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예수와 안티예수

예수는 없다...3

주방보조 2006. 12. 21. 03:08
<제271호> 예수는 없다3...2.성경대로 믿는다?(1) 2001년 12월 21일
62쪽부터 시작하는 이 묶음글은 몇번에 나누어 살필 예정입니다.
저의 글솜씨가 천박하기도 하려니와
기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여 그렇습니다.
뒤에 나오는 신론이나 기독론이나 종말론?들은 모두 이 성경에 대한 논접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모든 신앙과 행동의 근거는 성경에 있는데 그 성경이 부정되어야 ... 그 다음엔 무슨 말이든지 자유롭게^^해나갈 수 있는 이유때문이지요.

그래서...반기독교도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의 가장 치열한 공격이 성경에 대한 것들입니다.
역으로 ...근본주의자?인(저들이 정의하기에 따라...) 저희들은 또한 성경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함으로써 저들의 노골적이고 유치할정도의 비판을 막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

성경대로...라는 말에 대한 반대논리로서
64쪽4째줄에 벌써부터 "극단적인 예"를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사진찍기 거절, 예배시간에 뱀을 옷속에 집어넣기,안식일 준수,마취거부,노예제도,독재권세에 대한 복종,성차별,전쟁미화?...등을 내세우면서 열변을 토해 냅니다.

저는 이분이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종교학을 공부했고 석사논문을 기독교에 대한 것을 썼다는 것에 의거해 이러한 주장들이 매우 졸렬하게 의도된 오도를 목적으로하고 있다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사이비 부흥사처럼 말입니다. 몰라서 그런 말들을 썼겠습니까? 알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찍기 거절이나 뱀을 옷속에 넣는 일은 그 어떤 정상적인 근본주의적 그리스도인도 ... 성경대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복음으로써 완성되었다는 그 명백하고 간단한 성경의 흐름조차 (일부러)부정하려고 드는 일입니다.
정상적인 권세와 정의롭지 못한 권세에 대한 구별을 성경이 절대로 외면하고 있지 않지만...이분은 한구절만 똑 떼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전쟁을 미화 내지찬양하고 있다는 데...전쟁 그 자체를 그리하는 성경구절이 어디 있나 의아스럽습니다.

이런 몇가지 주장들....저자 스스로 극단적이라 했습니다만...은 ... 일종의 흔들기전법입니다. 자신은 아마 알것입니다. 근본주의가 이미 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아직 그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통찰력이 미흡한 분들을 혼동케하기에는 충분하다...생각하고 제공하는 미끼입니다.

어떻습니까?...흔들립니까?^^

그렇게 흔들어 놓고...
성경을 흥부전과 비교하고 동일시해버립니다.
(이미 작년인가...김용옥님이 홍길동전과 성경을 동류로 보았었지요?)
흥부전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처럼 성경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흥부전처럼 ...근본적으로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사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좋다...나아가 사실이라 할수 없다입니다.

뭐... 반기독교도들이 항상 들이미는 것이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의 여리고엔 당시 성벽이 없었다라는 주장을 믿으라^^하고 우기고 계십니다. 야살의 책에서 인용한 태양의 멈춤이라는 "노래"를 고지곧대로 믿을 수있느냐며 또한 을러대고 계시고...노래란 여러가지 표현법으로 사용되는 것임을 누가 모르겠으며 또한 고지 곧대로 믿는다하여 문제될 것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우리에게 ...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은...성경을 믿어라...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는 말라...고 흔들어 댑니다.

그럴듯하지요? 어떻습니까? 좀 더 흔들리고 계십니까?

...

저의 귀여븐^^물리학자 반기독교도인 분이
항상 들이밀며 우겨대었던 주장이 이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가치를 말하는 것이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는 그러면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진리란 사실이 아닌 것 위에는 도저히 세워질 수 없는 가치다.

예...거짓위에 진리가 설 수는 없습니다.

...

물론 극단적인 문자주의는 ...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 극단적인 문자주으로 보는 이들은 극소수라 할 것입니다.
대다수의 근본주의자들은 역사적이고 합리적인 성경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

내일은 창조론에 걸어온 시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2/21 정말 근본주의자인가? 19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한 대항세력이었습니다.
그러니 대립개념이지요...
보수:혁신
정통:이단...이런 식으로요

다원주의에 대하여...그 대립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으로 써야 適確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원필

 

 

12/21 Re:그러니까.... 근본 vs 다양 ?/ 저자에게 동의하는 것중 하나... 12
만인신학자...주장^^입니다.

