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성경에 대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구원 (1) (하이텔 예수클럽 펌)

주방보조 2004. 6. 17. 20:47
[구원]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구원을 받았는가?
김원필(jncwkk)2004/06/14 21:37조회 : 17

잘 아는 분이

자기 교회에서 구역예배때에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갑론을박이 있었다는데

 

구원받았다와 못받았다 그리고 모른다..이 셋이 충돌하였답니다.

 

...

 

저는 평소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구원받지 못할것같은 짓을 했으나

구원받았으면 좋겟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은 여부를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어떤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영원한 심판을 판단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바를 결론으로 추론하는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오직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것만을 가지고 판단하되

우리에게 알 수 없게 하신 것은 "모른다"로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고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예수를 믿었으면 그 악한 행위에도불구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예수를 안믿었으면 그들이 교회에 바친 반쪽재산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없으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구원은 "모른다"가 맞습니다.

 

...혹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들려주십시오.,

 

 

[구원]특수한 상황의 이해

이인규(dsmedic)2004/06/15 10:23조회 : 20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토론을 하기 이전에 몇가지 정리해야할 문제점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그들이 자기 재산의 일부를 감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구절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시켜, 교회에 물질을 다 바치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고 주장하는 곳이 바로 사이비집단들의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조금 내면 죽음을 당하지는 않으며, 구원을 잃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당시 상황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즉 오늘날의 시대적인 상황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당시 초대교회의 형태는 공동체적인 삶이었으며, 재산의 통용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재물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전제로 하여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기소유 재산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은 “그리스도인의 탄압과 처벌”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그러한 제도 안에서 “믿는 무리의 한 마음 한 뜻”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가 처형을 당한 후에, 그들은 두려워 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 또 성령이 임하는 오순절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곧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되는 급박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생활이나 개인적인 재물은 이차적인 문제가 되어집니다. 그들은 “죽어도 함께 죽자”는 공동체적인 생활과 제도가 절실하였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을 당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다시 말하여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고 성령을 속여도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시대적 상황을 전혀 생각지 않고, “물질을 조금 감추었다고 하여 구원을 못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재산의 통용과 공동체적인 삶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상황, 국가와 사회가 기독교를 탄압하여 기독교인을 잡아가며 죽이는 불법적인 상황(스데반이 돌이 맞아 죽는 그러한 상황)임을 먼저 파악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 시대적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현재의 마음 상태에서,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논한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가정입니다), 전쟁이 나고 북한에게 국가를 빼앗기고 그들이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 믿는 자 몇 십명이 깊은 산 속에서 숨어 공동체적인 생활을 지낼 때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통용과 공동체식의 운영을 결정하였다고 가정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며, 재산도 생활도 가정도 회사도 기업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긴박한 상태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였다고 생각하면 혹시 그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주변 상황이 완전히 받아들여짐을 전제로 하고..... 그 상황에서 사단의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며, 성령을 속이는 자가 있다면..... 또 그 댓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면.....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의 죽음은 그의 행위적인 보상과 댓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성령을 속이고 사단이 마음에 가득한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