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예수와 안티예수

야베스의 기도 시비하기...2

주방보조 2007. 1. 15. 00:24
<제296호> 야베스의 기도2...서문 2002년 01월 15일
저는 서문을 항상 가장 중요한 읽을 거리로 보는 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의 서문은 대단히 짧습니다.
그래서 서문 전체를 그대로 다 실어드립니다.

...

서문

독자여러분께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담대한 기도는 어떻게 하는 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도는 간단합니다. 네 문장으로 나눌 수 있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성경속에 잘 감추어져 있어서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삶의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그 기도는 제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들과 그분의 능력으로 매일 경험하는 것들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담긴 진리를 적용하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매일의 삶속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야베스의 기도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브루스 윌킨슨

...

제가 중요하게 봐봤자^^ 이 짧은 서문에서 뭔가 쓸 꺼리를 끌어낸다면... 뛰어난 수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 자신도 잘 알고 독자분들도 다 아는 것이니...

그냥 맛보기로...그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 서문을 다 읽었다...로만족하시기를 바랍니다.

...

그래도 수재연하고^^ 한마디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담대한 기도는

네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그 한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지금 독자의 한마디란에서 치열한 쟁론이 오가고 있죠?^^)으로 드리는 기도에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성경의 그 어떤 구문이나 구절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그 문장 자체에 무슨 힘이나 영향력이 있습니까?...마귀도 꺼내서 써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제 아무리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이 좋다고 매 주일마다 찬양에 실어 하기도하며 함께 중얼거리지만...거기에 우리의 믿음이 실려 하지 않는다면...높이 올라가며 부르짖어지는 음악적 감동에 부르르 떨거나 함께함으로 웅장해진 그 소리에 감동을 하는 것 말고 무슨 유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주문처럼 자동적으로 우리 입술에서 흘러나올 뿐이지요...
하물며 야베스가 한 기도이겠습니까?

그 기도(문)에 ...이 있다...

이 설정 자체가 절대로 잘못된 출발점입니다.

야베스가 그때 드렸던 기도의 기록된 그 내용에는 아무런 능력도 열쇠도 없습니다.
야베스가 그때 드렸던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은...그 기도(문)이 잘되어 있어서가 아니라...야베스가 올곧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이 구하여야 할 것"을 기도했기 때문에 그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

기완 수재연했으니...한마디만 더 시비하고 끝내겠습니다.

그기도에 담긴 진리를 적용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매일 기적을 경험한다...

이런 거짓말을 쉽게 뱉어내어 활자화하는 것은(번역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사이비 약장사나 하는 짓입니다.

"이 아무아무 효소를 드신 고객들은 매일 기적같이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뭐가 다릅니까?

...

아마...앞으로 다뤄질 야베스의 기도의 문제점은

과장과 거짓이 될 것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제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01/15 [믿음]바쿠스님에 대한 억지(?)이해 24
조정희님의 글
******
"믿음 의식"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특히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난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는 표현과
"난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는 것을 느끼고/알고 있다"는 표현은 내용이 좀 다르잖습니까?
*******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뵈뵈는 "플씨는 믿음이 있다" 하고, 원필님은 "없다"고 했을때, (님의 표현대로) 설득되었다는, 혹은 안되었다는 "자기인식"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란 것이, 있다 없다로 표현될 수 있다면, 믿음이란 글 자체가 이미 느낌(인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므로,"믿음의식"이란 동어 반복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정희님의 글)
그의 설득당함이 아직 완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자신은 설득당했다고 느끼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닌 경우도 있다고 하는 것은, 피설득자의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가 나의 대속자"라는 혹은 "성경이해"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리 인식되고, 또 순교자적 자세로 자기 믿음을 고집하므로, 종교적 분쟁이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설득자는 "진리 그 자체"이므로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인식자의 오류가 "완전한 설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쿠스님의 그 "맹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정희님의 글)
그렇지만 바쿠스님의 문제는 (제가 생각하는)... 설득자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득자도 없고 설득 내용이라는 것도 모두 허구인데... (그의 성경비판을 보시면 됩니다)
****************
다음은 바쿠스님이 얼마전에 쓴 글입니다

