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예수와 안티예수

불꽃목양에 빠져라...???

주방보조 2006. 10. 2. 16:46

  <제191호> 불꽃목양에 빠져라...??? 2001년 10월 02일
지지난주에 독자분중 어떤분의 편지를 받고
지난주엔 비노바 바베를 다 읽어야 했고...또 다른 일 할 것이 좀 있어서 한주간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에 강변역의 두란노서점을 방문하여
독자분이 물으셨던 김남준 목사가 쓴 두권의 책을 샀습니다.
하나는 불꽃목양에 빠져라이고...다른 하나는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입니다.책값도 만만치 않더군요^^

어제 오전중엔 전화로 미국의 어머니께 온가족이 추석인사를 드리고 오후엔 처가식구들과 함께 작은 처남의 집에서 예배드리고 아이들의 작은 음악회를 비롯하여...바둑도 두고 컴퓨터게임도 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 평소 30분이면 족한 꽉 막힌 동이로를 두시간이나 걸려서 질끈 질끈(브레이크밟는...) 거리며 돌아와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불꽃목양에 빠져라...라는 책을 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서론밖에 읽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서론을 읽고 더 이상 이 책을 읽을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그러나 이번주중에 다 읽어내기는 할 것입니다...돈이 아까워서라도...)

"목양없이 성도는 없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서문의 제목입니다.

핵심되는 구절을 한 두개 뽑아 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알아서 신앙생활하도록 부르시지 아니하고
목양받으며 그리스도를 알아가도록 경륜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가 가장 훌륭한 신자라 할지라도 신령한 목회자의 목양없이는 성도로 살 수 없다'"

...

이 책의 저자가 앞으로 전개되는 본문중에서 저를 어떻게 설득해 갈지 기대가 충만합니다만...
저는 이것으로 족하다는 ... 편견?을 이미 가져버렸습니다.

저는 교회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각각의 지체이다. 목사도 지체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만으로는 ... 제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관과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

경륜이란 사전적 정의는 크게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고 적게는 포부를 가지고 어떤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저자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목사없이는 성도없다는 틀안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뜻이됩니다.

매우 훌륭한 신자라도 목양없이는 성도로 살 수 없다함으로서 신자와 성도를 구분하는데...신자는 말그대로 믿는자이고 성도라함은 신자를 높이거나 가톨릭에서처럼 공력이 높은 신자를 말하는 말로서 매우훌륭한 신자???입니다. 이말은 이렇게 됩니다 성도라도 목양없이는 성도로 살 수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목양하는 목사 없이는
제아무리 훌륭하고 거룩하고 착하게 사는 성도라도 성도로 인정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좀 더 과격하고 짧게 말하면
교회에선 목사없인 국물도 없다!!...이런 공갈과 다름아닌 것입니다.

...

어쩌면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적 대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목사를 구별하고 높여서 ... 언로?를 막고 가톨릭처럼 성직자를 신비화하여 종교적 색체를 강렬하게 함으로써...교회의 쇠락을 막아보려는 고육책...말입니다.

목양없이 성도없다...???

...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절반의 진리는 거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의 "목양없이 성도없다"는 이 정의를 그렇게 봅니다.

목양이 없어도...얼마든지 훌륭한 성도는 있을 수 있습니다. 목양은 돕는 것이지 ... 지배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합니다.

 

 

10/02 펀글...김남준목사님의 간증 27
김남준 목사 (내가 만난 하나님)


들어가는 말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망설여지는 것은 자칫하면 성령의 체험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그것을 무슨 자기의 투쟁과 노력을 통해 얻어냈다는 성공수기나 무용담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수기들을 읽으며 감탄하는 것이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이 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 비쳐 보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경험에 관한 기록이 때로는 나의 신앙과 영적 생활 전반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유익이 있으리라 본다. 글을 쓰기 전에,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 무엇인가 나의 체험을 부풀리는 서술은 아닌지를 몇 번씩 되짚으며 진실만을 기록하고자 노력하였다. 여러 가지 체험들이 여러 번 있었으나 내 기억 속에 매우 뚜렷한 인상을 주었거나 부인하기 어려운 지속적인 영향을 준 체험을 네 가지 정도 간추려서 정리하였다.

