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호> 실패한 성공 | 2003년 08월 03일 |
여러해 전 미국에서 나온 책 중에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김영사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내서 바람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국 유타주의 브라이엄영 대학 경영학 교수를 역임했고 기업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 폭넓은 강연 활동을 벌였던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가 지은 책인데, 뉴욕타임스가 선정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지요. 그 책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좋은 습관을 기르자" 정도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도 설득력 있게 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더랬지요. 미혜씨와 저도 그 중의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 책 출판을 책임 맡으셨던 분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목의 'Highly Effective'를 '성공하는'으로 번역해야 했던 속사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Effective'는 원래 '성공적'이라고 번역할 수는 있는 말이 아니랍니다. 사전적인 뜻도 그렇지만 그 책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더더구나 그렇다는군요. 그러나 'Highly Effective'를 '고도로 효과적인' 정도로 직역하면 주목받지 못할 것이 뻔했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원뜻과 배치될 수도 있는 '성공적'이라는 말을 써야 했다는군요. 그 책이 한국에서도 '히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책이기도 하지만 눈길을 끈 '제목'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물론 '성공'이 '출세'라는 말과 뜻이 거의 같다면 그것은 코비 박사의 책제목과 내용을 왜곡한 것이 되겠지요. 저자의 주장은 '출세'와는 상관없이 인생을 '효과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니까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출판사의 고충도 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한국에서 '성공'이라는 말이 가지는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으니까요. 이곳이라고 예외는 물론 아니구요. 5-6개월 동안 아뭇소리 없이 잠적했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새삼 애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즘 '성공'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뱅뱅 돌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패했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감의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암에게 졌고(敗) 미혜씨를 잃었기(失)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저는 싸움이나 경쟁에서 진 적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것을 잃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이번 실패는 다른 것 같습니다. 과거의 실패에는 대개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이 있었습니다. 게을렀다던가,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했다던가, 중요한 조언을 듣지 않았다던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렇게 실패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고는 다시 해 보곤 했지요. 재시도가 성공한 적도 있고 또다시 실패로 끝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과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을 잃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미혜씨와 저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어진 조건에서"라는 단서를 달아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치료비를 마련하는 일이나, 좋은 의사와 간호사를 만나는 일이나, 주변으로부터 시기 적절한 도움을 얻는 일이나, 미혜씨 스스로 용기를 잃지 않는 일이나, 간병하는 제가 지치지 않는 일 등의 거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지휘를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돈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5년 반 동안 "멀타이 밀리언(multi-million)" 달러의 청구서를 받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외국인 신분으로는 가질 수 없는 보험을 가질 수 있게 됨으로써 상당 부분 해결됐습니다. 아이엠에프와 다른 몇몇 사정들 때문에 가족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그것은 거의 기적같은 역사였지요. 치병 기간 동안 미혜씨는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감정의 기복이 있었고 희열과 좌절을 거듭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한번도 궁극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미혜씨는 의사가 권하는 치료와 수술을 거절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하나 하나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는, 옆에서 지켜보는 저조차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을 정도인데 말입니다. 단 3개월도 치료를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치료와 재발이 반복되는 고단한 그 기간동안에도, 미혜씨는 일년에 한 차례씩 성경을 읽었고, 오치에게 남겨주기 위해 시편과 잠언을 손으로 썼고, 주위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찬송가 연주 레코드를 취입했고, 생명의 소중함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글들을 써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국 졌습니다. 그리고 미혜씨는 먼저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저는 어떤 결론을 강요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라는 강요입니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실패를 해 왔고, 대부분 그런 실패를 선뜻 선뜻 인정했던 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대신 '난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하는 절규가 터져 나오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고 소리를 꽥 지른 적도 있습니다.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미친 놈 취급했겠지만요. 실패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다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역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갖은 방법으로 우리 치병을 주관하셨습니다. 미혜씨와 저는 그 점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돈이면 돈, 사람이면 사람, 시간이면 시간, 시설이면 시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느끼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혜씨와 저는 우리의 칠순 잔치때 아들, 손주, 며느리를 죄다 불러 모아놓고서 알바니 시절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는지 감동적으로 설명해 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마지막에 우리를 실패하게 하셨을까?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상대가 웬만했어야지. 그래도 명색이 암(癌)인데.... 오 년을 싸운 것만 해도 잘 한거야....' 하는 생각으로도 위로가 안됩니다. 더 나가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번 일에서 하나님은 성공하신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도 실패하신 것일까? '하나님도 이번엔 실패하셨다'는 쪽이 제게는 훨씬 더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정의상 하나님은 실패할 수가 없는 분이지요. 그러니 "난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성공하셨다"가 정답이 되어야 하겠지요. 바로 그 점이 제가 납득하기 힘든 점입니다. 그럼 왜... 그 동안 우리를 도우셨을까..... 헛된 희망을 주셨을까.... 그렇게 매진하게 하셨을까.... 그러던 중, 저는 제가 성공이라든가 실패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동안 해 오던 '낱말 따지기'가 거의 습관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실패(失敗)는 잃어버리고(失) 지는(敗)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혜씨와 저는 실패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해서 성공하지 못한 것일까? 성공(成功)이라는 건 공(功)을 이루는 것(成)이 아닌가? 그리고 공(功)이라는 것은 힘써(力) 일하기(工)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실패의 반대는 성공이 아니라 승리(勝利)겠지요. 승리라는 게 말 그대로 이겨서(勝) 얻는 것(利)을 가리키니까요. 그렇다면 성공이란 그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성공했고 하나님도 성공하셨습니다. 성공의 결과가 승리인가 혹은 실패인가는 시간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실패로 보이는 것이 10년 후나 혹은 그 이후에는 승리로 해석될 수도 있을 지 모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겠지요. 물론 이런 '개념 맞추기'와 '상황의 재해석'이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이라는 말을 승리라는 말로 바꿔놓더라도, 하나님 역할에 대한 제 혼란은 여전히 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문제는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되면 좀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공'에 대한 이런 생각이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니라면, "Highly Effective"를 "성공하는"이라고 번역한 것이 정확한 것이 됩니다. 실패나 승리는 별개로 하더라도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효과적으로 사는 삶"일 테니까요. 장사를 위해서 알면서도 오역을 자청했다고 자격지심을 가지신 그분께는 좀 위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정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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