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예수와 안티예수

야베스의 기도 시비하기...1

주방보조 2007. 1. 14. 20:44
<제295호> 야베스의 기도1...그냥 해보는 넋두리^^ 2002년 01월 14일
저는
기본적으로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 칼럼을 쓰고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이 야베스의 기도를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기독교관련서적의 베스트셀러목록에 꾸준히 올라 있으며...제가 가입한 몇군데 카페에도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선물로 주고받는 즐거운 소리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입하여 살펴보는 이 다음칼럼의 종교란에도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칼럼이 최소한 세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총 일곱개의 글묶음으로 되어 있는데 한번 읽는데 두시간 정도면 넉넉할 정도의 분량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출판되었는 지 모르겠지만
저는 도서출판 디모데라는 곳에서 출판한 마영례님의 번역본을 샀습니다.

두란노서점에선 정가대로 다 받으니까^^가격은 5500원입니다.
표지를 두껍게하고 책값을 엄청나게 부풀려 올려받았다는 기분나쁨이 없지 않았습니다.
좀 싸게 내놓았다고 생각이 들지만 좋은 씨앗이라는 데에서 출판한 [껍데기목회자는 가라]라는 차성구님번역의 책은 5000원인데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야베스의 기도: 5500 하드카바 144쪽 13*20 3.5 4.0

껍데기 목회자: 5000 일반카바 391쪽 15*22 3.0 3.0

야베스의 기도의 뒤에 표시된 3.5는 글자 크기 4.0은 줄간격(MM)입니다. 야베스의 글자는 크고 줄간격도 넓어서 껍데기 목회자보다 같은 지면크기라고 해도 훨씬 그 글의 양이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윗여백도 야베스가 두배입니다. 오른쪽엔 BRUCE WILKINSON 왼쪽엔 THE PRAYER OF JABEZ...이라는 퍼런?글자를 올려놓아 여백을 크게 했기 때문입니다.

계산하기 귀찮으니까...(누구 수학 잘하시는 분이 한번 계산 해보시구요^^) 내용은 1/5정도라고 해두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은
1000원정도로 출판되어 팔려야...적당한 책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솔직히...저는 여기서 한번 다루기위해 사야겠다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사면서는 얼마나 마음이 쓰렸는지 모릅니다.^^
터무니없이 비싼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내용보다 가격을 보는 것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신경 쓰는 세상에 책값이 그만은 해야지하는 분들이 계시다면...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은 딱 맞는 책이겠습니다.

...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책가격만 가지고 따지는 것이 너무 우습지않냐구요?

...

마치
부풀려진 책 가격과 같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내용도 그와같았다라고 한다면...이해가 가시겠습니까?

...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하나님을 위한 원대한 삶을 경험하라

미국출간 12개월만에 500만부 돌파

국내 기독교 부문 베스트셀러 1위

...

책장사의 눈에 딱 들어맞아 흡족한 책...입니다.

 

 

 

01/14 [믿음] 바쿠스님의 "믿음"을 기다리며.... 26


우선 아주 간단한 오해를 한가지 지적해 드리면서 시작해야 겠군요.

>오류수정 4] 웹마스터 믿음에 관한 코메디...

제가 쓰는 영영 사전 이름은 웹마스터가 아니라 메리암 웹스터(Merriam-Webster)입니다.
정확한 이름은 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지요.
웹마스터(Webmaster)란 "웹사이트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을 관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서로 연관되기가 굉장히 어려운 두 단어를 혼동하시는 걸 보면....
그것도 그냥 어쩌다 한번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
지금 제가 제대로 된 토론 상대와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런 걸 가지고 "코미디"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왜 티비에도 보면 개그맨들이 엉뚱한 이야기들을 끌어다 붙이면서 사람을 웃기잖습니까?
그렇지만... 토론할 때에는 코미디든 개그든 그런 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논의가 흐트러지고... 보고 계신 분들에게 혼동을 드리게 됩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상대방의 글을 좀 꼼꼼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간단한 이름조차 혼동한다면...
그보다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면서 토론에 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왜 영영 사전을 사용했냐구요? 솔직히 저는 영한 사전들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또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영한 사전들은 대부분
일본의 영일 사전을 베껴 번역한 것이 많거든요.
어순이 비슷한 일본말을 한국말로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
사전을 쉽게 만들 수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외국 것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데에 도사들이지만...
그 소화하는 과정에서 "대충" 소화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좋게 말하면... "자기(일본) 것으로 만들기"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원래의 뜻을 정확히 옮기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쿠스님이 시작한 영어 단어의 뜻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영어 단어의 뜻을 보는 데에 어째서 영영사전 --> 영일사전 --> 영한사전으로 이어지는
3차 자료를 보고 논의를 해야하겠습니까? 엄연히 1차 자료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메리암 웹스터 사전은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가장 우수한 사전으로 인정됩니다.
역사도 오래됐지만... 어원과 어법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아서
영어 단어의 "원래적 의미"와 "어법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는 그만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드리지요. 야후 영한 사전에 보면...
"▶ belief 확실한 증거 없이 진실이라고 믿기"라고 가외의 설명이 되어 있군요.
아마 바쿠스님은 이런 구절을 보고 "belief는 증거 없이 믿는 것이구나"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메리암 웹스터 (웹마스터가 아니라) 사전에 나온 belief를 한번 보시죠.

1 : a state or habit of mind in which trust or confidence is placed in some person or thing
2 : something believed; especially : a tenet or body of tenets held by a group
3 : conviction of the truth of some statement or the reality of some being or phenomenon
especially when based on examination of evidence

belief를 설명하는 말로 confidence 가 사용됐다고 해서
belief와 confidence가 같은 개념군에 속하는 말이 아니라는 바쿠스님의 주장은....
그것만도 어이가 없는 어거지입니다만.... 그럼 세 번째의 뜻을 한번 더 보시지요.

"특히 증거를 면밀히 검토해 본 후에 갖게 되는 어떤 진술이나 어떤 존재 혹은 현상의 실재성에 대한 확신..."
바쿠스님 같은 분이 혹시나 잘못 읽으실까봐서 "증거를 면밀히 검토해 본 후에" 앞에다가
"특히"라는 말까지 집어넣었군요.

자... 야후 영한 사전에서는... belief를 "증거 없이 믿기"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메리암 웹스터에서는 "특히... 증거를 검토해 본 후에 갖는 확신"이라는 뜻이 있다는군요.