*****
바쿠스도 10년 정도의 기간은 아주 신실한 믿음을 지녔었습니다. 바꿔말하면 예수가 꼭 있어야만 행복했던 시절이지요. 또, 약 10년 정도는 방황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예수가 있어서 대단히 혼란스런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은 교회는 재미삼아 다닙니다. 예수가 제게 그다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기간입니다.
~~~~~~~~~~~~~,(글 순서를 조정했음)
지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신실한 기독교인에서 불신자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혹자는, 네 믿음은 신실하지 않아서 그랬었겠지 라고 생각하겠지만..그것은 ) 제가 호교론적이든 비평적이든 간에 비교적 열린 자세로 문헌과 대화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

저는 바쿠스님이 설득 당하는 "자기 인식"과정이 일반적이지 않고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설득 당한 그 인식을 순교자적 자세를 견지하며, 자기와는 다른 인식을 가진, 교인들에 대한 바쿠스님의 설득노력이 오늘의 바쿠스님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고승의 이야기처럼
"다 마음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저는
믿음이란 "인식자의 인식 방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플씨

 

01/15 [추가] 바쿠스님 이해 15
바쿠스님의 글
******
선택받은 자들에게 어떤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계획에 따라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기도 하는데, 벌을 줘야하는 합당한 이유가 없을 때에는 벌 받을 사람을 강팍하게 만든 후에 계획대로 징계를 하십니다.
**********

그가 과거에 설득당했던,
하나님에 대한 지금의 인식방법입니다.

어느 회로에서
그와 저가 갈라지게 되었는지, 궁금한 대목입니다.


플씨

 

 

01/16 기도에 응답이 없을 수 있나? 20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여기까지는 문제 없지요? ^^하나님곁에서 그분이 듣나 안듣나 조사할 수 없을테니까요...

결국
그 기도대로 되느냐 안되느냐를 가지고
믿는사람이란 분들이나 바쿠스님같은 사람이나 응답을 따지려 듭니다.

이런 이유로
바쿠스님은 ...하나님이 기도를 안들었거나
하나님이 없거나...하는 것의 증거로서 자기 자신의 경우를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그런식의 검증을 하려드는 이들을 인간적으로 이해를 하긴 합니다만...매우 비성경적이라는 것 때문에 신빙성없어 합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시간과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쿠스님의 예를 든다면...스스로 시험대상을 자처하셨으므로...
바쿠스님의 친지중 어떤 신실한 분이 15년동안 바쿠스님의 회개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기도를 진지하게 들으십니다.
그리고 바쿠스님에게 ... 기회를 주십니다. 김원필도...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인물일 수 있습니다. 조정희님도 그렇고 플씨님이나 갓바위님 그리고 유샛다운님까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하...

그러나 결국 선택은 ... 바쿠스님의 몫입니다.

어찌 기도에 응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서...하나님의 응답은 없다라고 부르짖는^^것이지...

이미 응답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물론 예...입니다만)
원필

 

01/16 야베스의 기도" 서문을 읽고... 31
야베스의 기도는 언약(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한 기도였기때문에 응답받을 수 밖에 없는 기도였습니다...

아마도 부루스 윌킨슨은 그의 이러한 기도의 비밀을 깨달은(혹 발견한) 것이 아닌가싶네요...

서문에

'그 기도는 간단합니다.'
'그 기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삶의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그 기도는....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말이죠.


....아직 책을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기님의 말씀처럼
-그냥 맛보기로...그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 서문을 다 읽었다...로
먼저 만족을 할 수 있어서 매우 다행입니다.



'언약을 붙잡고 기도하면 (반드시)응답받는다'(→바쿠스님께 알려드리고 싶은 말)


정예림

 

 

01/16 [믿음] 감사합니다. 17


드디어... 바쿠스님의 "믿음"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것도 비아냥이나 억지가 전혀 없는... 아주 진지한 어조로 풀어 가신 설명입니다.

물론 저로서는 바쿠스님의 설명을 1백퍼센트 받아들이는 편은 아닙니다.
더 논의를 하면 명확해 질 수 있는 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주 높이 평가 드리고 싶은 것은...
마침내 "맹신"과 "근거 있는 믿음"사이의 차이가 생각만큼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믿는 바이기도 합니다.

한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믿어졌던 기독교의 믿음은 (중세의 수백 년간),
오늘날 바쿠스님이나 오강남 교수 같은 분으로부터 맹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지난 1백년동안 그 근거를 의심받지 않았던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다윈이나 그 후속학자들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쿠스님이 정확히 지적하신 대로... 심지어
내일 또 해가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점까지도 우리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에 예수님이 오시면... 흐흐흐... 그것도 한가지 이유지요.)
그런 점은 벌써 흄이나 데까르뜨같은 서양 철학자들이 3-4백년전에 주장했던 바인데,
우리는 아직도 그런 얘기를 "심각한 표정으로"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요즘 풍미하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을 합리주의적인 이성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한때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서양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하지요.

