
록 다듬어 가자고 다짐해 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미 2천년의 전통을 가진, 그리고 그 말이 생긴 의도나  결과가 매우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김에 그 이름에라도 걸맞게 믿고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굳이 요즘 범람하는 무슨무슨 '주의'들을 따라서 무언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리스도
주의'가 가장 좋은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주의를 표방하는 '그
리스도주의자'가 되어도 좋겠지요.  그리스도주의자가 칼뱅주의자나 바르트주의자나, 혹은 다
른 어떤 주의자보다도 훨씬 올바르고 적합한 이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글을 맺기 전에, 기독(基督)이라는 이름은 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드
리고 싶습니다.  그건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니까요.  다짜고짜  마태복음 1장1절
을 중국어 성경에서 한번 찾아 볼까요?

"亞伯拉罕的後裔 大衛的子孫 耶蘇基督的家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괄호 안은 한국어 성경  표현입니다.  비교해서 보시지요.  요즘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아백랍한(亞伯拉罕)'이라고 읽는 사람 있습니까?  '다윗'을 '대위(大衛)'라고 부르
는 사람 있습니까?  한때 헬라어 고유명사 '예수'를 한문으로 耶蘇라고  쓰고 '야소'라고 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사람 없잖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한국말 음차어로 '여호와' 혹은 '야웨'입니다.  그런데 혹시 야화화(耶和華)는
들어 보셨는지요.  그게 바로 중국  사람들이 쓰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독
(基督)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를 야소(耶蘇)라고  하거나 '여호와'를 야화화(耶和華)라고 하
는 것과 같습니다.  '야소'는 쓰다가도 버렸고, '야화화'는 아예  처음부터 채택도 하지 않았지
요.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만은 '기독(基督)'이라는 우스운 발음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대신 '기독인(基督人)'  혹은 '기독자(基督者)'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아직도 더러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기독교(基督敎)'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 보편적인 관행
입니다.  

그러나 그건 좋은 언어 습관이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이나 갖다 쓸 말이니까요.   한국 사람
들은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주의자,' 그리고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지금은 한문을 써야 그럴 듯해 보이는 세상이 아니잖습니까?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