어떤 것을 믿으시겠습니까? 영일사전을 베낀 3차자료인 영한사전을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1차자료인 메리암 웹스터를 믿으시겠습니까?
저라면 당연히 메리암 웹스터를 믿습니다.
영어 단어의 뜻에 관해서라면 일본, 한국사람보다... 영국, 미국사람들이 더 잘 알테니까요.
그게 바로 제가 영어의 뜻을 볼 때에는 메리암 웹스터 사전을 보는 이유입니다.

바쿠스님이야... 무슨 이유로든 영한사전을 고집하신다면...
제가 말릴 이유야 없겠습니다만... 그걸 근거로 "억지"를 부리는 일만 없으면 좋겠습니다.

또 한가지.....
저는 어떤 사전을 보던지... 첫 번째의 뜻으로 그 단어를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건너갈수록 원뜻과는 멀어지는
파생적인 뜻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쿠스님은 참 꼼꼼하게도 두 번째 세 번째 뜻도 다 깊이 읽으신 것 같은데....
유독 belief의 이 세 번째 뜻만은 인용을 안 하셨더군요.
본인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라 그랬습니까?
사전을 보되...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뽑아서 본다"는 말씀이군요.
혹시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한자 성어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게다가....
제가 영어해석을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후후...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 대신 [관전 포인트]에다가 잠깐 설명을 해 놓아 드리지요.


최근의 논의가 어째서 영어(英語) 해석의 문제로 흐르고 있는지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만... 그것은
바쿠스님이 "믿음"이라는 말의 "영어" 단어 다섯 개를 나열하면서 부터였지요.
(사실 다섯 개 뿐이겠습니까? 제가 얼른 세어본 유의어만 해도 열다섯 개는 족히 됩니다.)

저는 영어 뿐 아니라 "믿음"의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어원도 설명했고...
한자와 한글의 의미와 기원도 최대한 살피면서 "믿음=설득 당하기"임을 논증(論證)했습니다.
(사실... 그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수필이나 칼럼이라기 보다는 논문에 가깝습니다.
너무 딱딱하거나 무겁게 느끼신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만...
나름대로 이유가 좀 있었습니다.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영어"만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만...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원 주제에서 너무 동떨어지지만 않으면...
"웬만하면 따라가 준다"는 원칙에 따라 논의에 참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제와 상관이 멀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무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참과 거짓으로 이분화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멋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왜 그런지"의 설명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논리학에서는 "선언적 진술"이라고 하지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이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선언적 진술에다가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논리적 설명이 됩니다.
그 "왜"라는 이유가 진리 기준에 타당하면... 그것을 "참인 명제"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바쿠스님의 주장은 대부분이 "선언적 진술"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러냐"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믿음 = 설득 당하기"라는 제 개념화에서는,
믿음에도 "참"과 "거짓"이 있습니다.
"왜"냐구요?
"참 믿음"은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기... 즉 정말로 설득 당하기"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은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는 척 하기... 혹은
설득 당하지 않았으면서도 설득 당한 척 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굳이 "믿음에는 참과 거짓이 없다"고 계속 주장하시려면...
그리고 거기에 대해 다른 사람의 공감(共感)을 얻으시려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왜냐하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이 선언적 진술로 일관하려는 태도는
상대와 관객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 나선 토론자의 자세가 아니겠습니다.
(심지어는 "토론의 기본도 모른다"는 조롱을 받는 수도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는 "이유가 붙지 않은 선언적 진술"에 대해서는 논평을 삼가겠습니다.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믿음에는 참, 거짓이 없다는 것인지....
바쿠스님 주장의 "이유"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을 구분하자면, 이성적인 자료를 바탕으로한 믿음과 감성에 의존한 믿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는 바쿠스님이 "믿음과 맹신은 다르다"고 하면서...
이성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믿음... 이성적 근거가 없는 것은 맹신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오늘 난데없이 "감성에 의존한 믿음"이라는 것이 새로 등장했군요.
그렇다면 그 "감성에 의존한 믿음"은 맹신(盲信)인가요?

혹시.... 감성에 의존한 믿음이 맹신(盲信)이 아니라면...
맹신과는 어떻게 다르고.... 이성에 근거한 믿음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리고.... 사람의 또 다른 속성인 "의지"에 의존한 "믿음"이라는 것은 있다고 보시는지요?
있다면... 그것은 믿음인가요? 아니면 맹신인가요?

혹은.....
법전에 자주 나오는 표현, "기망에 의한" 믿음은 맹신입니까? 믿음입니까?
상대방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그런 말을 받아들이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고도 받아들였으면.... 믿음입니까, 맹신입니까?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분류(分類)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위의 질문들에 대한 일관성 있는 대답을 하기가 아주 힘드실 걸요?
정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적어도 지금까지의 바쿠스님의 논의를 보면...
정의(定義)에는 일관성이 없고, 분류법(分類法)에는 뚜렷한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는 이말, 저 글에서는 저말 하는 식으로 왔다갔다 하게되는 겁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급적 끝까지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저도 헷갈리는 데...
그냥 관전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혼동이 되시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지금쯤이면 거의 모든 분들이 눈치를 채셨겠지만...
우리의 중심 주제인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바쿠스님의 딱 부러진 정의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는 "신안(信眼)"이라는 이상한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가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며 꼬리를 내리기도 하고...
"믿음은 맹신(盲信)과 다르다"며 아직까지 이유 제시도 없이 주장만 하고 계십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토론이 일주일째 접어들고 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개념 정의가 없다니...

제가 근거를 댄 "믿음은 설득 당하기"라는 정의를 부정하는 데에만 급급한 채...
그런 부정의 근거조차 아직 변변하게 내어놓은 것도 없잖습니까?
최근의 영어 단어 뜻풀이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 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쿠스님의 "믿음"의 정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하는 식의 도망가는 논의 말고...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하는 당당한 정의(定義) 말입니다.
그래야 토론이 제대로 되는 게 아니냔 말입니다.