체험1: 하나님의 사랑

세례를 받고 다섯해 정도 지난 어느 가을이었다. 가정에 매우 절박한 기도제목이 있었고 그때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새벽시간에 집근처에 있는 교회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절박한 기도제목인지라 뜻을 세우고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일주일 정도 흐른 어느 날이었다.


새벽기도에 왔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예배당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그 새벽 시간에 내 마음은 한없이 가난하여졌다. 의자에서도 내려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고요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간절한 묵상이었다. 그때 뜨거운 한 덩어리의 불이 마치 유성처럼 강단을 떠나 나를 향해 천천히 날아왔다. 그리고 그때 뜨거운 한 덩어리의 불은 머리에 부어졌다. 그 순간 성령의 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하였다. 직감적으로 커다란 은사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소원이 있다면 주님 닮아 온전해 지는 것이었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 안에 언제까지나 머물고 싶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 싶었고, 소망이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소유 삼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한없이 울었다. 아침 햇살이 교회당의 낡은 문에 가득할 때까지 한없이 울었다. 한편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그 앞에 마주할 수 없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인하여, 그런 나를 넘치도록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후로도 비슷한 경험을 몇 차례 더 가졌지만 그 체험은 언제나 나에게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체험2: 영원에의 자각

두번째부터 뚜렷하게 기억나는 체험은 모두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한 체험이었다. 여러 번 있었지만-사실 그러한 체험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나의 집필과 설교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이다-그 중 두 경우만 예를 들어 본다.

언젠가 나를 깊은 각성 속으로 데려간 말씀은 이사야40장이었다. 특별히 그중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반부를 다리로 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6-7).

그때 이 말씀을 보면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초라하고 허무한 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당시 6개월 동안을 밤마다 침상에서 홀로 울었다. 침묵 가운데 흐르는 끝없는 우주 공간과 두 영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매우 짧은 순간 잠시 살다가 가도록 보냄을 받은 인생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게 창조된 자신을 바라보며 울었다.

누가 무엇이라고 위로하든지 이전에 내가 알던 모든 인생에 대한 알량한 지식들은 마치 죽음의 전쟁을 눈 앞에 두고 마셨다는 중공군 호주머니의 배갈(毒酒)과 같은 것이었으며, 부끄러운 춤판을 앞두고 댄서들이 맞곤 한다는 마약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삶의 허무함 이상에 대한 각성으로 저를 데려 갔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것은 이미 나만의 고백이 아니었다.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 나처럼, 하나님을 아는 인식에 있어서 단지 천박할 뿐인 사람과는 비교될 수 없겠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지 풀이라"고 외치도록 분부를 받았을 때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허무를 직시하고 나면서부터 인생을 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한동안 매일 죽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서가 아니라 사는 동안에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체험3: 조국교회와 기도

어느 날 밤이었다. 몸이 불편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아 신약 성경을 펼쳤다. 시계는 밤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전에 읽던 대로 누가복음을 읽어 갔다. 다음 성경 구절을 읽는 동안, 저는 온몸이 감전되는 것 같은 전율을 경험 하였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19:41-48).

반복해서 같은 부분을 읽어 가는 가운데 성경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는 기도 신학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놓아 우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가 조국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함께 오버랩(overlap)되어 다가왔다. 성경을 읽다가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과 아픔을 인하여 견딜 수 없는 통곡으로 울었다. 한편으로는 거룩하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인하여,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모르는 채 영적인 어두움에 잠겨 있는 조국교회를 인하여...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그 어두움을 교회에 더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조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 교회들과 함께 준엄한 심판을 당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달은 내용들을 몇 자 노트에 적고 나니 시계는 이튿날 아침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한 체험이 단 한 번은 아니었지만, 그 때 그 말씀 체험이 저로 하여금 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때는 깊은 기도 속에서 살 때도 있었고 기도에 덜 헌신될 때도 있었지만 기도에 대한 기쁜 의무감과 조국교회에 대한 가슴저미는 애정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나의 소원은 유명한 작가나 설교자가 되기 보다도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로부터 특별히 풍부한 눈물 속에서 섬기게 하셨다. 차를 몰고 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하셨고, 이 도시가 좋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자신의 옥체를 깨뜨려 우리 위해 버리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슬픔이 엄습하였다.