조정희님도 훌륭한 신학자십니다.
어디가서 찾아보기 힘든...
원필

:
:
: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께서 펴신 주요 주장중의 하나는...
: 근본주의(根本主義)와 다원주의(多元主義)를 대비시키고
: 전자는 천박(淺薄).... 후자는 풍요(豊饒)...를 낳는다는 해석이신 것 같군요.
:
: 뭐...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제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겠습니다.
: 저는 그저....
: 근본(根本)이라는 말과 다원(多元)이라는 "말"만 살펴보는 데에 머물겠습니다.
:
: 근본(根本)이라는 말을 이루는 근(根)과 본(本)은 모두 "뿌리"라는 말입니다.
: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부분입니다.
: 두 가지 뜻에서 그렇습니다.
:
: 첫째, 나무가 커져도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게 바로.... 뿌리입니다.
: 대개의 나무는 줄기와 가지의 높아지고 넓어지는 만큼
: 뿌리도 그에 상응해서 깊어지고 넓게 퍼진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 그래야 나무가 넘어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
: 둘째, 줄기와 가지와 이파리에 물과 영양을 공급하는 게 바로... 뿌리입니다.
: 모든 나무가 생장(生長)하려면... 물과 공기와 햇볕이 필요하지요.
: 공기와 햇볕은 무제한 제공되지만.... 물은 스스로 공급해야 합니다.
: 그 작용을 뿌리가 하는 것입니다.
:
: 근본주의(根本主義)란 "뿌리"를 중요시한다는 말이므로 나쁜 말이 아닙니다.
: 실제로... 사람들을 평가할 때 "근본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 남을 비하하거나 배척할 때 그만큼 효과적인 "욕"이 없겠습니다.
: 아예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니까요.
:
: 근본주의의 반대말이 있다면.... 그것은 지엽(枝葉)주의일 것입니다.
: "뿌리"의 반대는 "가지"거나 "이파리"겠지요.
:
: 그런데 오강남 교수님은 "뿌리"의 반대말로 "다원(多元)"을 상정하셨더군요.
: 다양(多樣)이라는 말대신 다원(多元)이라는 말을 쓰신 것이 실수이신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다원(多元)이란 근본이 되는 원리가 여러 가지라는 뜻입니다.
: 다양(多樣)이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여러 가지라는 뜻입니다.
:
: 다원(多元)이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할 말이라고 봅니다.
: 원(元)이라는 말은 "으뜸, 근본, 가장 중요한 것"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기독교로 따지면.... "믿음"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 원(元)이 "믿음"에 해당한다면.... 다원(多元)이란 "믿음이 여러 가지"라는 말이겠습니다.
: 그것은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 성경에서는 분명히 "믿음은 하나"라고 했거든요.
: 그러니 "믿음" 혹은 원(元)은 "하나"이어야 하고.... 그래서 획일적(劃一的)이어야 합니다.
:
: 저는 일단 다원(多元)이라는 말을 다양(多樣)이라는 말로 이해하겠습니다.
: 오강남 교수님은 근본(根本)을 다원(多元) 즉 다양(多樣)과 대비시키셨습니다만....
: 저 같은 사람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설정입니다.
:
: 제가 알기로는....
: "근본(根本)"의 반대는 "지엽(枝葉)"이고,
: "다양(多樣)"의 반대는 "획일(劃一)"이거든요.
:
: 어느 종교에서나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신앙생활에서도
: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다지 잘못은 아니라고 봅니다.
: 물론.... 사람들이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 "진짜 뿌리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겠습니다만....
:
: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회와 교인들을 "지엽적(枝葉的)"이라는 비판하는 것은
: 아주 적절하고도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 원래의 뿌리에서 너무너무 이탈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 그런 사람들에게 "근본적"이라는 "칭찬"을 해 줄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
: 오강남 교수님은 그러신 것 같군요.... 안타깝게도....
:
: 다양성(多樣性)이 좋은 것이냐....는 문제는 성질이 전혀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 무엇의 다양성(多樣性)이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 저는 이왕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 "뿌리"에 있어서는 다양(多樣)해서는 안되며
: 오히려 획일적(劃一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와 가지와 이파리는 아무리 같아 "보여도"
: 거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
: 그러나 뿌리만 같다면 이파리는 아무리 다양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리 달라 "보여도" 모두 같은 나무의 이파리들이기 때문입니다.
:
: 뿌리란 기독교인의 근본인 신앙(信仰)을 가리키고....
: 이파리는 기독교인의 이파리, 즉 생활(生活)과 문화(文化)를 가리킨다고 저는 봅니다.
:
: 그래서.... 제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
: "뿌리"는 다양(多樣)하거나 다원적(多元的)이어서는 안 되며....
: 아주 획일적(劃一的)이고 일원적(一元的)이어야 합니다. 반면에...
: "이파리"는 획일적(劃一的)이거나 일원적(一元的)어서는 안 되며....
: 다양(多樣)할수록 좋습니다.
:
: 그럼.... "뿌리" 즉 "믿음"은 "어떻게 획일적"이어야 하느냐고요?
:
: 그런거야.... 저 말고.... 신학자나 목회자들에게 물으셔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 전.... 잘 모르거든요....
:
:
: 조정희 드림.
: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12/22 Re:근본, 다원, 다양 ?????? 30
아마도 바이블이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 --쉽게 말해서 맹신--을 지니신듯 합니다.