바쿠스님의 그간의 논의를 종합할 때....
"이성적인 근거"라는 것이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성적인 근거가 있어야만 믿음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그게 어떤 근거인지는 아직 설명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믿음의 상대개념인 맹신(盲信)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면서도
"맹신"의 뜻이 무엇인지 아직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제 직전 글에서는 "이성적 근거"와 "맹신(盲信)의 신(信)"에 대한 뜻풀이를
아주 명확하게 요구했지만... 이번 답글에도 그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 두 가지야말로 바쿠스님의 "믿음"개념이 무엇인지 (본인이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서가 될 텐데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음 답글에 꼭 포함시키셔야 할 요점을 딱 세 가지로 정리해 드리지요.
(벌써 일주일째 배우는 것도 없이 이렇게 맞상대를 해드려 왔는데...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 토론에서 뭔가 배우고 싶단 말입니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2. 이성적 근거란 무엇인가?
3. 맹신(盲信)의 신(信)은 무슨 뜻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만 포함되어 있으면...
다른 논의가 전혀 없더라도 저는 불만 없습니다.

아직 더 시간이 더 필요하신가요?
걱정마십시오.... 지금까지도 기다렸는데...
얼마든지 기다려 보기로 하지요.... 뭐....
시간은 충분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4 [믿음: 관전 포인트4] 영어 실력과 아는 체.... 26


우선... 바쿠스님이 제 칼럼 난에서 "믿음" 논쟁을 거두신 것은
아주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거기다가는 이번 답글을 안 올리셨으니까요....
바쿠스님이 전선 확대를 밥먹듯 하는....
"저질 독설꾼"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비아냥거리지 마시기 바란다. 그러면 나도 비아냥을 꼬집지 않겠다"는 제 제안에
동의까지 하셨으니까요. 그 약속을 꼭 지키실 것으로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를 걸고 넘어지셨더군요.
공간과 면적이라든가.... 자신은 "출처를 제시했다"는 등의 시비(是非)인데...
제시하신 창세기 구절에는 "1규빗은 50센티미터"라는 말은 안나오더군요.
관심 있으시면... 한번 가서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메리암 웹스터 영영 사전에 따르면... 1규빗은 약 18인치(45.7센티미터)"
이런 식의 인용을 "정확한 출처 제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 칼럼난에서는 일체의 시비거리를 제거하기 위해 이런 답글도 달지는 않았습니다.

하긴....
"성경의 한국 개념"에서는 독설을 계속하기가 좀 어려워졌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상황에서...
그런 정도의 시비거리 던지는 것까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니까요.


"영어 해석도 제대로 못한다"는 말은 저도 난생 처음 들어봅니다만....
이 문제도 "토론상"의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보아서 그냥 넘기렵니다.
바쿠스님이 제 영어 실력을 공인해 준다고 해서 느는 것도 아니고,
폄하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질 내다가는 이 토론, 끝까지 못하지요.

바쿠스님의 이번 답글에는 "모르면서 아는 체 하지 말라"는 표현이 참 많았습니다.
아마 서너 번은 족히 나왔을 걸요?
저도 "아는 체"하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기분은 좀 상했습니다만....
"미끼꾼"의 미끼에 걸리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그것도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번 글의 특징은 "제 글"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제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아직은 마일드한 정도이기는 합니다.

"영어도 못하는 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이런 표현은
사실 웬만해서는 쓰기가 조심스러운 표현 아닙니까?
비아냥이나 빈정대기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신 공격이니까요.
빈정대기를 그만 두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런 직접 공격이 더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어쨌든, 제가 혹시 바쿠스님보다 영어를 잘하거나
또 혹시 바쿠스님보다 "아는 게 많다"면 이건 대단한 주제가 넘는 말이거든요.
물론 진짜로 바쿠스님께서 영어도 탁월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제가 영얼 좀 잘하거나 이것저것 아는 게 많으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을 안 해 보셨는지가 저로서는 참 궁금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해 보셨다면.... 그런 직접적인 인신 공격은 차마 할 수가 없었을 텐데요.
게다가 제 칼럼의 "사는 이야기"를 한 두 개라도 읽어 보셨다면....
제가 지금 미국의 한 주립 대학에서 느즈막이 시작한 학위 논문을 쓰고 있으며....
한 학기에 두 과목 씩 학부 강의도 하고 있다는 걸 아시겠지요.

그런데도 그런 "만약에..."라는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정말로 영어도 잘하시고... 아는 것도 아주 많으신 분.... 이거나...
아니면... 이제부터는 맘 독하게 먹고 "인신공격"을 시작하겠다는 신호탄이겠습니다.

뭐... 독설꾼들에게는 근거없는 중상이니 비방, 심지어 모욕적인 언사를 동원하는 것이
다반사요 여반장이거든요...
게다가 인터넷 상의 대화에 대해서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도 숱한 비아냥과 어거지를 견뎌온 저로서는
지금에 와서 화를 내고 드잡이하는 우(愚)를 범하지는 말기로 하겠습니다.

그 대신 이번 답글에는 두 가지를 명확하게 요구했습니다.

첫째 "앞으로는 "이유"가 붙지 않은 단순한 '선언적 주장'에는 논평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둘째 "믿음에 대한 바쿠스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밝혀 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도 계속해서 선언적 주장이 나타나면...
저는 거기에다가 괄호 치고 (선언적 주장-논평하지 않습니다)라고만 하겠습니다. (예고제).

또 믿음에 대한 바쿠스님의 정의를 요구하면서... 명확하게 세 가지 질문을 드렸지요.
1. "바쿠스님의 '믿음'은 무엇인가?"
2. "바쿠스님의 '이성적 근거'란 무엇인가?"
3. "바쿠스님이 보는 맹신(盲信)의 '신(信)'자는 무슨 뜻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만 제대로 나오면... 토론의 마무리가 아주 간단해집니다.
토론이 마무리될 뿐 아니라.... 저도 배울 거리를 얻어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쿠스님의 다음 답글에서는
근거 없는 선언적 주장이 얼마나 나오는지....
"믿음" "이성적 근거" "맹신(盲信)의 신(信)"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는지를
예의 주시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5 Re:믿음은? 23
: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
: 저는 이 이상의 그 어떠한 믿음에 관한 완벽한 정의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예림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이군요.

아마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아서 '완벽한 정의'라는 표현을 쓰신 것 같습니다만. 선언에 불과해서 설득력이 없군요.

<< 에, 또 이 완벽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볼 것 같으면...

영어로는 또 complete, perfect, flawless 등의 동의어로 표현되고... >>

헤헤, << >> 는 농담입니다. 골치 아프군요. --;;

기본적으로 사전이 언어 소통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전에 맞추어 언어 소통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전은 단지 '참고'용일 뿐이지요.