하지만, 저는 바쿠스님의 그간의 주장을 그렇게 이해했었습니다.
이성적인 근거가 없는 기독교의 믿음은 맹신(盲信)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저는 기독교의 믿음이 맹신(盲信)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과학과 합리주의조차도 그다지 훌륭한 증거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과학이나 철학도 맹신(盲信)일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바쿠스님께서 이미 그 점을 인정하셨을 뿐 아니라...
직접 설명까지 해 주셨으므로... 제가 사족을 덧붙일 까닭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근거 대기"가 한계를 가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의 지성(知性)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걸 내다 버린다는 것은 자원낭비입니다.
우리의 감정(感情)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은 때로 명확한 사고(思考)를 방해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또 지성과 감정이 제 역할을 못할 때에는 의지(意志)가 그 자리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 세 가지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진 "마음의 활동이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세 가지를 모두 잘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한계가 있더라도....
우리의 지정의(知情意)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관대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성적인 근거를 생각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감성이나 의지에 바탕을 둔 근거가 있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의미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였느냐, 그것을 행동에 옮기고 있느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주장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지성(知性), 혹은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이나 의지(意志)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동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감성과 의지를 강조해 온 반면에
이성과 생각을 (겉으로는 강조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억눌러 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감성과 의지 사이의 "깨진 균형을 바로잡자"는 의미일 뿐입니다.

기독교계 안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독자적인 생각을 잘 못합니다.
그저 외국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생각과 방법을 배우고 베끼기에만 급급하지요.
한국 사정에 안 맞는 것이 많을 텐데도... 그런 것을 꼼꼼하게 따지다가는
"이단" 소리를 듣거나 "정통"이 아니라고 비판받게 되기 때문에 그걸 잘 못합니다.
한국의 학계 분위기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신학계 뿐 아니라...

그런 신학자/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 일반 성도님들도 참 난처합니다.
성도님들이 의문점을 갖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할 뿐 아니라.....
그런 의문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논의하면" 뜻밖에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의 의문은 대개 (그 알량한) 권위로 "억눌러지고," 심지어는
"생각하지(따지지) 말고 믿어라"는 아주 이상하고 과격한 주장까지도 나오게 됐습니다.

제가 "기독교의 믿음"을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로 푼 첫 번째 이유는....
성도님들이 불순한 권위에 의존하는 목회자/신학자/종교학자들을 건너뛰어서....
하나님과 바로 맞상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4백80년 전에 마틴 루터가 주장했던 "만인 제사장" 개념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사제들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시기는 하되 (그런 분들 중에서도 불쌍한 분들이 많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을 전적으로 그런 분들에게 의존하지 마시기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을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로 푼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성경의 주석이나 해설서... 설교집이나 강해집 같은 것들이... 물론 유용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성경 자체를 읽으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설득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것이니까요.
주석... 해설집... 같은 것에는 하나님의 설득이 잘 나타나 있는 것도 없지야 않겠지만...
저자에 의해 다른 불순물이 끼어든 것이 더 많다고 봅니다.
(오강남 교수의 저서나... 야베스의 기도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또 어떤 목회자/신학자/종교학자들이 아주 실망스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지나치게 실망하시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요... 우리와 다름이 없는...
어떤 때는 성도님들이 그런 분들을 가르쳐 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한국 사회와 교계의 분위기가 거기까지 무르익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거야... 스스로 손해와 화를 자초하는 것일 뿐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누가 되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성도님들의 생생한 믿음과 목회자/신학자/종교학자들의 지식이...
서로 도움이 되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님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점점 더 친해져야 하고...