교회가면 목사가 가장 반기는 형의 성도지요.
다루기 쉽고 무슨말을해도 다 믿을 테니...

심심풀이 땅콩삼아 그냥 믿는것도 아니고 영생준다고 해서 믿으실테니,
저 라면 꼼꼼하게 따져보고 믿겠습니다.

바쿠스

: 저 자신이 신학적인 학문의 깊이가 얕은 사람입니다.
:
: 그냥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주일학교 교사로 지체들을 섬기고 사는데 가능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 신학적인 이론의 발전이라는 것이 왜 필요 한지도 잘 모릅니다.
:
: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그런 경우에도 거창하고 복잡한 이론과 학문이 필요한 건지도 잘 모릅니다.
:
: 사랑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사랑을 가장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
: 나는 우리의 믿음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어떠한 가설을 세우고 그 것을 입증하고 그런 학문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
: 시골에 글도 잘 모르시는 무식한 할머니도 훌륭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데 궂이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을 꼭 이해하고 알아야지만 참 믿음이 생기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
: 이런 이론을 모르고도 성스러운 순교를 한 우리의 선배 신자들이 많았는데 이론이 중요한 겁니까 ?
:
: 하나님의 자녀되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가 그분이 부르시면 그냥 기쁜 마음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 합니다.
:
: 그 이상의 이론이나 학문적인 복잡하고 어려운 어떠한 가설도 필요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
:
배규태

 

 12/22 Re:독자소개...바쿠스님... 27
몸소 바쿠스를 과찬도 해주시고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뜨거운 영광을 주님에게 돌리겠습니다. :)

참.. 형제님께서 아주 적절하게 도움을 주신 덕에 반기독 1인자 소리도 듣게 된듯 싶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바쿠스

: 제가 독자 소개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만
: 이 분은 좀 소개를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 이분은 저와 하이텔에서 오랬동안 사귀어 온 분으로서 ...
:
: "대단한 반 기독교도"이십니다.
:
: 흠... 좀 칭찬?을 하자면...
: 하이텔의 반기독 제 1인자...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을 분입니다.
:
: ...
:
: 그리아시고...좋은 교제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
: ...
:
: 초청하진 않았는데...찾아오셨군요...
: 저는 반갑습니다만
:
: 이 칼럼이 하루에 한편씩 휙휙 넘어가니까...아마 답답할 겁니다.^^
:
: 바쿠스님도...건투를...빕니다.^^
원필

 

 

12/22 배규태 형제님에게.. 32
>사랑으로 삶을 살으라고 하는 말씀에 이의가 있습니까 ?
>(너무 길어서 중략 ^^)
>믿음을 따지고 캐서 론리적으로 아니라면 그러면 믿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

'믿음'을 논리적으로 따지고 캐는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믿음을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캘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믿음'에 의거한 내용을 마치 '사실'처럼 유포하는 사람들의 글에 의문을

제기 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개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어떤개는 진짜 '뻥'인데도 "믿습니다." 한다지요?

