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매일 글을 업데이트^^합니다.
그래서 독자의 한마디...란이 가지는 생명이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이곳을 영적 전투의 장으로 활용하시기를 즐거워 하신다면...더할나위없는 영광으로 알 것입니다.
모든 분들께 공히 부탁드릴 것은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어느정도의 비방이나 인신공격은 물론 없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수준과 생각하는 것이 천차만별인만큼...그리 제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반말을 하는 일은...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웬만하면 그대로 놔둘 것입니다.
글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지...이 칼럼공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되도록이면 스스로 수정하시도록 기회를 드리고자 함 때문입니다.
수정하지 않아도...하루면 페이지가 넘어가니까...^^문제없다 생각합니다.
비아냥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인 욕을 하는 것은 생각해 보고 삭제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반기독교적 입장에 서신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등을 호칭할 때 지나친 비하는 삼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략상..감정을 격발시키는 데 그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으나...
가장 훌륭한 승리는 "논리"와 두뇌로써 쟁취하는 것인만큼^^...기독교의 거룩한 것에 대한 천박스런 호칭은 삼가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적 입장에 서신 분들께는
오래참음이라는 말 한마디를 부탁으로 대신합니다.
...
저는
논리적이라 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전투를 보는 즐거움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습니다.아마 대다수의 독자분들이 저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어쨋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적잖은 유익이라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논리적 싸움이 얼마나 낭비적인가...하는 것으로 부터
최대한...
반기독교도들중 한분이라도...진리에 설득되는 것까지...
01/14 Re:처음으로 방문합니다./환영합니다. 16
무엇보다 자주 만나 주시겠다니 참 고맙습니다.^^
원래는 안티예수분들을 생각하며 기독교를 설명하고...변명하고...비판하고...뭐 그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안티분들이 이 다음종교칼럼에는 별로 보이지않았구요...따라서 설명과 변명은 별로 할 일이 없었지요. 남은 것은 비판뿐이었는데...영 형편없는 글들입니다. 물고 늘어지는 비판이 없다...뭐 그런 소감입니다...스스로 판단하기에^^
최근에
오강남님의 예수는 없다...책비판?을 통해서...안티예수쪽이신 바쿠스님이 등장해서...재미있게 되고 있는 중입니다.
조정희님과 바쿠스님의 일전^^은 재미 두배!!입니다...
294개의 본 칼럼글중 읽을만한 것은 없고...
독자의 한마디중에는 꽤 읽을 것이 있겠지만...천개를 훨씬 넘는 글중에서 그것을 찾는 일이란 보통일이 아닐터이니...
권해드리기도 그렇고...그렇습니다.
이 칼럼은
독자분들의 수준이 칼럼지기보다 월등한 유일한 칼럼이다...라고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님도 유명한 독자가 되시기를 ... 기대하겠습니다.
원필
:
: 영적싸움이란 한 마디로 복음을 아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복음(예수=그리스도)만 깨달으면 싸움은 끝!..이기 때문이죠.
: (여기서 '끝'이란 싸움이 더이상 없다는 뜻이 아니라 '승리'를 의미)
:
: 많은 사람들이 영적 전투에 대해 얘기하지만
: 그 전투의 대상에 대해서는 희미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 칼럼지기님은 어떠신지...
:
: 아! 죄송합니다...먼저 인사부터 드려야 하는 데...
:
: 안녕하세요?
: 저는 이곳 회원으로 신규 가입한 사람입니다.
: 칼럼 이름(예수와 안티예수)의 뜻도 잘 모르고 가입했어요...
: (그러나 '예수'는 확실히 알아요. 그리스도라는 걸!)
:
: 신참을 위해 "예수와 안티예수"의 의미를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 한꺼번에 많은 분량의(294호씩이나!) 글을 읽기가 (시간상의)부담이 되어서..(죄송!)
:
: 대신 앞으로는 아주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 얼핏... 분위기가 좀 살벌(?)한 것 같아서...(경고.. 아니 부탁..을 읽으니)
: 이런 곳에는 저처럼 부드러운 감초가 필요하거든요..하하.. ^^ ~♡
:
: 그럼 앞으로 좋은 글 많이 기대할께요..
:
: -예림 올림-
:
정예림
01/14 Re:[알림] 찬송가 모음집: "예수님 안에서 삶 사랑"/목사님의 찬송평... 14
아내:목사님 목소리가 참 고우시네요
나:나도 저 정도는 부르잖아?