목회자/신학자/종교학자들은 남의 것을 베끼지만 말고 더 열심히 연구해야겠지요.

각설하고....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고 싶으면... 하나님이 뭐라고 설득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으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번역이 잘됐네... 못됐네... 하는 평을 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상관없다고 봅니다.
한글 개역판 성경이든... 공동번역 성경이든... 새번역 성경이든....
심지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이든....
그런 성경들은 이물질이 끼어 있음에 "틀림없는" 해설서들 보다는 훨씬 낫다고 봅니다.

성경을 읽으시면서 그런 해설서를 보시는 것은 유익한 점도 있습니다만...
성경이 없이 해설서만 읽으시는 것은... "영적인 자살 행위"라고...까지...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의 "믿음"에 관한 토론이 이렇게 부드럽게 마무리될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처음 시작이 워낙 과격(?)했던 탓일 겝니다. 드잡이와 욕설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이 칼럼의 지기님과 독자분들의 관심과 참여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들여서 토론의 주도자가 되어 주셨던
바쿠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6 [믿음]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 16


아래의 글은 이미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고 있는 가운데 말씀드리는...
일종한 사소한 논평입니다만.... "믿음"과 관련되는 주제라 올려 드립니다.
이발을 다 마치고 난 이발사 아저씨가 거울을 보여주면서 하는
몇 번의 가벼운 가위질 같은 것이지요.


**전칭명제의 증명법**

"세상의 모든 동물은 눈이 두 개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 명제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려면....
눈이 하나뿐이거나 혹은 세 개 이상인 동물의 예를
"단 한가지"만 들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위의 명제는 "거짓"이 되는 것이지요.

바쿠스님은 처음에 "belief란 이성적인 근거가 없는 맹신"이라고 하셨지요.
그 명제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방법은....
이성적인 근거가 "있는" belief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면 바쿠스님의 명제는 "거짓"이 되고 제 반박은 유효한 게 됩니다.
제가 메리암 웹스터에서 belief의 세 번째 뜻을 찾아드린 것은
바로 그런 증명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 faith 와 confidence

>이중에 confidence'관한 설명이 있었으나 이미 '반복'을 나타내는 com과의 복합어로 전혀
>다르므로 confidence'는 실패입니다.

물론이지요. confidence와 faith는 서로 다른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다른 정도"가 어느 만큼인가는 따져 보아야 하지요.
com+fidere와 fidere의 뜻 차이는 com의 뜻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접두사 com은 "반복, 완벽, 함께" 등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믿다"와 "함께 믿다"의 뜻 차이가.... 그렇게 클까요?
여전히 초점은 "믿다"(fidere)에 있습니다.

재배(再拜)와 배(拜)의 차이는 배(拜)를 "두번 한다"는 것 뿐입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지요. 배(拜)나 재배(再拜)나....
fidere와 com+fidere의 차이도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 차이가 천지(天地)와 지(地)의 차이와 같은 정도의 차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요?


*** reliance와 faith/belief/trust

>나머지 reliance'와 faith'의 연결 시도는 없었습니다.

글을 잘 안 읽으셨군요. reliance와 religion은 어원이 "완전히" 같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re + ligare ("다시 묶다"는 뜻이지요).
요즘 religion은 "종교"라고 번역하잖습니까?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주로 기독교만 가리켰지만....
요즘은 모든 모든 종교를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바쿠스님은 일찍이... "모든 '종교'적인 믿음은 맹신(盲信)"이라고 하신 바 있었지요.
반면에 "reliance는 맹신이 아니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는 (바쿠스님에 따르면) 맹신이라는 religion과 맹신이 아니라는 reliance가
사실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임을 보여 드림으로써...
바쿠스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못 읽으셨군요.
자세히 읽어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6 [관전 포인트-끝] 더 관전하실 것이 없으므로.... 14


사실 개인적으로는 바쿠스님께 미안한 것이 바로 이 [관전 포인트]였습니다.
토론 초기에 하도 비아냥과 억지 주장이 많아서...
그런 걸 피해갈 요량으로 고안해 낸 것이니까요.

서너 번에 걸쳐 올린 [관전 포인트]의 요점은....
바쿠스님이 독설꾼인지 아닌지 잘 살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제 글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반응하면 심각한 독설꾼이고....
저러이러하게 반응하면 독설꾼이 아니거나 용납할 수 있는 정도의 독설꾼이다... 는 식이지요.

[관전 포인트]의 내용에 인신공격은 없었습니다. 그건 제가 아주 싫어하거든요.
"독설꾼"이라는 부정적인 딱지를 무기로 삼기는 했지만요. 그러나...
독설꾼 개념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학술 개념으로까지 발전한 개념이니까....
저로서는 그점 때문에 거리낄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스님께 미안했던 것은 결과론적인 측면에서입니다.
솔직히 저는 바쿠스님이 독설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초기에 사용하신 빈정대기와 억지는 그런 딱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지요.
칼럼 지기이신 김원필님께서.... 그런 정도는 아니라... 고 충고하셨지만...
저는 좀 극단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독설꾼임에 틀림없다"고....