아마도 뻥도 믿는 개 주인은 이런 개를 틀림없이 이뻐할 것입니다.

--- 물론, 사람이 되어서 아무런 고찰도 없이 뻥도 믿는 다면, 생각있는 주인이라

면 그다지 반길듯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인이 사기꾼이어서 의도적으로 사기칠

때에는 잘 속는 바보들이 더 좋겠지요. ----


>그래도 그 개들은 님 보다는 낫습니다.
>미국이 먼 곳인줄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사랑은 입으로 하는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강조하신

당신은 그 개들 보다 훌륭하십니다.

바쿠스

 

 

12/22 Re:개 주인이 목사가 아니고 하나님일때는 기꺼히.... 21
믿음은 분석이나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선포하여 마음에 와 닫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님께서도 마음에 와 닫지 않으면 그 것으로 그만입니다.

마음에 와 닫게 해 달라고 애걸하신다면 그런 경우에는 님같은 분에게는 실천으로 행동을 보여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시련과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참 믿음이 가슴에 와 닫지 않습니다.
세상에 내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 나이 50대 중반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고 때로는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하였고 지 적인 갈등도 겪었고 지금도 시련을 이겨나가고 있지마는 내 편이 필요합니다.
마음속에 내 편 말입니다.

개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개의 주인을 마치 교회의 목사로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교회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충성스런 개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야기입니까 ?
하나님이 사기칠 리는 만무하니까요.
님의 교회 관이 잘못되어 있음을 바로잡으며 기독교가 곧 교회라는 잘못된 개념도 바로 잡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운전수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죽였다고 차를 때려 부수고 차를 만든 자동차공장 사장을 욕하는 어리석음을 재고 하시기 바랍니다.
배규태

 

 

12/22 흠.... 20
이론과 믿음은 결국 같은 거 아닌가요? (엄청난 궤변ㅎㅎㅎ )

이론이란 세상을 보는 틀이고,
믿음도 역시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이니까요....

신학자들이 이론을 연구하는것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론적 활동은 그 자체로도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 편입니다.
유샛다운앳더라이네스

 

 

12/23 논리와 이론.. 그리고 믿음 24


주장1.... 믿음은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다...
주장2.... 믿음은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오강남 교수님은 아마도 "주장1"이신 것 같고....
배규태님은 아마도 "주장2"를 펴시는 것 같고.....

배규태님의 이해에 따르면,
오강남 교수님은 물론, 그분의 글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든 사람들은
(김원필님이나 바쿠스님을 포함해서) "주장1"의 신봉자로 비쳐진 모양입니다.

그러나 "주장2"는 엄격히 말해서 "주장"이라고 볼 수가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무엇이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믿음은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위의 "주장2"는.... 사실.... "반주장1"에 불과합니다.

사실 어떤 주장이고... 그 주장을 부정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 주장에 어긋나는 증거를 단 한가지만 찾아서 제시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반주장"은 아주 손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반주장에는 내용이 부실합니다.
그 부실함을 채우려면 무언가 다른 주장을 내세워야 합니다.
"믿음이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한 주장을
제시해야 내실있는 반주장.... 아니 제3의 주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아주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이
대개는 "반주장"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논리적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고는 하는데....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갖게 되는지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칼럼의 다른 글에서 "믿음"을 나름대로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설득당하기"라고 했었지요.
물론 그렇게 정의된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믿음이든 그것은 "설득당하는 과정"을 겪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믿음"인 것이지요.

그럼 사람들은 무엇으로 설득 당하는가를 살펴보면...
믿음이 과연 "논리적으로 따짐"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주장1과
그것의 부정으로서의 주장2 (혹은 반주장1)의 타당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람은 "논리"만으로 설득당하지는 않습니다.
애인(愛人)이 하는 말은 아무리 개떡같더라도 다 설득 당해 줍니다.
게다가 요구 사항이 아무리 지랄같더라도 그대로 다 해 줍니다.
애인 사이에서는 그냥 툭 던지는 한마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엄청난 설득력을 가집니다.
논리적이기는커녕.... 미친 요구사항이라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저별은 내별.... 저기 저별은 당신 별...." 어쩌구 해도 감동을 먹지 않습니까?
어떤 별이고 거기에는 소유권이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우습기 짝이 없는 주장입니다.
그런데도 애인의 그 한마디에 평생동안 그 별은 내 별이 되잖습니까?
논리의 면에서는 개떡같아도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는 세 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經驗)과 감동(感動)과 논리(論理)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넓은 들이나 바다에서 보면 평평해 "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게 바로 사람들의 경험(經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설득시켰을까요?
항구에 들어오는 큰 배를 "보면," 수평선 멀리에서 우선 돛대가 보이고,
그 다음에 조금씩 조금씩 선체가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경험으로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인공위성 사진을 보여 주면 되기 때문에.... 따로 설득할 필요조차 없지만요....