아내:당신은 소리가 거칠어요
나:나실아 아빠노랫소리가 거치냐? 곱지?
나실:(한참 눈알을 굴리더니...)...고와요
아내:호호...나는 곱다고 꼭 더 좋아하지는 않아요...
나:위로할 필요없어요...노래방가서 연습좀 더 해야겠군...쩝^^
원필
:
:
: "광고" 한마디 올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일전에 제가 미혜씨와 함께 찬송가 씨디를 완성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 소리 파일이 마련되는 대로 제 칼럼에 올려 보겠다고도 했습니다.... 만....
:
: 저나 미혜씨나 워낙 소프트웨어 다루는 것이 젬병이라서...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던 중,
: 저희 교회 홈페이지의 웹지기께서 애를 써 주셔서
: 인터넷을 통해서 그 찬송들을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
: 저희 알바니 장로교회 홈페이지에 가셔서
: (http://www.kpcalbany.org/ 혹은 http://www.kpcalbany.addr.com/)
: CD: Love of Life in Jesus 난으로 가시면 선별된 곡들을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
: 열아홉 곡이 모두 올라 있지는 않고... 우선 세 곡만 올려져 있습니다만...
: 맛 보시기에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첫 곡은 미혜씨의 오르간 독주로 된 "내 주여 뜻대로" (찬송가 431)이고...
: 세 번째 곡은 저희 교회 강충욱 목사님께서 부르신 "오 놀라운 구세주 내주 예수" (446장),
: 그리고 네 번째 곡은 손학래 선생님이 연주하신 "나같은 죄인 살리신"(405장)입니다.
:
: 시간을 두고 선별곡을 바꿔서 올리신다고 하니까
: 다른 곡들도 차례로 들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 저희로서는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든 것이지만.... 들으시기에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 나누고 싶으신 감상이 있으시면... 저희 교회의 메시지 보드나 이곳, 혹은
: 제 칼럼난 (성경의 한국 개념)의 독자 한마디 난에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이 글이나 저희 교회 홈페이지를 알리는 말씀은 물론...
: 찬송가 파일까지도 다운로드하셔서 마음껏 배포하셔도 됩니다. (Copy-left)
:
: 그럼... 예수님 안에서... 멋진 일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
: 조정희 드림.
: (성경의 한국 개념)
01/14 [오류수정 4] 웹마스터 믿음에 관한 코메디... 36
>그리고 앞으로는 바쿠스님이 비아냥거리기의 방법을 먼저 사용하시지 않는 한...
>저도 "비아냥을 꼬집기"로 응대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지엽적인 문제들에 관한 바쿠스님의 재반론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원래의 주제에서 초점이 옮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관련된 바쿠스님의 재반론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동의 합니다.
>>>14.유럽 언어권의 "믿음"은 모두 "맹신(盲信)"이다 (바쿠스)
>>>그럴 리가.... (조정희)
>
>>영어의 믿음에 관한 보편적인 쓰임새를 5가지로 분류하여 조정희님에게 이야기했음.
>>역시 조정희님의 왜곡.
>
>바쿠스님은 belief, trust, faith는 믿음이 아니라 맹신(盲信)"이며,
>"reliance와 confidence만 진짜 믿음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종교적인 믿음은 맹신"이라고 하셨잖습니까?
>
>그런데 일전에 제가 어원분석을 통해서 reliance는 바로 종교(religion)와 어원이 같고,
>confidence 역시 faith와 어원이 같다는 점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쿠스님의 분류와 설명에 따르면 유럽언어권의 믿음은 모두 맹신이 되는 것이지요.
'믿음'은 참과 거짓으로 이분화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구분하자면, 이성적
^^^^^^^^^^^^^^^^^^^^^^^^^^^
인 자료를 바탕으로한 믿음과 감성에 의존한 믿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faith'와 'confidence'에서 faith와 fidence에 관한 어원이 같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것처럼
주장하는 조정희님의 진술은 넨센스를 넘어선 왜곡입니다. 'con + fidence'는 복합어이지요.
예를 들어, '地'와 '天地'에서 地가 같으니 같을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이부분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은 [01/11 [오류수정 2] 어원이라.. ]에 이미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그 글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종교적 믿음이 설득에 의한 것 이라면 'reliance'나
'confidence'를 통해서 논리를 이끌어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토론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하시는 용기 정도는 있으신 줄 알았는데....
