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1:9)
바울의 경험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중에 당한 고난이란 점이 특별한 것일 뿐
누구나 죽을 것같은 고난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사실 죽음이란 정말 우리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저 사는 동네 좁은 뒷 골목에서 바람처럼 휙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를 만나면 저는 공중에 붕 떠 있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한강을 밤 중에 걷게 되면 그 물에 빠져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훅 하고 소름이 돋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아파트가 높아지면서, 그곳이 공부로 지친 어린 아이들, 사랑에 미친 젊은이들, 생활고의 부담에 막막한 늙은이들 앞에 안식처로 가는 발판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그렇게 빨리 가지 아니한다 하여도, 한 사람 빠짐없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야 맙니다.
시편기자는 인생을 무너지는 울타리같다 하였고, 이사야는 그 호흡이 코에 있으니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요.
최근 한 장로가 자살 하면서 수 많은 정치인들에게 돈을 준 비망록을 공개한다 안 한다 말이 많지만
진실로 결국 인간을 의뢰한 어리석음을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
나 너 할 것 없이
의지할 대상이 못되는 것은 한결같습니다.
죽을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의지할 대상이심은
죽음조차 그 분 앞에서 그 막막한 흑암의 커튼을 거두어 들일 수밖에 없음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처했을 때
자신의 힘도, 타인의 능도 결코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 인심은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이들보다는, 그를 피하여 혹 자신에게도 닥찰지 모르는 화를 미리 예비하려는 자들이 백배는 많습니다. 저는 가난한 자가 친구에게 둘러 쌓여 있다든가 가난한 자가 친척들에게 두루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절망
죽음
그런 말들이 소용없는 유일한 존재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를 의지함으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고난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참된 길을 찾게 하시려는 안배라 보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고난 받는 겋ㅅ이 유익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우리 > 30초 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후서4(1:15-22) (0) | 2015.04.23 |
---|---|
고린도후서3(1:12-14) (0) | 2015.04.18 |
고린도후서1(1:1-7) (0) | 2015.04.13 |
마가복음100(13:32-37) (0) | 2015.03.09 |
마가복음99(13:28-31) (0) | 2015.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