아무 것도 나쁜 일 하신 적이 없으신 그분이 우리에게 그토록 생명 주기를 원하시는데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거절하는 당시 저의 설교를 듣던 회중들을 아울러 생각하며 악마의 손에 의하여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온 영혼에 밀려왔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로수 변에 차를 세우고 핸들을 붙든 채 여러 시간 동안 목놓아 울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 이상으로 슬픔을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가슴 시리도록 아팠다.

그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이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 아니라 이 시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느꼈다. 세상에는 아무도 위로할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격렬한 아픔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내 안에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때의 기도는 마치 주님 자신이 내 안에 들어 오셔서 나를 껍질로 사용하시고 당신의 기도를 마치신 후에는 내 안에서 빠져나가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였다.

목놓아 울면서 나는 오직 두 가지 소원에 불탔습니다. 이렇게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평생 주님과 함께 나누어 지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두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을 다 태워서 산화하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의 울음소리를 들을까 봐 크게 틀어 놓은 카오디오에서는 마침 영화 미션(Mission)의 주제가 중 한 곡인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지상에 임한 하늘 나라(On the earth as it is in heaven)"가 들려 오고 있었다.

체험4: 설교의 부흥

어느 해 여름밤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 어느 날 설교단에 오르는 순간 나의 마음과 전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며, 하나님은 일찌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일을 이 한 편의 설교를 통하여 하실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리고 나는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 장소 바깥에서 배회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들어오도록 강권하였다. 그리고 예배 순서를 따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설교할 본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기록된 누가복음19장41절부터 44절까지의 본문이었다.

설교는 한 시간 남짓 계속되었고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무엇인가 만지면 곧 터질 것 같은 경건한 슬픔이 교회당을 크게 엄습하였다.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에 여기저기서 억제된 흐느낌이, 약간 어두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마치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하여 복받치는 설움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장소는 깊은 산중이었고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밖에는 폭우와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설교할 때 순간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광음이 들렸고 먼 산 기슭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빛이 교회당에 안에 번뜩이면서 설교는 절정을 향하여 치달았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성령께서 그같은 자연 환경을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설교가 끝나마자 마치 총에 맞은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은 비통한 부르짖음이 온 교회당 안에 가득하였고, 그 부르짖음이 어찌나 극도에 달했는지 집회하는 예배당의 천정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고요한 밤하늘에 이따금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타고 골골이 휘돌아 나갔다. 사람들은 설교 중에 극심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하였다. 영적으로 눌린 자들을 드러내시고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신을 가리켜 "죄악 덩어리"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패배감은 아기 예수에 대한 시므온의 예언을 생각나게 하였다. 이 복된 패배감은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저녁 일곱시 삼십분 경에 시작된 예배는 이튿날 새벽 한 시 반이 되었는데도 끝나지 아니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어선 채 벽을 붙들고 서서 앉는 것도 잃어버린 채 두시간이 넘도록 폭포수 같은 눈물로 회개하였다. 성령은 집회의 인도자를 밀치시고 스스로 예배를 주관하셨다. 성령은 임하셨고 죄인들의 마음을 녹이셨으며 회개가 끝나자 성령의 각양 은사들은 회중을 뒤덮었다. 그것은 분명히 은혜 체험 이상의 사건이었다.

회중 가운데 괄목할 만한 변화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로서 그들 앞에서 느끼는 저의 느낌은 목석 앞에서 설교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단지 귀를 기울일 뿐 아무런 느낌도 설교를 통하여 기대하지 아니하였다. 후일 그들은 저의 말씀 증거를 설교가 아니라 단지 소리로 느꼈다고 술회하며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후회하였다.