하여간에...

믿음에 대한 이런 정의를 갖고 생각해 볼 때,

예를 들어, 바라는 것=구원이면 구원의 실상은 믿음인가요?
보지 못하는 것=하나님, 하나님의 증거=믿음, 이렇게 되는 것인가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뵈뵈

 

 

01/15 [믿음] "설득(說得)이...." 왜... 20


갓바위님의 지적은 대부분 제가 동의드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납득한 상태」. 「옳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맞다고 인정하는 것」 등이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하며... 저는 그것을 굳이 "설득 당하기"라고 말을 바꿨을 뿐입니다.
설득 당하는 것은 결국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믿음=설득 당함"이라고 한 데에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첫째, 설득자와 피설득자의 관계가 중요하다. 둘째, "말"이 중요하다."
그래서 "말"을 중심으로 설득자와 피설득자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진화론을 믿다"는 표현을 한번 보시지요.
이는 "다윈(혹은 다른 진화론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걸 저는 "진화론을 믿다 = 다윈에게 설득 당하다"라고 바꿔 쓸 뿐입니다.
저는 피설득자로서 설득자인 다윈(혹은 다른 진화론자)의 말/글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써 다윈은 내 마음의 스승이 되고 내 언행은 다윈의 영향을 받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다"도 그와 비슷하게 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미래와 현재의 삶에 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반항도 하고 무시도하고 적극적으로 어거지도 써 보지만....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요.
설득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설득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그래서.... 믿음을 설득 당하다로 푸는 것은
설득의 주체와 피설득의 주체를 분명히 하고
설득의 내용을 명확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요즘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바로 그런 점들이 분명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자꾸 추상화되고 있는가 하면....
설득자와 피설득자 사이에 자꾸 불순한 매개자들이 끼어 들어옵니다.

믿음이 추상화된다는 말은 모호해 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간단 명료하면서도 쉽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요 5:24).
그게 바로 "믿음"의 전부입니다.
그걸 자꾸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으로 풀어나가니까... 오해도 생기고 비리도 생깁니다.

또 매개자들이 설득자의 원래 말을 "그대로" 전한다면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거기에 불순물을 집어넣고... 피설득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루터가 "만인 제사장" 개념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당시 카톨릭 사제들은 설득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워낙 왜곡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신학자/목회자/종교학자들이
설득자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보다는 거기에 "뭔가"를 자꾸 끼워 넣습니다.
바로 그 "뭔가"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김원필 님이 쓰고 계신 "예수는 없다"나 "야베스의 기도"를 한번 보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음 =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라고 보자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대하자"는 캠페인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목회자/신학자/종교학자들이 "전하는 말/글"을 접할 때에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설득"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피설득자인 우리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고....
그런 권리와 책임을 방기하면 할수록.... 믿음도 제대로 서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의 뜻이 편만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5 [믿음] 깐깐하게 따지기.... 16


제 글이 "어렵다"거나 "너무 깐깐하다"는 느낌을 드리는 것은 저도 슬픈 일입니다.
어원 조사도 하고... 꼼꼼히 따지다 보니까 그렇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는 저 자신부터 "짜증"나기도 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러나 때로 자세한 조사와 꼼꼼한 따지기는 필요합니다.
우리의 감(感)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다만 그런 조사와 따지기의 목적이 추상화시키고... 어렵게 만들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구체화하고 쉽게 만들기 위한 것이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우리의 최종 결론은 쉽고 구체적이면서도 "옳아야"합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아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각자"의 책임입니다.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을 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
그것이 목사님이든... 친구이든... 아내이든... 선생님이든...
그것이야말로 "미로"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설득 당하는 것"이라는 제 "결론"이
그다지 추상적이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잖습니까? 심지어...
어떤 분들은 그런 조사나 따짐이 없이, 그냥 직관이나 직감으로 아시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다 아는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 해도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꾸 그러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모호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직관이나 직감, 혹은 "다 아는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항상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가끔씩 이런 깐깐한 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그냥...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5 Re:[믿음]Re:Re:믿음은?/ 소망의 토대... 16
길고 자세한 설명은 잘 봤습니다만.
전 정예림님의 설명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늦어버린 것 같군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
뵈뵈
:
:
: >기본적으로 사전이 언어 소통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전에 맞추어 언어 소통을 해야하는
: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전은 단지 '참고'용일 뿐이지요.
:
: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사전은 "의사 소통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요.
:
: 히브리서 11:1의 그 좋은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에도
: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
: 그 말씀은 지금부터 약 1천9백년전에 당시의 헬라어로 쓰인 말씀입니다.
: 그리고 우리가 가진 개역판 성경은 1백년 전에 당시의 한국말로 쓰인 말씀이지요.
:
: 그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의사를 소통하려면"
: 적어도 그 당시에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말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어서 오늘날의 말이
: 1천9백년전... 혹은 1백년전의 말과 꼭 같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 거기에 바로 어원 분석이니... 의미 분석이니 하는 일이 끼어 들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
: 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살피면서
: 히브리서 11:1절을 조금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보시려면
: http://column.daum.net/Column-bin/Bbs.cgi/jcbible/qry/zka/B2-kB23k/qqo/PRMY/qqatt/^
: 에 가보시기를 권합니다.
:
: 여기서는 해당되는 부분만 조금 옮겨놓아 보겠습니다.
:
: ======================================================================
:
: *믿음은 소망의 토대
: ......................
:
: 그런데 그 둘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15번의 트러스트가 엘피조(elpizo)의 번역어입니다.
: 엘피조는 엘피스(elpis)의 동사이지요. 엘피조는 "소망하다"는 뜻이구요. "소망하다"가
: "믿다"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라다"가 "믿다"라니요. 소망이
: 믿음이라니요?
:
: 번역어 분석을 통해 믿음과 소망이 서로 관계 깊은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 낌새는 이미 히브리서 11장1절에 내비쳐진 바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 실상"이라는 말씀이었지요. 거기서 "바라는 것"이 바로 엘피스, 곧 소망이었습니다.
: 믿음은 소망의 실상이라는 말입니다.
:
: "실상"은 헬라어 후포스타시스(hupostatis)를 번역한 말입니다. 원래 뜻은 "-의 밑에
: 놓여있는 것, 기초, 토대, 하부구조"이라는 뜻입니다. 후포가"-아래"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 스타시스가 "놓다, 두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
:
: 믿음이 소망의 토대라면, 소망은 믿음의 상부구조가 되겠지요. 도식적인 것 같기는
: 합니다만, 어쨌든 그게 어원분석에서 드러난 믿음과 소망의 관계입니다.
:
: 토대는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건축물의 안정과 내실을 좌우합니다. 토대가 깊고 넓고
: 튼튼하면 높고 크고 안정적인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고 튼튼하면 소망도
: 높고 크고 안정된다는 말입니다.
:
: 이제 믿음과 소망의 관계가 비교적 명료해졌습니다. 집의 비유를 쓰니까 좀 더 이해가
: 쉽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이고, 소망은 믿음의 상부구조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그
: 둘과 어떤 관계를 갖습니까?
: ........................................
:
: ======================================================================
:
: 이런 배경을 가지고서.... 뵈뵈님의 제언을 한번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
: >예를 들어, 바라는 것=구원이면 구원의 실상은 믿음인가요?
: >보지 못하는 것=하나님, 하나님의 증거=믿음, 이렇게 되는 것인가요?
:
: 바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소망(所望, elpis)을 가리킵니다.
: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구원이므로 바라는 것=구원이라고 해도 틀릴 것은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소망에는 다른 것도 포함될 수 있음을 잊지만 않으면 된다고 봅니다.
: (그래서 "바라는 것들"과 "보지못한 것들"은 모두 복수입니다.)
:
: 앞에서 실상(實狀)은 "토대"라고 했습니다.
: 그러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표현은 "소망의 토대"라는 말이지요.
: 그렇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요, 구원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의 대구입니다.
: 보지 못했지만 바라는 것들 (=소망)을
: "뒷"받침해 주는 것(=증거) 혹은 "밑"받침해 주는 것(=실상, 토대)이 바로
: "믿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
: "바라는 것들의 실상" 혹은 "소망의 토대"라는 것이 믿음의 훌륭한 정의이기는 하지만,
: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그러면 소망은 무엇인가"하고 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 이 답글에서는 그걸 다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만...
: 앞에 주소를 제시한 글에서는 거기까지 나갔었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
: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확실한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므로,
: 그런 소망의 밑받침이 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 당하기"라고.... 풀 수 있다고
: 저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각합니다. (너무 심한가요?)
:
: 조정희 드림.
: (성경의 한국 개념)
:
:
:
:
:
: : :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 : :
: : : 저는 이 이상의 그 어떠한 믿음에 관한 완벽한 정의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 정예림
: :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이군요.
: :
: : 아마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아서 '완벽한 정의'라는 표현을 쓰신 것 같습니다만. 선언에 불과해서 설득력이 없군요.
: :
: : << 에, 또 이 완벽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볼 것 같으면...
: :
: : 영어로는 또 complete, perfect, flawless 등의 동의어로 표현되고... >>
: :
: : 헤헤, << >> 는 농담입니다. 골치 아프군요. --;;
: :
: : 기본적으로 사전이 언어 소통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전에 맞추어 언어 소통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 사전은 단지 '참고'용일 뿐이지요.
: :
: : 하여간에...
: :
: : 믿음에 대한 이런 정의를 갖고 생각해 볼 때,
: :
: : 예를 들어, 바라는 것=구원이면 구원의 실상은 믿음인가요?
: : 보지 못하는 것=하나님, 하나님의 증거=믿음, 이렇게 되는 것인가요?
: :
: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