그러나 토론이 마무리되어 가는 이마당에 되돌아 보면....
결과적으로... 바쿠스님이 독설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 같습니다.
(인정할 것 인정하고... 사과할 것 사과하고...
진정한 토론자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독설꾼은 없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바쿠스님이 독설꾼임에 틀림없다고 한 생각과,
그런 생각에 기반을 둔 [관전 포인트]가 미안한 것이지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이번에는
[관전 포인트] 같은 것 사용하지 않아도 되도록....
처음부터 "나이스"하게 한번 해 보십시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6 [소망] 소망(所望)으로... 갈까 말까.... 15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확실한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므로,
>>그런 소망의 밑받침이 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 당하기"라고.... 풀 수 있다고
>>저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생각합니다. (너무 심한가요?)
>
>동감입니다. 믿음은 어떤 것이 현실화 되기를 바라는 소망일 뿐이지요.
>게다가 고집스럽게 푼다는 조정희님의 진술은 매우 좋습니다.
>바쿠스가 주장했던 바가 바로 그것이거든요. :)

역시... 제 미끼를 무셨군요....
"믿음이 소망의 토대"라는 해석을 ... 자의적으로 해석하시고서....
(이젠... 제가 미끼꾼이 다된 기분입니다.)

바쿠스님은 너무 "예측대로 반응"하시는 것이 좀 흠이라면 흠이지 싶습니다....
아니면... 너무 순진하셔서 그러신 지도 모르겠고....
(참고로 저는 흠도 좀 있고 순진한 분들을 좋아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요.)

저는... 간단한 말씀을 드리더라도... 생각과 조사가 없이는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소망(所望)에 대한 제 글은 링크를 통해 소개 드렸지요.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시라면서.... 바쿠스님께서 아마 시간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 글에서는...
한글 개역판 성경 번역자들은 어째서
헬라어 아가페와 피스티스는 "사랑"과 "믿음"이라는 고유어로 번역한 반면에... 유독
엘피스만은 한자어인 "소망(所望)"으로 번역했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해서...

희(希)와 망(望)의 차이....
희원(希願)과 소망(所望)의 차이....
익스펙테이션과 앤티시페이션의 차이... 등등을 깐깐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망(望)자의 파자해도 제시했구요....
건축학적인 비유를 사용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관계도 살폈습니다.

그런 지루한 작업을 통해서 나온 결론은..... 소망(所望)이
"그러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램"이거나
"어떻게 되나 보자는 식의 도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점을 보려면... 이번에는
소망(所望)에 대한 토론이 또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으이구....

뭐... 저야... 제 주장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데... 나쁠 것은 없지만...
또... "믿음 토론"을 통해 서로 쌓은 신뢰와 방법이 있으니... 훨씬 쉽겠지만...

지금 당장 시작하고 싶지는 않군요.... 쉬고 싶기도 하고...
낼모레가 개강이니... 강의 준비도 해야겠고....

그러나 관심이 있으시면... 제 칼럼의 소망에 관한 글을 (1-10호 사이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먼저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또 토론이 시작되어도....
서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동안 관심과 참여에 감사드립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01/16 중보기도와 자유의지(바쿠스님 글에 대한 의견) 15
먼저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긍휼하심이
바쿠스님과 가정에 차고 넘치길 기도합니다.

한 가지 모르시는게 있는 것 같아서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님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메세지를 천년을 하루같이 매일 보내주신다해도
자유의지를 가진(이것도 물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 님께서 끝까지 거부하시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밖에...

또한 진정한 중보기도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값으로 죄사함을 받음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과 같이
중보기도 대상(예를들면 바쿠스님)의 죄(하나님을 믿지 않는)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써 용서하여 주실 것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 아이가 아버지께 잘못을 했는데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잘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때 그 아이가 동생을 아버지께 데리고 가서는
"아버지, 전에 저를 용서해 주셨죠?
동생이 잘못한 일이 있는데, 동생도 용서해 주실거죠?
아버지가 저와 동생을 다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거든요."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님께서 순간마다 짓고 있으니 님께서 믿는 날까지
성도들의 한 영혼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는 향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만큼 님께서 기도의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만....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에젤

 

01/16 [관전소감] 가난한 마음(심령) 15
******************
우리의 지정의(知情意)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관대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겠습니다만,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늘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해한다는 혹은 알고 있다는 의식이 "분쟁과 그리고 불행"을 그 당사자에게 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난한 마음"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플씨

 

 