그런 놀라운 일이 있고 난 후에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은 예배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외에 주일을 통하여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짧으면 한 시간 반, 혹은 길면 약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나의 설교를 마음을 다하여 경청하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모습은 마치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 같았다. 회중석에서는, 설교가 시작되어서 끝날 때까지 추호의 미동(微動)도 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그토록 사모하며, 말씀을 듣기 위하여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회중들 앞에 설교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은 한 번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몇 주, 혹은 몇 년씩이나, 아니 지금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그 설교를 기억하고 그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뛰어난 영적인 축복을 누렸던 탁월한 시기는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은 마치 하늘 나라가 지상에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그후 헤아릴 수 없는 날 동안 설교했지만, 같은 일의 일어남을 보지 못하였다. 후일에야 그것이 참된 영적 부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 없는 고통과 대적이 둘러 싸고 있었으나 제 인생 어느 때에도 그렇게 행복한 때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잠자는 교회들에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거룩의 회복을 주시도록 설교하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

깨달은 교훈들 돌이켜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 신학공부를 하기 이전에 평신도로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섬길 때부터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양떼들의 뚜렷한 회심 같은 것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성령의 풍성한 역사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오면서 자신을 향하여 정리되는 생각이 몇있다.

첫째로 그것은 우선 성령의 체험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과 기쁨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순결해 지고 싶고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본 받고 싶어지고 더욱 친밀 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매우 친밀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면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는 요구가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깊은 기도 생활을 사모하게 되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갖는 것은 자신을 견고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도 매우 극적이고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의 신앙이 체험의 분량만큼 견고하거나 성결하지 못한 것이 늘 의문이었다. 후일 깨닫게 된 바에 의하면 깊이 있는 영적 체험이 그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는 그 체험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분명한 이해를 통하여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청교도들에게는 신령한 은혜 체험과 불건전한 영적 체험의 시금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나의 경우 첫 번째 예시한 체험은 그렇지 못했으나 두 번째 이후의 체험은 체험할 때 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정신을 이해하는 데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즉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그 성경 본문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 모호하기만 하였던 성경의 진리들이 조목조목 연결을 이루며 커다란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성경 전체의 맥"을 향하여 개안(開眼)을 주었다. 후일 성령의 체험이 가져다 주는 중요한 효과를 바로 성경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시는 것이라는 청교도 신학자 죤 오웬(J. Owen)의 논지를 확인하고 매우 기뻤다.

맺는 말

결국 모든 성령 체험이 말씀을 향하여 열린 눈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또한 풍부한 말씀을 가진 설교사역을 가능하게 하고 거룩하고 견고한 삶을 가져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부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내가 늘 좋아하는 한 마디를 덧 붙인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의 글과 언어는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체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말과 글 속에서 숨긴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 체취를 흉내내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말씀 사역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10/02 Re:저도 김목사님책을 읽었슴니다./...^^ 29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몇군데 스킵하며 읽었는 데(정독할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서^^...사실은 게을러서이겠죠)
선입견을 가지고서인지...삐딱하게만 눈에 들어 옵니다.
독립적인 성도..를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아니 성도를 독립시킬 마음이 전혀 없는 이분의 주장이...정말 성경적일까요? 물론 본인은 성경적이라고 앞뒤전후 두루 글자를 박아놓으셨지만요...
목사가 없으면 "영적인 공급이 끊어진다"는 상상력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에...또
17,8세기의 문맹율과 지금의 시대를 비교하는 것 하나만으로도...목사직의 위치를 동일화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저는...
원필

 