뵈뵈

 

01/15 조정희님에게 드립니다. 18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설득당함」이 설득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믿음의 정의로 부적합하다고 지적했는데 조정희님은 설득자를 내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정의해야 한다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군요.
참 말이란 게 묘하다고 다시 느낍니다.
제가 설득당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대하자" 하는 캠페인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중요성은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조금 다른 듯도 합니다.
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어서 안 되기 때문이라 하셨지만
저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뭔가 끼는 그 자체가 나쁘다 봅니다.

친구 중에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따른다 했습니다.
그건 하나님과 본인 사이에 「이치」를 끼워 넣기 때문에 잘못이라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는 게 아니라 이치에 대한 믿음이 자라기 때문이지요.

깐깐하게 따지는 것을 이해해 달라 하셨는데
저는 님을 욕하거나 비방할 뜻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겁이 좀 났을 뿐입니다.
솔직히 믿음에 대한 사족를 달면서 문헌을 따지면 저는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통념과 느낌이라는 우격다짐으로 대할 준비 공작을 좀 했더랬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있습니다.
그렇게 박식하시고 논리에 강하신 분이 왜 그런 것을 계속 따지고 계실까.
다른 철학적인 문제나 기독교를 펼치는 논리 전개를 하면 좋을 텐데 하고요.
제 개인으로는 님의 칼럼에 올리시는 글보다는 여기 올리시는 글이
훨씬 좋다고 느끼거든요.
들이시는 시간과 노력은 반대일 것 같아 보이는데…
그러나 거듭 밝히지만 이건 비방이 아닙니다.
그건 그것대로 충분히 좋다 보는 사람입니다.(제젠 좀 어렵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하나의 청을 드린다면 ?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라 일반인들이 기독교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글을 좀 펼쳐 주시면 안 될까요?
비슷한 목적의 논리는 천편일률적으로 성경에 이리 저리 씌어 있으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씌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비신도들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주제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럼…

갓바위

 

01/15 [믿음] 가인과 아벨.... 16


다음 글들은 제 독자의 한분이신 궁금이님과 나눈 "믿음"에 대한 대화입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그리고 토론을 한자리에 모여서 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참고가 되시면 좋겠고....
궁금이님과의 대화도 이 자리에서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조정희 드림.

===========================================================================

: 조정희님께...
:
: 독특한 칼럼을 잘 보고 있습니다.
: 워낙 분량이 많아서 제가 전체를 다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제가 읽으면서 느낀 것을 바탕으로 질문해 볼까 합니다.
:
: 믿는다...는 '설득 당한다'는 명제, 즉, '아하, 그렇구나'라는 설명에는 수긍이 갑니다.
:
: 저도 막연히 기독교의 믿음 하면 덮어 놓고 믿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롬 10:17)을 듣고 끄덕거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
: 그러나 성경을 읽다가 보면 앎을 통해 그렇구나...하고 깨달아서 믿어지는 믿음이 아닌 맹목적이거나 잘 이해할 수 없는 믿음도 많이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
: 이를테면 히브리서에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에게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고 나와 있는데 그 때의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즉 아벨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설득 당한 것일까요? 이 믿음은 설득과는 관련 있는 것일까요? 등등...
:
: 암튼 궁금한 것이 많아 이렇게 적어 봅니다.
:
: 평안하시길~

===========================================================================

저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에
두 가지 미스테리가 얽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이 흠향하셨던 진짜 이유....
둘째... 히브리서에서 아벨의 더 나은 제사가 "믿음" 때문이라는 평가한 이유...