>아직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시군요.
>하긴 우리의 원래 주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였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버틸 때까지 버텨보셔야 하겠지요.
>안 그러면 "결론"이 나버리는 판국이니까요.
인정하는 용기가 없는 것은 조정희님입니다. 제가 쓴 글조차 왜곡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설득(說得)이 안되신 것 같으니, 제가 추가적인 증거를 몇 가지 더 대드리지요.
>미리암웹스터 영영 사전에 나온 트러스트(trust)의 뜻을 한번 보시지요.
>
>"assured 'reliance' on the character, ability, strength, or truth of someone or something"
>
>아니... trust 조차도 reliance로 설명되어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그렇다면 trust도 참된 믿음이 되는 겁니까? 아니면... reliance가 맹신이 되는 겁니까?
냠... 번역이나 한번 제대로 해보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reliance'란 낱말만 믿고 한번
이야기 해 본 것 인가요?
님이 옮긴 웹마스터의 내용에는 능력이나 힘에 관한 대담한 신뢰를 나타내거나 사람이나 무언가
에 관한 막연한 신뢰를 나타내는 군요. 보험적인 성격이에요. 웹마스터 두번째 설명을 보면
더욱 더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2 a : dependence on something future or contingent : HOPE
'희망'이란 낱말을 '대/문/자'로 아주 눈에 잘 띄이게 써놨네요. 쯧쯔...
^^^^^^^^^^^^^^^^^^^^^^^^^^^^^^^^^^^^^^^^^^^^^^^^^^^^^^^^^^^^^^^
>이번에는 belief를 보시지요.
>a state or habit of mind in which 'trust' or 'confidence' is placed in some person or thing
>이를 어쩌지요? belief 도 confidence로 풀리어 있군요.
>바쿠스님은 그다지도 belief를 맹신이라며 싫어하고
>confidence는 참된 믿음이라면서 좋아했는데.... 그 둘이
>서로 바꿔서 뜻을 풀 수 있는 말이라네요.
>이상의 근거들을 합해서 요약하면... 바쿠스님의 맹신 세 가지와 참된 믿음 두 가지는..
>결국 한통속이 됩니다. 경우에 따라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같은 부류라는 말이지요.
조정희님이 옮긴 글 중에 포인트는 'a state or habit of mind' 랍니다. 해석도 못하면서 무리
하게 영영사전 펼치지 마시고 그냥 영한사전 보세요.
>그러니 바쿠스님이 자신의 원래의 다섯 가지 분류를 유지하면서도
>그 동안의 착각(錯覺)과 오해(誤解)를 바로잡으려면.....
>그 다섯 가지가 모두 참된 믿음이던가.... 아니면 모두 맹신(盲信)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쿠스님은 "종교적인 믿음"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참된 믿음" 축에 끼워줄 수가 없는 분이므로....
>제 결론은 "바쿠스님은 다섯 가지 모두 맹신(盲信)이라고 주장하시겠군"이었던 것이지요.
'belief', 'trust'의 영영사전을 보고 설명하는 것을 보니, 어째서 바쿠스의 글을 난독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공연히 더 아는체 하면서 망신을 자초하지 마시고 바쿠스가 '믿음'의
쓰임에세 관하여 정리한
[01/10 [오류 수정] *왜 "믿다"는 "설득 당하다"인가? ]를 보세요. 한글로 쉽게 풀어
놓았답니다.
>제 결론이 틀렸습니까?
>그러면 반대로 "다섯 가지 모두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모양이 더 우스워지겠지요?
>저는 그래도 바쿠스님의 입장을 고려해서 내려드린 결론이란 말입니다.
조정희님의 입장을 고려해서 한마디 권면드리자면, 잘 모르면서 아는체 하지 마세요.
>앞뒤도 재보지 않고 무조건 좌충우돌하시다가는
>그런 자가당착(自家撞着)에 걸리게 된답니다.
>아직도 reliance와 confidence만은 참된 믿음이라는 주장을 계속하시려면
>무언가 "새로운 근거"를 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석도 제대로 못하고 똑같은 낱말이 보인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정도의 자기당착은 중병입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만 '참된'이 아니라 '이성적인 근거에 의한' 입니다.