: 저도 오래전에 김목사님의 책을 두권정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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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보기엔 김남준 목사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왜 오늘날 현대에는 생생한 예배의 체험이 없는가, 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에 대한 인식과 거대한 압도함이 없는가, 왜 사람들이 예배를 통하여 도덕적으로 더 거룩해지지 못하는가, 왜 현대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죄인됨에 대한 인식이 그리도 희박한가.... 하는 것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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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런 점에서 17,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다소는 근본주의적이기도 한 청교도 신앙은 김남준 목사님이 발견한 이상향인 것 같았슴니다. (시간적으로 반대일수도 있겠지요. 먼저 이상향을 발견하고 거기서 문제의식이 도출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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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낙스,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리차드 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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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분들의 저서를 훑어보면
: 리차드 백스터의 '선한 목자'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등만 보아도 김목사님이 왜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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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청교도 설교자들은 당시 초기 미국의 엄격한 신앙적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중예정, 죄의 자복과 회개, 가르치는 장로의 중요성의 강조... 등등에서요..)
: 그리고 이런 설교자들의 영향력은 소위 영적 대각성운동이란 것을 통해서 나타났슴니다.
:
: 제가 보기엔 김목사님은 그 영적 대각성 운동을 신앙적 부흥의 표본으로 보고 계십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울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었다고 함니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이 설교자들의 교리이고, 그 통로가 되는 것은 이들의 설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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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점에서 김남준 목사님은, 그리고 그 설교자들은 설교자의 영성과 설교야말로 신도들을 그러한 체험의 세계로 인도하는지, 그렇지 못한지의 관건이 된다고 보고 계신 듯 함니다.
:
: 이궁...이건 제가 생각한 김남준목사님에 대한 생각이구요...요즘 자꾸 토를 답니다. 추석인데 할 일이 엄네요...킁킁... ㅋㅋ (찾아보면 해야 할 선한 일은 많으나... 무지 게으른...)
:
: 그래도 종종 김목사님과 같은 스타일은 마음은 빠지고 머리만 있는 저같은 넘에겐 필요하겠다... 하는 생각이 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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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17,18세기 청교도들이 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칼빈주의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으로 환원한 것은 아닌지 하는 회의가 언제부터인가 들었지만 말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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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것도 죄에 대한 무지이고, 성령에 대한 훼방은 아닐지 모르겠군요...ㅡ.ㅡ 킁킁..
:
: 벌써 추석이 지났네요~~~~
: 그래도 공휴일이 이틀이나 남았네여~~~~^0^ (아싸!)
:
: 즐겁게 보내세여~~~

유샛다운앳더라이네스

 

 

10/03 Re:교만과 독선입니다./ 동감입니다. 17

목사님이 어떤 분이 오시더라도
복음안에서 변함이 없는 교회...
어느 교회에 다니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변함이 없는 그리스도인
...이것이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지향점이 되어야...우리나라 교회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내용은 바른 소리로 가득했지만
서문의 전제가 저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
: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오늘날 유럽교회들은 점점 비어가고 있습니다.
: 예배당 안에는 더 이상 교인이 없다시피합니다.
: 그러나 유럽사회와 가정은 우리 나라의 교회보다 더 기독교적이며,
: 더 도덕적이고 더 사랑이 충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
: 오랜 세월동안 교회밖에서 자신의 유익만을 꾀하지 않고
: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하고 봉사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즉, 목회자의 목양에 감동만 받았던 성도가 아니라
: 생활에서 실천한 성도가 많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 지금 유럽은 독립적인 크리스챤이 많은 것입니다.
:
: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기가 막힙니다.
: 전 국민의 25%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부정과 불의가 난무하지요.
: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 교회에서는 목회자에 순응하면서 거룩한 듯 하지만 교회밖에서는
: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 자립하지 못한 크리스챤이 많은 것입니다.
: 교회에서는 갓난아기 이상으로 육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 만일 목회자가 목회직만이 성직이라고 말한다면,
: 그것은 성직자의 교만이요 독선입니다.
: 반대로 목회자가 아닌 크리스챤이 목회직만이 성직이라고 부른다면,
: 그것은 크리스챤으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
: 교인들을 바르게 이끌어야함은 목회자의 의무요 책임이지만
: 성도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자립력을 키워주지 않고
: 이런 저런 기복과 신비주의와 협박으로 군림하려 한다면
: 이는 아무리 고심해봐도 교만과 독선이라는 생각입니다.
:
: 무엇보다 비성경적입니다.
:

너구리

 

 

10/03 Re:펀글...김남준목사님의 간증// 맞습니다. 20
: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망설여지는 것은 자칫하면 성령의 체험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그것을 무슨 자기의 투쟁과 노력을 통해 얻어냈다는 성공수기나 무용담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맞습니다. 제 자랑은 아닙니다만..다음엔 자랑을 합니다.
성공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수기들을 읽으며 감탄하는 것이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이 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 맞습니다. 제게는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
===============================================

기적간증... 성령체험 간증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진실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자칫 가장 쉬운 설득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러한 쉬운 설득은 거쳐야 할 단계를 넘어서게 되므로,
믿는자에겐 신비주의를...안 믿는자에겐 괴리감을 줄수도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그야말로 예수님 입장에서 피력하되
상식과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너구리

 

 

10/03 Re:열린교회에 다니는 이곳칼럼의 독자 입니다./고맙습니다^^ 25
자신이 즐겁게 다니는 교회가 도마에 오르면 좀 기분 상하기 쉬운 일인데...차분하게 님의 생각을 적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받은 메일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

"목양관계"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목양관계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성직주의적 경향과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평신도의 의미가 단순히 사역의 대상
전락되는 느낌...(누구는 아주 심한 경우 이런걸 '평신도의 병신도화'라고
표현을 했더군요..열린교회를 향한 발언은 아니었구요..
요즈음의 교회에 어떠한 모습을 적나라하고 쫌 심하게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저 정도는 아니지만...여하튼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적어도 현재의 저에게는.