저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라고 해석하면서...
이 두가지 미스테리는 서로 상관을 가지면서 풀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담과 하와가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만....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로 봐서...
두 형제는 부모님한테서 제사의 기원과, 중요성과 방법을 배웠을 것이며,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웠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제사의 "기원"이라면 아무래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다수설인 것 같구요....
제사의 "중요성"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
그리고 제사의 "방법"은 "피"(즉, 희생)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을 겝니다.

이런 제사의 역사(歷史)와 의의(意義)와 방법(方法)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가인과 아벨이 부모님에게서 그것을 배웠을지라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권위로 그것을 가르쳤을 테니까요.

직업이 농사군이었던 가인이 자기 소산으로 (아마도 가장 우량품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리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의 제사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시에서 어긋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피"로 상징되는 "희생"이 거기 담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럼 제사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어째서 "믿음"이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요?
가인의 제사 방법에 대한 오해...는
그가 제사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서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 뭐"... 하는 생각이 앞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 제가 좋아하는 용어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설득하시려고 하셨던 것은 "각자의 최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歷史)와 의의(意義)와 방법(方法)의 모든 면에서
내가 설명한 대로 좀 해라...." 하는 것이었는데... 가인은 그런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니 가인의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 당하지 못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설득 당하지 못한 것은.... 저는... 믿음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 아벨은 믿음이 있었을까요? 즉 그는 하나님께 설득을 잘 당했던 것일까요?
경우의 수로 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벨은 원래 목양군이었으니까....
"그냥 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하자"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가인과 꼭 마찬가지로....말입니다.
그랬다면... 아벨은 가인과 별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벨이 부모님께로부터 배운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잘 설득 당했다면...
그래서... 양을 잡고 피를 흘려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잘 설득 당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아벨은..."하고 서술한 것을 보면...
아마도 두 번째의 해석이 더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인도 믿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자기 소산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아벨의 양과 바꾸어서...
"피를 흘리는 희생을 통한 관계 회복"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동생을 죽여야 하거나...
그런 지독스런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

: 말머리는 농담입니다. 있길래 한번... ^^
:
: 가인은 결국 하나님에게 설득당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처음부터 아예 몰랐다고 볼 수 있군요. (하나님은 양을 바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고집을 세워 채소를 바친 건 아니겠지요?)
:
: 복음을 모르는 것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
: 설득이란 논증에 의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조정희님은 어떤 계기에 의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신 것인지 궁금하군요. (아니면 아직도 설득되고 있는 중이신가요...?)
:

===========================================================================

: 가인은 결국 하나님에게 설득당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처음부터 아예
: 몰랐다고 볼 수 있군요. (하나님은 양을 바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고집을 세워 채소를
: 바친 건 아니겠지요?)

글쎄요.... 하두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하... 농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뜻을 처음부터 아예 몰랐다고 볼 수 있는지...에는 의문이 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에 대해서는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하와에게 배웠을 테니까요.
아담과 하와가 제사법을 가르쳤을 때에는 "이런 게 하나님의 뜻이란다"하는 설명을 했겠지요.
그러니 아벨은 "알아듣고" 그걸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요?
저는 그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벨을 설득하신 것이고,
아벨은 기꺼이 설득 당했던 것이며, 그걸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아마도 아벨과 함께... 제사법 강의를 들어 놓고서도...
고의적이든... 아니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은 가인도 설득하셨거든요...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그러나 가인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저는 가인의 경우는 "복음을 아예 몰랐던" 경우라기 보다는...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 설득이란 논증에 의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 이해하고 있는데, .....

설득(說得)의 뜻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조금 썼었습니다만.... 설(說)과 득(得)은 모두 동사입니다.
"말해서 얻다"는 뜻이지요. 저는 그 "얻다"의 숨겨진 목적어가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설득(說得)이란 "말을 해서 마음을 얻는 것"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 때의 "말"은 반드시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만 포함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정을 호소하는 것, 애원하는 것, 구슬리는 것, 화를 내는 것....
혹은 심지어 욕설(辱說)을 퍼붓는 것까지도... "그 말"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목적이 "마음을 얻기 위한" 모든 말은 "그 말"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사실 영어 단어 퍼쉐이드(persuade)에도 반드시 "논증"만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메리암 웹스터 사전에 보면.... 퍼쉐이드(persuade)가

to move by argument, entreaty, or expostulation to a belief, position, or course of actio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논증(argument)도 동원되지만...
호소와 훈계, 충고 같은 것을 동원하는 것도 퍼쉐이드에 속합니다.

퍼쉐이드의 어원을 봐도 그렇습니다.
퍼쉐이드는 라틴어 퍼수아데레(persuadEre)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철저하게"라는 뜻의 "per-"와 "충고하다, 우기다"는 뜻의 "suadEre"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 퍼쉐이드의 어원적인 의미는 잘해야 "열심히 충고하다" 정도가 되겠지요.

심지어 "야후 국어 사전"에도 설득(說得)은 "(어떤 사람을〔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말로 알아듣게 구슬리거나 이끄는 것"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때의 말은....
논리적일 수도 있고... 감정적일 수도 있고... 회유일수도 있고... 협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득(說得)이 반드시 이성적인 논증이라고 못박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떻습니까?
설득(說得)의 내용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설득"과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라는 표현이 조금 더 생생해 졌습니까?
아니라구요? 아직 더 노력해야 겠군요. 제가요....

그런데... 믿음에 대해서는 김원필님의 "예수와 안티예수" 칼럼난에 여러분들이 모여서
말씀들을 나누고 있으니까... 궁금이님도 그리로 자리를 옮기시면 어떨까요?
더 많은 의견을 나누실 수 있으시리라고 봅니다.
이 답글은 거기에도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5 조정희 님에게 믿음에 관한 정리. 23
토론을 좀더 차분하게 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예전처럼 저도 군더더기를 사용하지

않고 요점만 간추리겠습니다.