조정희님이 좋아하는 웹마스터에서 confidence를 옮겨봅니다.
a : a feeling or consciousness of one's powers or of reliance on one's circumstances
^^^^^^^^^^^^^^^^^^^^^^^^^^
<had perfect confidence in her ability to succeed> <met the risk with brash confidence>
b : faith or belief that one will act in a right, proper, or effective way
^^^^^^^^^^^^^^^^^^^^^^^^^^^^^^^^^^^^^^^^^^
<have confidence in a leader>
'faith' 나 'belief'란 낱말이 등장했다고 해서 "거봐요. 내 말을 증명하잖수!" 라는 식의
코메디 하지 마시고 circumstances 와 밑줄친 부분을 염두해서 해석해 보세요.
>(이 정도면 바쿠스님께서 성실한 답변을 해 주실 수 있을 만큼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 '정중하게' 부탁드리는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탁한다고 배우는 자세가 아닙니다. 잘 모를땐, 그냥 질문하는 것이 배우는 자세랍니다.
해석도 못하면서 생각하던 낱말이 등장했다고 "내 증언을 증명한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랍니다.
어원에 관하여 컬럼에 써놓은 글도 코메디 입니다만, 이곳에서 웹마스터에서 옮겨서 바쿠스에게
반론한다고 써 놓은 글은 희세의 코메디 걸작 이었습니다.
바쿠스
01/14 문자적 해석이 믿음에 그렇게 중요한가 ???? 23
우리는 살면서 본질과 상황의 중요성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양떼를 지켜주는 것이 Fence 라고 믿는 사람은 상황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며 양떼를 지켜주는 것은 목동이라고 믿는 사람이 본질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미국의 에돔 킹이라는 아이의 경우에 에돔킹은 선천적으로 한짝다리가 발육 부전으로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늘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아이의 부모는 아들 에돔킹이 불구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 다리를 자르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리를 자르고 의족을 끼면 스스로 걸을 수 있는데 부모가 다리 절단을 반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 크도록 휠체어에 앉아서 다녔다.
비록 휠체어에 앉아서 다닐 지라도 불구자아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리의 본질이 무었이었을까 ?
다리의 본질은 몸을 지탱하고 걷도록 하는 것이었다.
불구자냐 아니냐는 상황에 불과한 것 이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본질을 외면한채 상황에 매달려서 헛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수가 많다.
문자, 언어란 의미를 낳는 발화 측면의 parole(what) 와 의미를 생성하는 구조측면의 langue(how) 와의 결합으로 대상의 다름이나 차이에 의하여 만들어진 약속 즉 Sign 들이다.
이렇게 인간이 작위적으로 붙여놓은 대상과 언어(문자)의 켤레들에는 틈새가 느슨하기 마련이다.
즉 같은 문자, 언어라도 매체에 따라서 전달되는 의미는 달라진다.
거울에 반영되는 형상만이 이상적인 자아라고 믿는 1차원적인 인간들에게는 그 거울뒤에 숨어있는 본질은 파악하지 못한채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왈가 왈부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문자들은 성경을 집필한 저자가 어떤 의미로 썼느냐가 본질이며 단순히 활자로 성경에 나타난 문자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사전에 분명히 경칭으로 정의된 단어가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서 욕이 되듯이 말이다.
우리는 현상에 불과한 문자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쓰여진 본질을 이해함이 정도라고 생각된다.
믿음이란 단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
그런 어려운 믿음란 단어를 모르고도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믿는 신실하게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누가 되는 논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런 어려운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럼 믿을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
배규태
01/14 "팝콘"먹으면서 16
토론의 촛점이
(개신교인의)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설득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자신이 원(가지고자)하는 허상을 따라가는 자기 최면(맹신, 信眼)이다.
이런 관점에서들
토론하시는 것이 맞죠?
플씨
01/14 믿음에 대하여 22
여기는 매번 왔는데 토론이 벌어졌는지도 몰랐습니다.
매일 새로운 칼럼이 오르는 것이 토론에는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다행히 조정희님이 요약을 해 주셔서 대략은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의 본론은 「믿음」이 무어냐는 것이라 보입니다.
그리고 조정희님이 「설득당한 상태」로 푸신 것이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게 포인트 같습니다.
조정희님의 칼럼은 몇 번 가 보았습니다만
죄송하게도 회원 가입은 못했습니다.
읽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마다 처음 대하는 내용이니
제 아둔한 머리로 전체 줄거리 파악은 엄두가 안 나서였습니다.