성의있는 답변을 기다려도 되겠지요??

김남준 목사님의 목양에 관한 생각들은 '불꽃 목양에 빠져라'(규장 or 두란노)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일단... 개인적으로 어떻게 평소에 생각해 오셨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고....

이단으로는!^^ 책을 일독하신 후의 느낀점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기 그지
없을 듯 합니다....

====================================
저는 목양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할 의무감^^으로 8500원이나하는 그 불꽃목회와 6500원짜리 예배의 감격을 샀습니다.
그리고 목양관계에 대한 서문의 내용을 읽고...근본적인 의식의 다름을 느꼈습니다. 정독은 아니지만 스킵해서 대충 다 읽었는 데(두권다)...조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열정은 이해하고도 남을 만 했구요...그것의 대안이 ... 매우 가톨릭화하는 것이라는 것이 제 느낌이었습니다.
목회자든 예배든...말입니다. 성속의 구분이라든가 예배의 형식이라든가에 대한 의견들에서 느낀 것입니다.
....

저는 님이 이 불꽃목양에...를 읽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님의 의견을 ... 말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열린교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열린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공개적으로 책을 통해...공표한...목양관계에 대한 것에 한정해서 입니다.

그것이 어찌 목사들만 읽을 책이겠습니까?...그렇죠?
원필

: 지난2월...
: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후 교회를 놓고 기도하던중..우연히 잘아는자매의이삿짐을 나르던중 열린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에 관하여 소문만 들었던터라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
: 지금껏 열린교회 김남준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양육받고(어쩔수없이 주일에 지방에 가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있습니다........................................
: 지금껏 김남준 목사님께서 쓰신 책들..
: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불꽃신앙에 빠져라*기도의....*등등...그리고 여러차례의 설교말씀과 말씀테잎...
: 그래서 김남준 목사님의 신학적 사상에 대해 대충은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곳 칼럼에 올라온 글이 유독 눈이 띄게 되는군요..^^
:
: 김남준 목사님을 향한 이러저러한 생각과 글들...일단 그런 말은 김남준목사님(책의 저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목회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신앙이 이상한 곳으로 흐르고있고 그런 잘못된 길을 제대로 지적하는(옳은소리를 하는)곳이 없음에 대한 한탄이 아닌가 싶습니다.
:
: 그저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나름대로 열린교회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기독교적인것에 관한 수많은 가르침들을 교회에서는 가르치지만 (저또한 그런것들을 배워왔지만...)참된 복음을 전하는...그리고 그런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하는 곳은 그리 많치가 않은것 같습니다.
:
: 그러니까..
: 제가 이곳 칼럼의 글들을 다 읽어보지 않고 몇몇의 글만 읽고나서 이곳 칼럼지기의 생각을 비판한다면 이는 저의 또다른 교만과 독선이 이겠지요.
:
: "불꽃 목양에 빠져라"의 서문에 나온 글에 대한 너무많은 선입견을 갖지 마시구요. 그냥 정독..주~~욱 해보세요.
: (참고로 그책은 목회자들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 그리고 김남준 목사님에 관한 여러가지 책들이나 말씀 테잎, (열린교회홈페이지의 동영상 말씀)등을 통해 말씀을 듣다보면 어느정도의 선입견을 버릴수 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 성도는 성도로써의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없는 유리하는 양떼를 보며 늘 가슴아파했던 이들이 있습니다.우리는 누군가의(주님이 되어야 겠지요)지도를 받아야 하고 그러한 가르침에 순종을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 (순종을 위한 순종의 강요가 아닌 말씀에 대한 순종 말입니다.)
: .아무튼...자세한 글들은 자주 올리겠습니다.그럼 더 길어질까봐...이만..
데이빗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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