아울러 제 글을 읽을 때, 조정희님께서는 제가 정의한 내용을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며 보편적인

(많이 사용하는) 의미임을 늘 기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드리지요. 야후 영한 사전에 보면...
>"▶ belief 확실한 증거 없이 진실이라고 믿기"라고 가외의 설명이 되어 있군요.
>아마 바쿠스님은 이런 구절을 보고 "belief는 증거 없이 믿는 것이구나"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야후 영한 사전에선 일반적인 쓰임새를 설명했습니다. 틀린 설명이 아니지요. 그것은 (웹마스터

가 아닌) 웹스터 영영 사전에서도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의미 설명 후에 동의어를 나열하고

동의어별 각각 많이 사용되는 의미를 나열한 웹스터 사전의 설명입니다. (야후 사전에서도 동의

어별 많이 사용되는 의미를 적을 때 확실한 증거없이 믿은 진실이라고 했지요.) 야후나 웹스터

나 사전마다 동의어를 설명하며 보편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곳은 모두 동일합니다. 몇 가자의 사

전을 옮겨옵니다.

BELIEF may or may not imply certitude in the believer. <my belief that I had caught all
the errors>. (웹스터 영영)

Belief는 믿은자가 받아들인 확신에 대한 가능성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을 때 사용하는 것

입니다.

낱말의 쓰임새가 많음은 우리 서로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Belief에 관한 내용은 조정희님

이나 저나 더 이야기 해봐야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을 위한 논쟁만 될 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자와 영어에서 입장이 반대가 되었더군요. ^^)

이쯤에서 줄이고 쓸데없는 논쟁보다 다시 원점으로 가야 겠군요.

*** 정리 하나.***

1. 조 정희님이 belief, trust, faith를 들어서… 특히 'faith'의 어원까지 살펴가며 믿음은

설득당하는 것이다.. 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바쿠스의 주장은 'faith'의 어원까지 따져 봤자 근거없는 신뢰이며, 어원이나 단어로 설득을

인용한 주장을 님께서 하시고 싶다면. 'reliance', 'confidence'를 어원으로 택하여야 한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조정희님께선 바쿠스는 "믿음 = 맹신"이라고 말했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설득으로 생기는 믿음도 이미 인정했지요. ----

2. 여기에서 조정희 님이 제게 설명을 하여야 한다면 reliance'와 faith' 또는 confidence'와

'faith'의 어원이 동일함을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이중에 confidence'관한 설명이 있었으나 이미 '반복'을 나타내는 com과의 복합어로 전혀

다르므로 confidence'는 실패입니다.

나머지 reliance'와 faith'의 연결 시도는 없었습니다.



*** 정리 둘 ***
질문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답변을 제가 올려야 할 것 같군요. :)

1. 믿음이란 무엇인가?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어떤 명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즉 참과 거짓으로 명확하게 판단되기 전에 이미 참 또는 거짓 이라고 생각하는 것

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 만으론 부족한 듯 싶어서 예를 들겠습니다.

1.1. 무조건 믿는 신뢰(맹신)

노아의 방주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다. 라는 믿음

--- 불신자는 설명 들으면 믿지 않음. 기독교인 중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 존재함.---

1.2. 근거에 의한 믿음

갑은 매일 아침 5시에 운동을 한다. 내일도 아침에도 같은 시간에 운동을 할 것이라고 믿

는다. --- 역시 갑의 사정에 따라서 운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음. 즉 틀릴 가능성은 여전히

내포함. --

1.3. 감정에 의한 믿음 즉 희망.

부모, 또는 애인 간의 믿음으로 예를 들어 우리 아들은 현재 절도 전과 7범이며 직업은 없지

만 그래도 더 이상의 절도는 없을 것이다. 라는 믿음. 또는 예수는 나를 구원해 줄것이다.

라는 믿음. --- 역시 아들의 절도 가능성은 있음. ---

많이 있겠습니다만 이정도로 간추립니다.


2. 이성적 근거란 무엇인가?

위 설명중 1.2항에 해당하겠습니다.

3. 맹신(盲信)의 신(信)은 무슨 뜻인가?

'믿다' 입니다.


바쿠스

 

 

 

01/15 조정희님의 관전평에 관한 일부 답글과 제안. 20
>공간과 면적이라든가.... 자신은 "출처를 제시했다"는 등의 시비(是非)인데...
>제시하신 창세기 구절에는 "1규빗은 50센티미터"라는 말은 안나오더군요.
>관심 있으시면... 한번 가서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메리암 웹스터 영영 사전에 따르면... 1규빗은 약 18인치(45.7센티미터)"
>이런 식의 인용을 "정확한 출처 제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 칼럼난에서는 일체의 시비거리를 제거하기 위해 이런 답글도 달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한 시비를 하시는데.. 조정희님은 사용하는 단위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셨는지요?

안밝혔던 이유는 단위 등은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지요. 규빗은

바이블을 제대로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독교에선 상식에 가까운 낱말입니다.

그것을 굳이 출처를 밝혀야 할 필요는 없지요. 또한 규빗은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

까지 (43 ~ 53cm)로 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출처는 모릅니다. 이미 오래된 기억에 의존

하니까요.

1규빗은 50cm로 계산했다니까 50cm약 18인지(45.7cm)라고 하는 이야기는 또 어떤 자세입니까?

권면을 드립니다만, 논의와 관계없이 [관전평]이란 글로 비아냥 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아냥 거리고 싶다면, 본문에다 비아냥 거릴만한 글을 토대로 하십시요.

차후 관전평이 올라오면.. 바쿠스도 심심할 때 맞대응 하겠습니다.

관전평이란 글로 특정인에 관한 인신비방을 자제할 것을 제안합니다.
바쿠스

 

 

01/15 모처럼 조정희님의 진솔한 글을 보게 되는 군요. 23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확실한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므로,
>그런 소망의 밑받침이 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 당하기"라고.... 풀 수 있다고
>저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각합니다. (너무 심한가요?)

동감입니다. 믿음은 어떤 것이 현실화 되기를 바라는 소망일 뿐이지요.

게다가 고집스럽게 푼다는 조정희님의 진술은 매우 좋습니다.