믿음에 대한 칼럼도 읽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하나도 기억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내용이
혹시 칼럼 글에서 이미 짚은 내용이었더라도 양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의를 차리자면 다시 가서 읽고 이 글을 써야겠지만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믿음을 설득으로 푸는 것은 맞을 경우도 많겠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하는 것이고
설득은 설득자와 피설득자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각이나 기존 지식 등이 설득자가 될 수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만
어떤 정의를 하면서 쓰는 단어에 단서를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차라리 「납득한 상태」가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맞다고 인정하는 것」 정도면…?
여기에 문헌을 가져다 하나하나 반박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들어 본 예이니까요.
말은 아무리 어원이 어떻고 발전 과정이 어떻고를 따지더라도
우선 현재 그 말을 듣거나 생각했을 때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더 우선하지 않을까 여겨져서 하는 말입니다.
2
믿음은 설득보다 더 강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믿음은 옳다고 주장할 만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지만
설득당함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설득당함의 속에는 양보의 의미도 있고 화해의 의미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조정희님은 믿음을 설득당함으로 풀었지 설득당함을 믿음으로
풀지는 않았기 때문에 설득당함에 다른 뜻이 있다 하여
믿음의 풀이로 적절치 못하다 주장함은 약간 무리임을 압니다.
그러나 설득은 당했더라도 믿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불완전하지요.
설득자의 권위나 실력 때문에 마지 못해 양보해 주는 것도
설득당하는 것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생각을 안 바꾸는 경우도 있다 봅니다.
3.
믿음은 앎과 다릅니다.
믿음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앎은 확실한 내용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객관적으로 확인되면 앎이나 지식이 됩니다.
돈을 빌려 간 친구가 꼭 갚을 것이라 믿는 것은 안 갚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가 갚을 날에 찾아 왔다 칩시다.
가져 온 돈을 확인하기 전에는 돈을 가져 왔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내 놓았을 때
「돈을 가져 왔다고 믿을」 바보는 없습니다.
가져 왔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지요.
물리학에서는 확률이 0이나 1이 되는 확실한 경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에 물 한 그릇을 떠다 놓았을 때
그 물이 꽁꽁 얼어 버릴 확률을 0으로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일은 보통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 하는 것도 믿을 수 있지요.
4.
종교적인 믿음은 계속 그 믿음을 확인하기 때문에 자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내부에는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가시넝쿨처럼 뒤엉켜 있고
연결되어 있는데 어느 부분에 마음이 닿으면 그 연관되는 부분이
정리되고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약간이라도 믿음이 생겨서 교회에 나가면
믿음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특징이 아니고 계속 확인하면서 마음을
하나님에게 가져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교의 화두가 믿음이 아닌 의심이지만
자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
종교적인 믿음은 일종의 맹신입니다.
아니 맹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옳은 가치관을 두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위의 「설득당함」이나 「깨달음」은 2개의 서로 모순되는 사안이
서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다가(이게 스트레스임)
한쪽으로 승부가 나는 과정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모순되는 사안이
순서대로 무너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끝까지 이겨야 하는 하나님은 맹신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맹신이라 하면 논리나 이치를 무시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논리적이기 때문에 믿음이 잘 진행되면
맹신이라는 소리는 안 듣는다 봅니다.
기독교인 중에 이런 맹신도가 나오는 것은 목사님들의 잘못이라 봅니다.
잘 지도하여 단군상을 해치거나 불상을 모독하는 행위는
안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6.
저는 토론에는 강하지 못합니다.
책을 보더라도 고유명사들은 거의 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론이나 공격은 무섭지만 질문이나 해명 요구는 받겠습니다.
갓바위
01/14 [참고하세요]...토론을 즐기는 법... 22
토론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 칼럼난의 첫화면을 주목하지 마시고
왼쪽에 있는 [독자의 한마디]를 이용하시
^^^^^^^^^^^^^^^^^^^^^^^^^^^^^^^^^^^^^^
는 것이 좋습니다.
^^^^^^^^^^^^^^^^^
앞으로 토론의 진행형편을 보아서
좀 뜨는 것이 늦어지더라도...100개까지 올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토론에 별관심이 없으시고
칼럼지기와 오순도순 이야기 하실 분들은^^...그냥 첫화면의 아래쪽 독자의 한마디를 이용하시면 되구요...
...
그리고
사족을 하나 달자면...
토론을 위한 글은 되도록이면 짧게 요약하여 올리는 것이 좋잖을까 생각합니다.
원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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