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6학년 5월 ...
60년대 말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 저의 가족은 당시 골치 아픈 수많은 서울 전입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두 학교에서 전학을 거부 당하고 세번째 학교인 소의 국민학교에서 어머니는 모든 것을 건 투쟁을 하셨습니다. 교무실에서 당신의 과거 교사 경력을 말씀하시며 소리치시고 그리고 애걸하며 우시고 ... 겨우 승락을 받아내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당시로는 정말 큰 돈인 매월 5천원이나 되는 기부금?을 봉투에 넣어 담임에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우스운 것이 이 담임께서 3년 뒤 혜화국민학교에서 제 사촌동생의 6학년 담임이기도 하셨는데...외삼촌은 고교 교사이고 외숙모는 약국을 하여 잘 사는 이 외사촌 여동생은 매월 2천원을 갖다 바쳤는데...무척 사랑을 받았다고, 좋은 선생님 운운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 더하여 저는 그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하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1등부터 25등까지는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참 이상한 과외...저는 학교가 정해지지 않아서 거의 반 달을 놀고 치룬 첫 시험에서 100여명중 19등을 하였거든요. 아버지는 돈을 거의 벌지 못하는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더욱 불쌍하여 거의 매일 아파 신음을 흘리며 누워계셔야 했던 우리집은 외할머니께서 가져다 주시는 주머니돈과 6개월마다 이사를 하면서 점점 더 싼 전세집으로 옮겨가면서 그 차액으로 근근히 살아갈 때였습니다. 어린 본능에 이런 과외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사무쳤었나 봅니다. 겁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부르러 선생님이 보낸 아이에게 아주 못됐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딴 것 안한다, 너같은 새끼들이나 실컷 해!' 그때부터 선생님은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저는 점점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끼워주지 않아서 다른 반에게 지고 있던 피구ㅡ게임의 결과를 실력이 좋으면서 왜 구경만 했냐고...저만 뺨을 세게 여러대 맞아 땅바닥에 널부러짐으로 감내해야 했고 엎드려 손걸래로 복도를 딲고 있던 제 엉덩이를 발로 차서 몇 바퀴 구르게 만들었던 것도 그 선생님의 구둣발이었던 것이고 점심 도시락이 없어 홀로 운동장을 보고 앉아 있는 제게 박카스를 사오게 하고 뛰어가는 제 뒤에서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든 것도 그 선생님의 말솜씨였을 것을 보면 말입니다. 숙제는 그때부터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이 버릇이 꽤 오래 가서 고3이 되고나서야 숙제 없음 때문에 환호하는 촌극을 연출했지요.) 노트는 앞 몇 페이지를 끄적이고 돌돌 말려버렸고 가방은 끈이 끊어진 채 옆구리에 끼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까불고 건방진 녀석들에게 화장실 뒤로 나오라 거기서 붙자고 시비를 걸어 대곤 하였습니다.(실제로 붙은 녀석은 없었습니다.) 성적은 바닥을 향해 급속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100등에 가까이 나아갔지요. 아버지는 서울에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는 아프시므로 신경 쓸 수 없으셨고 누나는 자기 일로 바빴습니다. 이런 가운데 저의 국민학교 6학년의 나날들은 흘러갔습니다. ... 학교에서 졸업을 앞두고 학부모 면담이 있었나 봅니다. 어머니께서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오셔서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집에 들어서자 제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너는 커서 깡패밖에 될 것이 없다 하셨다" 그리고 우셨습니다. ... 이것이 지금 중 1인 충신이 아버지인 저의 과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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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선생님들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답글
물론 존경스러운 선생님도 선생님을 존경하는 제자도 예전에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인데 선생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상처를 받았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 지금도 살아계신다면...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려서 환경이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힘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아빠에 비하면 충신이는 얼마나 귀엽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어찌보면 부족함 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사진속의 충신이가 더더욱 믿음직스럽습니다. -
휴..
답글
저의 국민학교 시절에 고통스러웠던 기억들과 오버랩 되어
살짝 슬퍼지려 합니다.
이어질 충신 아버님의 과거 얘기가.. 궁금하네요. ^^ -
ㅜ.ㅜ
답글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요...
국민학교 4학년때 친한친구(과수원집딸)
따라서 담임의 과외 공부에 멋모르고 참여 하게되었는데...친구가 자꾸같이가자고 졸라서 가게됐죠.
그이후에 그아이들만 따로 모아놓고 과외비
이야기 할때 앗차 싶었지요...
그리고 고민 고민하다가 선생님얼굴 제대로 못보고...
그과외팀에서 자연 탈락 하고 어정쩡한 학교생활이
저에게는 ?은 상처가 되었네요...
가끔씩 생각합니다...
그때 그한달 과외비를 지금이라도 찾아서 드려야 하나?
재미있는것은 과외시간에 시험문제 다가르쳐 주어 제가 너무 놀랐다는거...
그 과외 끝까지 했다면...
아마 제인생은 틀려 졌을수도....
근데... 왜 눈물이 나지요?
책임지세요....
ㅎㅎ
그때 같이 과외 했던 그국민학교 친구들 ...
그렇게 문제 갈켜주고..답알려주는데..
공부를 못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주방보조2006.09.30 19:50
국민학교때도 그랬고...중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과외를 하셨습니다. 영 수 선생님들은 팀을 짜서 새벽까지... 그리고 촌지도 분명히 많이들 챙기셨고요.
지금의 전교조라는 단체는...어쩌면 당시의 스승들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비롯된 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내신이 비중을 더해가는 요즘...저는 은근히 옛기억이 걱정으로 또는 그 가능성에 대한 분통으로 나타납니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 못해서 분통이 막연할 뿐이죠.
혼타가던 시대가 만들어낸 ... 부조리였을 것입니다. 일부 그런 사명을 잃은 이들의 마음이 행복할 리도 없었을 것이구요,
거룩한 스승을 돈벌이로 스스로 전락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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