감동(感動)먹은 사람들은 이미 설득이 된 것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어도 감정이 회동을 해서 남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십대 아이들에게 "왜 서태지가 좋으냐?"고 물었다고 칩시다.
십중팔구 대답은 "그냥요...."이겠지요?
음악 평론가라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당시 한국 사회 상황이 배경이 어떻고...
화성이 어떻고.... 리듬은 어디서 가져왔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겠지만 말입니다.

또 앞의 애인들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앞서면...
경험이고 나발이고.... 이론이고 나발이고가 다 소용없습니다.
그래도 아주 아주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론(理論).... 혹은 논리(論理).... 도 설득의 중요한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입"시키려고 할 때에는....
몽둥이라든지.... 대학입시라든지... 하는 공포감(感)도 설득의 수단이겠습니다만,
원래는 이론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이 학교의 목적이요 방법입니다.
물론 어떤 선생님... 교수님들은.... 인격적인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이론이나 논리적인 가르침을 마지못해(?) 등한히 하는 경우도 많지만요.

다시 "주장1"과 "주장2 (혹은 반주장1)"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믿음"을 "설득당하기"로 본다면....
"이론적... 논리적으로 따지기"도 믿음을 얻는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주장1이 꼭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주장1을 뻥 튀겨가지고서
"믿음이란 이론적... 논리적으로 따져야'만'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논리학에서의 "참"과 "거짓"에서 후자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장2도 그다지 옳은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논리적... 이론적으로 따져서 생기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주장1과 주장2는 모두 부족한 주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믿음은 경험(經驗), 혹은 감동(感動), 혹은 논리(論理)에 의해서 생길 수 있으며....
대개의 경우는 그 세 가지의 이러저러한 조합을 따라서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지지 말고.... 그냥 믿기만 하라"는 사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설픈 설명(說明)으로 현혹하는 약장수들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아주 대범한 사기군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 말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너무 심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보"입니다. 성능좋은 펜티움 쓰리 컴퓨터를 사다가는
간장 항아리 덮개로 사용하는 사람과 별 다름이 없으니까요.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머리를 주시고....
이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주셨겠습니까?
"좀 잘 쓰라"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잘 쓰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데에도 훨씬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까.... 주신 것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12/24 Re: 첫 사랑의 짜릿함. 13
무조건 믿으라는 논리를 경계하라고 하셨는데...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남 녀가 서로 만나서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하게 된 경우 우리는 여기에서 논리나 이론이 개입할 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의 사랑에서는 순수함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대개는 겉모양 생김새만으로, 또는 풍기는 분위기 로만 그냥 끌려 들어가는 케이스입니다.

반대로 남자의 장래성, 집안, 학벌, 인물 등을 보고 계산하여 손해가 없겠다 싶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가지 경우에 단 장 단점이 있습니다.

첫째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진짜 인간성이라든지 성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해서 나중에 그사람의 인간적인 단점이 차차로 나타남으로 실망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두번째경우에는 물리적인 조건만 극도로 따져서 기본이 되는 사랑이라든지 소위 전기가 통한다는 감정 따위가 도외시된채 결혼 함으로 더욱 심각한 폐해를 겪게 됩니다.

지금 세상은 두번째 경우의 결혼을 권장하고 있고 어른들도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에는 첫번째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목사라든지 신부라든지 하는 인간을 기준으로 기독교를 생각 하니까 잘못하면 속는다든지 따져봐야 겠다든지 하는 논리가 나오고 있는데, 자동차를 살때 차의 성능만 믿으면 되지 운전자의 자질 까지 따질 필요가 있을 까요 ?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시골의 무식한 할머니 들이 죽음이 가까워지니까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야 겠다는 본능적인 소망 때문에 교회를 나가시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탁하여 평안한 삶의 여정을 보내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이론이라든지 논리라든지 하는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장난질 같습니다.
그 분들은 논리라든지 이론이라든지 그런것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논리나 이론에 빠삭한 이론가 들 보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 할 사람 있습니까 ?
그 할머니들은 그저 이론적인 설득으로 믿은 것이 아니고 죽은후의 영혼의 구원이라는 단순 명쾌한 말 한마디로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바가 이것이다 싶으니까 믿게 되신 것이지요.