01/16 조정희형제님의 미끼를 물어드리며. 17
>**전칭명제의 증명법**
>"세상의 모든 동물은 눈이 두 개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 명제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려면....
>눈이 하나뿐이거나 혹은 세 개 이상인 동물의 예를
>"단 한가지"만 들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위의 명제는 "거짓"이 되는 것이지요.
>바쿠스님은 처음에 "belief란 이성적인 근거가 없는 맹신"이라고 하셨지요.
>그 명제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방법은....
>이성적인 근거가 "있는" belief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면 바쿠스님의 명제는 "거짓"이 되고 제 반박은 유효한 게 됩니다.
>제가 메리암 웹스터에서 belief의 세 번째 뜻을 찾아드린 것은
>바로 그런 증명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역지사지를 단 한번만 해 봤더라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패러디를 해보면, "하나님에게 설득당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를 효과적으로

반박할려면 그것이 근거없는 맹신임을 단 한가지만 보여주면 됩니다.

Belief에 의미와 주된 사용 처는 근거 없는 신뢰이지요. :)

사족입니다만, 논리를 이야기하는 분의 글치고는 좀 의아하군요.


>*** faith 와 confidence
>이중에 confidence'관한 설명이 있었으나 이미 '반복'을 나타내는 com과의 복합어로 전혀 >다르므로 confidence'는 실패입니다.
>물론이지요. confidence와 faith는 서로 다른 말입니다.

다른 말임을 인정하셔 된것처럼 알았더니 또 삼천포로 진행되는 군요.



>그러나 그 "다른 정도"가 어느 만큼인가는 따져 보아야 하지요.
>com+fidere와 fidere의 뜻 차이는 com의 뜻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접두사 com은 "반복, 완벽, 함께" 등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믿다"와 "함께 믿다"의 뜻 차이가.... 그렇게 클까요?
>여전히 초점은 "믿다"(fidere)에 있습니다.
>재배(再拜)와 배(拜)의 차이는 배(拜)를 "두번 한다"는 것 뿐입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지요. 배(拜)나 재배(再拜)나....
>fidere와 com+fidere의 차이도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말장난이 재미있는 모양이군요. 패러디를 하나 해 드리죠.

신하(臣) 와 역신(逆臣)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 이지요. 신하(臣) 와

fidere와 com+fidere의 차이도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글을 쓸때, 남도 나와 같은 시각으로 보면 어떨까? 라른 것을 한번만이라도 생각해 보고

쓰면 어떨까요?



>그런 차이가 천지(天地)와 지(地)의 차이와 같은 정도의 차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극한 예를 들었습니다만, 오히려 반감만 산 듯 하군요.

충신(忠臣), 역신(逆臣), 신(臣) 을 한번 더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보다 세밀한 부분에 있었으니까요.



>나머지 reliance'와 faith'의 연결 시도는 없었습니다.
>글을 잘 안 읽으셨군요. reliance와 religion은 어원이 "완전히" 같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re + ligare ("다시 묶다"는 뜻이지요).
>요즘 religion은 "종교"라고 번역하잖습니까?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주로 기독교만 가리켰지만....
>요즘은 모든 모든 종교를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바쿠스님은 일찍이... "모든 '종교'적인 믿음은 맹신(盲信)"이라고 하신 바 있었지요.
>반면에 "reliance는 맹신이 아니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는 (바쿠스님에 따르면) 맹신이라는 religion과 맹신이 아니라는 reliance가
>사실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임을 보여 드림으로써...
>바쿠스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못 읽으셨군요.
>자세히 읽어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해를 전혀 못하셨군요. 좀더 깊게 관찰했으면 좋았을 텐테....

Faith는 라틴어 신념이고 religion은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 집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같은 생각을 지녔으니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가 생활을 했겠지요.) 다시 말해서 어원의 출발

자체가 어긋나있다는 이야기랍니다. 어원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의미자체도 별개이지요.

혹시 '종교 =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는 가요?

이것도 고집스럽게 그렇게 풀고 싶다고 생각하신다면이야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P.S : 바쿠스가 미끼에 걸렸다고 좋아하시니 바쿠스 역시 기쁩니다.

바쿠스 때문에 형제님이 기뻐한다는데 바쿠스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
바쿠스

 

 

01/16 [질문] 에젤님에게... (엔젤이라고 실례를 했더군요. ^^) 28
>한 가지 모르시는게 있는 것 같아서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바이블에서 그런 구절을 본적이 없거든요.

바이블 어디에 그런 설명이 있는지 알려주시기를 청합니다.

꼭 정경이 아닌 외경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럼, 가르침을 부탁드리며...
바쿠스

 

 

01/16 기도와 응답 (믿는 사람은 보지 마세요.) 26
사실 이런 글은 써서 안 된다 생각하지만
굳게 믿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보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는 기관마다 근육마다 심지어는 세포마다
정해진 주파수의 전자파가 발생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의료계에서 1/1000사이클의 오차 범위로
각 근육 단위의 주파수를 측정해 놓고 질병의 치료에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믿어도 좋습니다.