바쿠스가 주장했던 바가 바로 그것이거든요. :)

바쿠스

 

 

 

01/15 [믿음] Re:[질문]조정희님께/ 울고 싶은데 뺨때려 주기... 19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꼭 집어서 물어봐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걸 두고, 울고 싶은데 뺨때려 준다고 한다지요?

>1,일반적으로, 혹은 개인 자신이 믿음이 "있다" "없다" 는 표현을할 수가 있는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서 이야기를 풀어 보지요.

"최진실씨는 예쁩니다"는 말이 있다고 하십시다.
(저는 진짜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 동생과 저는 최진실씨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였었지요.
옛날에... 결혼하기 전에 말입니다. 최진실씨는 그걸 몰랐겠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예쁘다"는 형용사를 명사형으로 바꿔서 표현해 보시지요.
"최진실씨에게는 예쁨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닌데...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이라는 명사형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는 질문은 어느모로 보나 흠잡을 데 없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바꿔서 "예수를 믿음이 있으십니까?" 하면, 좀 이상하지요?

말하자면 이미 적절하고 자연스런 동사나 형용사의 표현이 있는데도... 굳이...
그것을 명사형으로 바꾸어서 "---음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드물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유독 "믿음"이라는 명사형에 대해서만은 그 표현이 아주 자주 쓰입니다.
특히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고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혹은 "믿음이 부족합니다"는 등의 말을 자주...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하곤 합니다.

목적어를 명시해야 할 경우에도 "을/를"이라는 목적격 조사를 사용하는 대신에...
"---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표현으로 바꿔서 씁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 십중팔구... 일본 관용어구의 표현을 들여다 쓰고 있는 것이지...
한국 고유의 어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른 동사나 형용사는 그런 어법이 별로 없는데,
어째서 "믿음이 있다/없다"는 표현만은 자주, 자연스럽게 쓰이는 것일까요?

저는 거기에 두 가지 (서로 연관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고어체의 영향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표현이 곧잘 쓰였잖습니까?
붕우유신(朋友有信)을 현대식으로 번역한다면
"친구들은 서로 믿는다 (믿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굳이 "친구들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번역했지요.
"명사형+이/가 있다 혹은 없다"는 표현은 한문 역어체로서 고어체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이렇게 거의 유일하게 남은 한문 역어 고어체인 "믿음이 있다"는 표현이,
기독교 내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다 보니까...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말은 언중(言衆)이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사실... 이런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의 성경 번역어에서 부터입니다.
1892년 이후 번역되기 시작한 한글 성경에서 이런 표현을 선택한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다 보니까... 이제 자연스러워진 것이지요.

이런 점을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나는 (예수님을) 믿음이 있다/없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2, 있다면, 믿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설득 당했음을 느끼는 (인식하는)상태"로
>정의할 수 있는가요?

그 점은 좀 확신이 안 갑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설득 당했음"을 믿음이라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설득 당했음을 느끼거나 인식하는 것"은... 굳이 말을 만들자면....
"믿음 의식"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특히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난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는 표현과
"난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는 것을 느끼고/알고 있다"는 표현은 내용이 좀 다르잖습니까?
"나는 똑똑하다"는 표현과 "나는 똑똑하다고 느낀다"는 표현은 그 내용이 좀 다르듯이....


>3, 바쿠스님의 "맹신",신안(信眼),신심은 인식주체가 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제가 지금까지 여러차례 지적하려고 노력했듯이...
믿음을 "맹신," "신안," "신심"으로 푸는 것은 우선 그다지 적당한 방법이 못됩니다.

"믿음(信)은 맹신(盲信)이다"는 표현은 "빨강(紅)은 진홍(眞紅)이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특수를 보편과 동일시하는 오류이지요. "아시아인은 한국인이다"는 표현이 말이 됩니까?

신안(信眼)이라는 신조어에 대해서는 바쿠스님 스스로 "그냥 나름대로 만들어 본 것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으니 더 따져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신심(信心)은 어떤가요? "믿는 마음"이 "믿음"일까요? 굳이 따지자면.....
신(信)이 마음의 작용이므로... 신심(信心)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심(心)자는 별로 더해지는 뜻이 없는 군더더기 말이 되지요.
예컨대... 슬기로움이 마음의 작용이라고 해서 지혜(知慧)라는 말 대신에
지혜심(知慧心), 혜심(慧心), 지심(知心)이라는 표현은 안쓰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심(知心)이라든가 혜심(慧心)이라는 낱말은 국어사전에 나오지만,
그 뜻은 지혜(知慧)와는 좀 다른 뜻이 되어 버립니다.

바쿠스님의 소위 믿음의 정의(定義)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는 것이더라도...
최성진님의 질문 자체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인식 주체... 즉 내가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사실입니다.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여정은 그다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설득 당했음을 처음 "느낀 것"은 우르에서 하나님을 꿈에 보았을 때지요.
그래서 우르를 떠났습니다만, 그가 하란에서 10년여나 뭉기적거린 것을 보면
그의 설득당함이 아직 완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란에서 다시 한번 설득 당하고서 가나안으로 이주했지만...
거기서도 설득 당한 사람답지 않은 작태를 여러 번 보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사라를 겁탈당할 뻔 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가 비로서 완전히 설득당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는 모리아산에서입니다.
"무슨 뜻이 있으시것지" 하면서 아들을 묶고 칼을 들이댔잖습니까?
네, 미친 짓입니다.... 외동아들을.... 그러나 완전히 설득 당한 사람은 그런 짓도 합니다.

하란과 가나안 이주 초기의 아브라함은
스스로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안 그랬지만....
오류이지요... 하지만...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오류입니다.

그런 착각과 "종교의 믿음은 모두 맹신"이라는 말과는 차원이 좀 다른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4, 조정희님의 "설득~"은 설득자를 부각한 것이고, 바쿠스님의 "맹신"은 피설득자의 오류를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저로서는 그런 표현에도 별로 불만이 없습니다.
설득자는 열심히 설득하는데, 피설득자가 계속 착각하는 일은 아주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바쿠스님의 문제는 (제가 생각하는)... 설득자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득자도 없고 설득 내용이라는 것도 모두 허구인데... (그의 성경비판을 보시면 됩니다)
괜히 피설득자가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바쿠스님의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주장이....
설득자의 진실한 의도를 받아들이고 (그것 자체가 믿음의 일부지요),
나아가서 설득자의 설득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보는 제 입장과
어떻게 동일해 질 수가 있겠습니까?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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