저 자신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이 제가 사기를 당하여 집을 빼앗기고 빚을 뒤집어 썼을때 그놈을 죽이겠다고 칼을 가지고 뛰처 나가려는 나를 마누라가 붙잡고 "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한 그 사람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그를 미워하지 않게 붙둘어 주소서 " 하는 기도소리를 듣고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누라가 이론가도 아니고 논리가 정연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마누라의 기도가 옳은 길 이라는 판단은 할 수 있었든 사람입니다.
어렸을때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으니까요.

그후로 황량한 들판에서 내 편이라고는 없이 처절하게 사투를 했습니다.
형제들도 나를 다 멀리 하여서 형제들과도 5년여동안 서로 왕래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주시든 아니든 나는 하나님이 내 편이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때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면 마음이 풀어지고, 이제는 가족이 다 죽어야 할 때라고 생각 할때도 가족이 모두 모여서 기도를 하면 새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렇게 7-8년을 시련을 겪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지금은 안정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련을 일부러 겪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저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오늘날 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내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우선 겸손해 집니다.
내가 사업에서 큰 돈을 벌어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돈을 벌게 해 주셨다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게 됩니다.
내가 잘나서 돈 벌었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게 됩니다.

제 자신 이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별로 필요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배규태

 

 

12/29 Re:그러니까.... 근본 vs 다양 ? 4
님의 지적은 참 재미있습니다.
근본주의와 다원주의는 사실 언어적 대립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문화에 대한 호칭입니다.
근본주의는 성경 무오설, 예수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다른 문화와 전통은 무지이거나 사탄이다.
뭐 이런 형태를 통칭하여 근본주의라고 부르지요
중세교회의 전통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던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근본을 모두 부정하여 신의 자리에 인간, 성서의 자리에 지성, 구원이란 고상한 목표 대신 현실적 행복에 집중했습니다.
그런 경향에 반대한 것이 유명한 신정통주의자들이었고 그 보다 더 우측에 위치한 부류가 근본주의라는 형태였습니다.

이 때 까지 하나님과 인간 지성과 믿음 구원과 행복 뭐 이런 부류의 논쟁이 쟁점이었는데,
동양 특히 불교에 눈을 뜨기 시작한 사람들이 근본적인 믿음과 하나님 이해에 대한 다른 견해를 만난 것이지요.

이슬람과의 관계는 알라와 야훼의 대립관계를 통해서
십자군을 일으키거나 다른 부족신쯤으로 처리하면 별 문제 없었지만
불교에선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근본적인 '다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다름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 할 수 없게 되어 '다원'이란 언어를 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우월감이 근원과 지엽을 몽땅 사유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름"의 표현은 다원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지요.
알라나 불교의 니르바나와 같은 개념이 기독교의 신과 같은 개념이라고 얘기하면 받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아예 다른 것에서 시작하여 대화를 시작해야지요.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신관과 기독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동양의 전통중 가장 체계화된 불교와 대화를 위한 창구였습니다.
다른 것을 다르다하고 같은 것을 같다고 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것이지요.

제가 알고 있는 한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부정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상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기독교적인 이해를 갖고 살 수 있고 불교적인 이해를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야훼의 자녀 중 사마리아와 유대의 전통 모압의 전통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지요.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상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좁은 품으로 다 감싸 안으려는 노력이 이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불가능하지요.
성경도 하나님의 인간 사랑 혹 구원 혹 해방을 위한 충분한 기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것이라는 지위는 포기를 해야하니 좀처럼 다원주의를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나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다원 주의라는 말은 서로 '다름'을 강조하는 나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다원주의라는 말이 갖는 서양식 오류입니다.
동양적으로 다원주의를 번역하려면 님의 말씀처럼 일원주의라고 해야했습니다. 모두가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라고 말입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마호멧이든 신생종교든 말입니다.

오로지 그 귀한 가치는 믿음있는 사람의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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