신경 세포가 밀집해 있는 두뇌에서는 가장 많은 종류, 가장 강한 전파가
나오는데 이것이 뇌파입니다.
뇌파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밝혀져 있지 않은데
몸의 상태, 가진 생각, 정신 집중의 정도, 취하는 행동에 따라
다른 종류가 나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뇌파처럼 주파수가 수십 사이클 정도로 낮은 전자파를 초저주파(E.L.F.)라 하는데
이것은 다른 전자파가 차단되는 콘크리트 벽이나
사람의 두개골도 통과하는 등 신비스러운 성질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현대과학이 아직 많이 못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연구가 한창입니다.
멀쩡한 하늘에 특정의 초저주파를 쏘아서 소나기를 쏟게 하는
실험도 미국에서 하고 있으며
중국의 칭 칸첸이라는 의사는 발아하는 콩에서 나오는 초저주파를
고구마나 옥수수에 쏘여서 엄청난 종자의 변혁을 이뤄 냈습니다.
또 여러가지 새싹의 파동을 사람에게 쏘여서 질병 치료, 노화 방지 등의
연구를 하고 있고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인간의 몸은 순수해집니다.
쇳덩어리에 자석을 가까이 하면 철의 분자가 한 방향으로 정렬되듯이
믿음을 가지고 계속 그 믿음을 확인하면 세포 단위의 정렬이 이루어집니다.
생각도 하나님을 향한 한 방향으로 정렬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은 약하겠으나 질문이 있다면 응하겠습니다.

심신이 정리되면 될수록 뇌파가 강렬해집니다.
말하자면 몸이 전기를 잘 통하게 되고
잡생각이 없어지니 뇌파의 순수도 즉 결집도가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렬한 뇌파가 발산되어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거울입니다.
좋은 뇌파에 대해서는 좋은 응답, 센 기도에는 강한 응답을
반사해 주는 거울입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은 거울 탓이 아닙니다.
얼마나 순수한 사람 즉 믿음이 깊은 사람이 기도했는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얼마나 자주 했는지 등등이
응답을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언급은 천기 누설, 혹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될 것 같아 줄입니다.
명상해 보시면 위의 정보만으로도 많은 결론이 나리라 봅니다.

갓바위

 

 

01/16 심심할 때 써보는 소감. (1) 24
개인적으로 칼럼내용과 진행되는 토론 외의 글을 쓰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만, 시간이

잠시 짬도 나고 이곳은 칼럼에 관한 감상이나 토론 외에 글을 써도 상관없는 칼럼 같아서 몇자

끄적거립니다.

-----------------------------------------------------------------

성령의 은혜 쭉쭉빵빵한 실신한 아저씨들과 이야기 하면 재미있다. 사실 어지간한 코메디 프로

보다 환골탈퇴를 거쳐서 주화입마에 돌입한 아저씨들과의 대화가 더 재미난다.

무슨 이야길를 하면 제멋대로 해석을 하니까 그 재미가 더해지는데, 바쿠스는 한국어를 연구

하는 것도 아니고 말발도 딸리니까 예를 들어 보자.

바쿠스 : "종교적인 믿음은 맹신이야."

갑 : "허거걱~! 바쿠스는 모든 믿음이 맹신이래~"

앞에 붙은 제한적 조건을 두는 낱말은 무시하고 보고싶은 부분만 골라서 본다.

그리고 딴소리를 하니 찢어진 신문보고 아는 체 하던 코메디 프로를 직접 체험하는 느낌이다.

이런 딴소리는 그렇다고 치자. 재미난 것은 제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

보는 거다. 토론하다가 그냥 사전에 나오는 상식적인 이야기에 출처를 질문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도 출처를 밝히지 아니하고 사용하다가 빈축을 사기도 한다.

바쿠스 : 창세기 몇장 몇절에 따르면 00m X 00m X 00m 이다.

갑 : 그거 어디에 나오는데?

바쿠스 : 창세기라고 이야기 해줬잖어.

갑 : 그거 말고 규빗을 메터로 환산한 출처를 대란 말이야.~

바쿠스 : 규빗인데 손끝에서 팔꿈치 까지 길이야. 보통 43~ 53cm인데 50cm 으로 계산 했어

갑 : 그러니까 출처를 대란 말이야. 000 사전에 따르면 50cm라고는 안되어 있어
(마치 바쿠스가 엉뚱한 계산을 했다는 듯이..) 00 피트인데 약 00.0센티 이지..

바쿠스 : 흠냐리..

설명해준 규빗의 의미 이해는 차치고라도 대략' 00cm 에서 대략이란 의미를 알고나 이야기

하는 것인지 모르는 건지 도무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물론 플레머가 그렇듯이 이런 땐

이야기를 딴데로 돌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앗.. 회의 들어갈 시간이네.. 심심하면 그때 또 쓰지 뭐~! :)


바쿠스

 

 

01/16 Re:기도와 응답 (믿는 사람은 보지 마세요.) 21
(마땅한 말머리가 없군요...)

일단 기도에는 응답이 온다고 결론을 내려놓은 다음 길게 쓰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에 어떻게 답이 오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군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그건 기도한 당사자에게만 영향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글의 내용에 의하면 말이죠.)

어느날 그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기도한 사람은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기도한 사람의 몸의 뇌파니 세포 정렬이니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지 않겠습니까?
뵈뵈

 

01/16 Re:Re:기도와 응답 (믿는 사람은 보지 마세요.) 19
뇌파의 작용을 언급해 버리면 하나님의 역할이 아니라 할까 봐
생략했는데 할 수 없군요.

발아된 콩(기도자)에서 나온 초저주파(기도=뇌파)는
옥수수 종자(친구)의 유전자를 바꿉니다.(예수를 믿게 합니다.)

초저주파는 하늘의 천기(소나기 등)를 바꾸고
질병을 고치며 정신(정신병, 노화 지연)에 영향을 줍니다.
영향은 기도자가 직접 받기도 하지만 우주가 받습니다.

어떤 경우는 땅이나 나무 등에 그 내용이 스며들었다가(기록되었다가)
적당한 환경에서 반사되기도 합니다.(귀신 현상 등)
여기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길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역할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 염력, 텔레파시, 최면 효과 등을 연결하면
거의 모든 신비 현상이 풀린다 봅니다.

갓바위

 

 

01/16 Re:Re:Re:Re:Re:기도와 응답 (믿는 사람은 보지 마세요.) 18
꾸지람이 아니오라... 궁금해서 그러는 것인데... --;;

좀 전문적인 내용인 듯 하오니 이 정도에서 접기로 하겠습니다.
좀 더 기다려보면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될 수도 있겠군요.
뵈뵈

