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무슨 무슨 주의(主義) (3): 그리스도 주의 (1)

주방보조 2004. 2. 8. 03:42
<제112호> 무슨 무슨 주의(主義) (3): 그리스도 주의 (1) 2003년 08월 13일

조선 성리학의 큰 두  분파가 주리설(主理設)과 주기설(主氣設)입니다.  세상의  으뜸 원리가
리(理)인가 기(氣)인가를 가지고서 퇴계와 율곡,  그리고 그 후예들인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논쟁을 거듭했던 이론들이지요.  당시로서는 정치 생명은 물론 목숨까지 걸곤 했던 논쟁이었
습니다만, 적어도 올 봄까지는 결론이 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 사이에 결론
이 났으면 좀 알려 주세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주(主)'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主)의  새김이 '임
금'이기도 하지만, 그 파자해(破字解)는 '불을  켠 등불'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등불처럼, 혼란해 보이는 사물을 질서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으뜸 원리라는 뜻
이지요.  

그래서 주의(主義)라는 말을 직역하면 '가장 중요한(主)  뜻(義)'이고, 좀 의역하면 '인생의 지
침으로 삼을만한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때로는 그냥 '주의(主義)'라고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무슨무슨 지상주의(至上主義) 혹은 무슨
무슨 중심주의(中心主義)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상(至上)은 지극히 높다는 말이고,  중심(中
心)은 안쪽의 핵심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지상(至上)이나 중심(中心)은 불필요한 말입니다.  
주의(主義) 자체가 이미 그런 뜻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세상이 복잡해 지다보니까 한가지 주의(主義)만  가지고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나 영역에 따라서 여러 가지 주의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의회주의, 전체주의 등은 얼른  생각나는 몇
가지 예입니다.  경제 영역에서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자유방임주의, 국가통제주의 등등이 꼽
힙니다.  일반 사회영역에서의 주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개인주의니 집단주의, 가족중
심주의니 혈연이나 학벌중심주의, 지역주의니 사해동포주의, 실력주의니  정실주의 등등이 심
심찮게 입에 오르내리는 주의들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를 자
기 주의로 갖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집단주의나 사해동포주의 등을 신
봉하기도 합니다.

주의(主義)라는 말의 주(主)자가 가진 뜻 때문에 원래는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을 주(主)로 여
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만, 복잡다단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여러 가지 주의를 갖
게되는 것이 불가피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인 주의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주의에는, 지난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근본/보수/개혁/자유주의의 어떤 한가지를 주의로  갖는 경향이 있습
니다.  각 주의들 속에는 또다시 분파들이  있어서 교리적으로는 루터주의, 칼뱅주의, 아르미
니우스주의, 바르트주의, 몰트만주의 같이 외국 신학자 이름을  딴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천적으로는 기복(祈福)주의, 목사(牧師)주의, 실적(實積)주의, 성장(成長)주의  등을 추
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완전히 주의의 홍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인
지 헷갈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대개는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하기보다는 사회나 교회의
성향이나 목회자의 성향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어떤 주의자가  돼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그런 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추종하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이런 주의(主義) 난립 현상에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난  아무 주의자도 아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가
능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혹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원리나 가치'를
갖지 않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자기는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인 무슨무슨 주의자
가 되어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의(主義)라는 말을 원래의미로 사용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단 한가지 주의(主義)
만 가능합니다.  사람이름을 따지자면  예수주의이고, 원리를 따지자면  복음주의이지요.  또
예수나 복음을 따르더라도 반드시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따르는 것이 정도이므로 성경주의라
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면서 한데 아우르는  이름이 있다고 봅니다.  그게 바로 그
리스도주의입니다.  그리스도(Cristov?/ )는 '기름을 바르다, 붓다'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crivw)'
의 과거분사(수동)로 '기름부음을 받은'이라는  형용사입니다.  요즘 영어에서 처럼  형용사가
명사로 쓰이게 되는 용법에 따라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그
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주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지요.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된 이유와 과정과 결과는 모두 성경에 기록된 것이고, 그 모
든 것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복음으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그래서 개인 고유명사를 딴 예수주의나 그 출처를 강조하는 성경주의나  성경과 예수의 메시
지에 강조점을 두는 복음주의는 모두 그리스도 주의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고 응축될 수 있
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어떤 용어보다도  그리스도주의가 가장 적합한 주
의(主義)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면서 칼뱅주의자나 바르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좀 웃기
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되 칼뱅이나 바르트가 해석한 그리스도를 따르고, 성경의 말씀
을 그들이 해석한 대로  믿고, 그들이 정의한 바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게  좀 그렇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해와 해석과 정의가 옳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들의 이름을 딴 주의를 신봉할 까닭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해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
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본이 있는데 사본을 내세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그 사본
이 원본을 충실하게 베낀 것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그리스도주의라는 말은 그다지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대신 그리스도인
혹은 그 영어식 표현인 '크리스천'을  더 자주 씁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사도행전
시대에 안디옥에서 처음 생긴 이후 지금까지 쓰이는 말입니다.  그 낱말의 역사가 2천년이나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헬라
어 '크리스티아노스(Cristianov?/ )'를 한국말로 음역-번역한 것입니다.   앞에서 본대로 '크리스
티아노스'는 '기름 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의 과거분사(수동) '크리스토스'에다가 다시 남성
단수 주격 접미사를 붙여서 만든 말이지요.  

지금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고유명사 겸 객관적  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만, 그 말이 생긴
당시만 해도 존경과 부러움, 자부심과 결단, 경멸과 질책 같은 복잡한 뜻이 한데 섞여 있었습
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통털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딱 세  번 나옵니다.  그중 첫 번째가 사도
행전 11장25절입니다.  "...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
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서 '둘'이란 바나바와 바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승천후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는 발
전을 거듭합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의 성심어린 노력 덕분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발전 중
이던 예루살렘 교회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안디옥에도 예수님을 따
르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성품이 온화하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소리없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가서 안디옥 교인들을 돕습니
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예수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혼자 힘으로 그들을 가르치기가 어렵
다고 판단, 탄압을 피해 다소에 도망가 있던 바울을 찾아갑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은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잘돼  가는 교회의 지도자가 자기
부족을 느끼고 더 적임자를 찾아서 초빙하는 일이 보통 사람에게는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닙니
다.  자기가 공을 챙길 수 있는데 뭐하러 그걸 다른  사람하고 나누려고 하겠습니까?  내 공
이 아닌데도 빼앗아서라도 챙기려는 게 요즘 세대인 걸 보면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바울을 얼마나 아끼고 키워줬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바나바는 바울
이 회심한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데뷔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울을 경계
하거나 경원시할 때에 그들을 융화시킨 사람이지요.   바울의 그릇을 알아봤기에 그랬겠습니
다.  

게다가 안디옥에서 다소까지는 기역자로  구부러진 해안선을 따라 약  1백50킬로미터쯤 됩니
다.  요즘 같으면 차로 두시간 남짓 가면 되는 거리지만  2천년 전에는 2-3일은 족히 걸어야
했을 먼 거리입니다.  비록 곳곳의 로마 주둔군에  의해 치안이 유지돼고야 있었겠지만 도적
과 강도를 당할 위험이 도사린 길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거리를 마다 않고 직접 찾아가 바울을 동역자로 초빙합니다.  둘이 합세해 가
르치기 시작하면서 안디옥 교회는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안디
옥 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생겨난 것이지요.

(계속됩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