: 먼저 다시 한번 밝히지만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 이것저것 물으셔도 성경의 해석 등은 모릅니다.
:
: "발아된 콩(기도자)..." 식의 표현은 흥미로운 해석이 아니라
: 앞의 제 글에서 언급한 사항들을 짝지우기로 연관지어 드린 겁니다.
: 발아된 콩에서 초저주파가 나오듯이 기도자에게서 뇌파
: (내용은 기도 내용에 따라 다름)가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하시도록
: 돕기 위한 것이지요.
:
: : 씨앗(기도 대상)에 물(기도)을 주면 싹이 튼다(예수를 믿는다).
: 하는 말도 궁극적으로는 같은 뜻이겠지만 이는 비유로 말한 듯하고
: 저의 표현은 단순한 짝지우기였습니다.
:
: 자유의지를 가지든 고집을 부리든 같은 대역의 초저주파 뇌파가 나옵니다.
: 다만 그 내용이 다르지요.
: 자유의지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아집(편협된 고정관념)이 아니라
: 전후좌우와 연결된 트인 생각이라 생각됩니다.
:
: 변형을 기도하는 대상이 자유의지를 가지면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보다는
: 변형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 기도자의 뇌파 신호가 입력되어도 트여 있는 다른 곳으로 흘러 버리기
: 때문이지요.
:
: 길게 쓰면 또 꾸지람이 있을까 봐 이만 하렵니다.
: 파동과 신호의 모든 성질을 나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 갓바위
:
: : : 발아된 콩(기도자)에서 나온 초저주파(기도=뇌파)는
: : : 옥수수 종자(친구)의 유전자를 바꿉니다.(예수를 믿게 합니다.)
: :
: : 흥미로운 해석이군요.
: :
: : 씨앗(기도 대상)에 물(기도)을 주면 싹이 튼다(예수를 믿는다).
: :
: : 라는 식의 해석과 다를게 있을까요?
: :
: : 자유의지가 있으면 기도를 해도 소용 없다는 말도 있던데 자유의지는 초저주파를 방해하는 또 다른 무슨 파인가요?

뵈뵈

 

 

01/16 조정희님과의 믿음 토론에 관한 소박한 정리. 25
논쟁을 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주 높이 평가 드리고 싶은 것은...
>마침내 "맹신"과 "근거 있는 믿음"사이의 차이가 생각만큼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믿는 바이기도 합니다.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한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믿어졌던 기독교의 믿음은 (중세의 수백 년간),
>오늘날 바쿠스님이나 오강남 교수 같은 분으로부터 맹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지난 1백년동안 그 근거를 의심받지 않았던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다윈이나 그 후속학자들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점은 종교는 스스로 '완벽'하다는 '믿음'을 지닙니다만, 과학은 스스로 완벽

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불합리할 수 있다는 자세로 연구하는 것 이지요. 다시 말해서

과학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과학자 스스로 과학을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창조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합리적이며 스스로 완벽하

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 풍미하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까지 합니다.

기독교는 지난 2000년간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만드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해 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도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말꼬리로 인식하지 말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을 합리주의적인 이성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한때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서양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하지요.

사실 많은 나라에서 더 이상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동안 기독교가 합리주의에 공격 받은

이유는 폭력성을 동원한 배타성이었기 때문이지요.

**** 조정희님의 글 다음 부분은 너무 좋습니다. 모두 한번 음미했으면 합니다. ****

>그러나 "이성적인 근거 대기"가 한계를 가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의 지성(知性)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걸 내다 버린다는 것은 자원낭비입니다.
>우리의 감정(感情)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은 때로 명확한 사고(思考)를 방해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또 지성과 감정이 제 역할을 못할 때에는 의지(意志)가 그 자리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 세 가지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진 "마음의 활동이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세 가지를 모두 잘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한계가 있더라도....
>우리의 지정의(知情意)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관대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찬성'합니다. :)


>이번의 "믿음"에 관한 토론이 이렇게 부드럽게 마무리될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처음 시작이 워낙 과격(?)했던 탓일 겝니다. 드잡이와 욕설로 끝날 줄 알았는데...

전 이번 토론이 어떻게 끝날지 전혀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상하여 '믿음'에 의지하다

보면 자칫 좋지 않은 선입견도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끝으로..

조정희 형제님에게 거울삼아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바쿠스

'예수와 우리 > 예수와 안티예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베스의 기도 시비하기...3  (0) 2007.01.17
김동은씨, 힘 내십시오~  (0) 2007.01.16
야베스의 기도 시비하기...1  (0) 2007.01.14
이곳에서 싸우십시오~^^  (0) 2007.01.13
사모님...  (0) 2007.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