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호> '항렬'과 압존법 | 2002년 11월 06일 |
지난 글에서 압존법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게 생각만큼 간단한 것 같지 않습니다. 국립국어 연구원 에서 발행하는 <새국어 소식>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그 잡지 1998년 제2호 (9월호?)에 허철구 연구 원(혹은 연구위원?)의 글이 났습니다. 제목은 "김 과장님은 은행에 가셨습니다"입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가 약간 토론을 했던 것과 관계가 깊고 배울 점도 있는 것 같아서 소개하고 약간의 토론을 덧붙였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첫째, 사원이 부장님께 과장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높이는 것이 맞다 는군요. 왜냐하면 "자기보다 윗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높여 말해야"하기 때문이랍니다. 윗사람에게 그보다 아랫사람을 낮추는 것은 일본식 언어 예절이지 한국식은 아니라는군요. 둘째, 할아버지 앞에서는 아버지를 높이지 않는 것이 전통이랍니다. 예의 압존법이 되겠습니다. 여 기서 항렬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항렬이 차이가 나면 압존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이 해가 안갑니다. 아래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원칙도 점차 무너지고 있 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높이는 것도 용납되는 관행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그러나 선생님 앞에서 선배님을 높이는 것이나 시부모님 앞에서 남편을 높이는 것은 올바른 언 어예절이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나와 선배님, 남편과 아내는 같은 항렬이지만 선배님과 선생님, 남 편과 시부모님 사이에는 항렬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설명돼 있습니다. 이상의 요약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한국의 압존법 사용 관례는 항렬 개념과 관계가 깊은 것 같군요. 항렬이라는 것을 사회적 신분의 '질(質)'적인 차이로 볼 수 있을까요? 나와 아버지, 아버지와 할아버 지, 선생님과 학생 등은 항렬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항렬의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압존법의 작동 여부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항렬이 높은 사람에게는 같은 항렬 내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을 높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생님 앞에 서는 선배님을 높일 수 없고, 시부모님 앞에서는 남편을 높일 수 없는가 봅니다. 같은 항렬 안에서도 높낮이가 있지만 두 분이 모두 나보다 항렬이 높으면 그때는 압존법이 작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앞에서는 그 동생 되시는 작은할아버지를 여전히 높여 말씀드려 야 하는 것이겠지요. 작은할아버지도 나보다 항렬이 높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압존법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곤 했던 '할아버지께 아버지를 낮추는 관행'은 오히려 예외적인 관행이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만 항렬 차이가 있는 것이 아 니라 나와 아버지 사이에도 항렬의 차이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나 사이의 항렬차이가 무시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요즘 점차로 할아버지-아버지-나 사이의 압존법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원래 의미의 압존법 원칙이 더 엄격해 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니까요. 항렬 개념을 더해서 생각해 본다면 말이지요. 그럼 이번에는 부장님-과장님-사원 사이의 높임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런 직급 사이의 관계는 항렬 차이로 인식되는 것일까요? 사원이 부장님 앞에서 과장님을 높이는 것이 올바른 관행이라면 거기에는 항렬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겠습니다. 사원보다는 과장님이 항렬이 높고, 과장님은 부장님보다 항렬이 높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각각의 사이에 '질'적인 신분차이가 있다는 말이 됩 니다. 그 점이 쉽게 이해가 가십니까? 할아버지-아버지-나의 관계나 시부모-남편/아내의 관계는 항렬로 차별화될 수 있는 관계이겠습니다. 항렬이라는 것이 역전 불가능함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선생님-선배님/후배의 관계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관계는 아무리 시간 이 지나도 역전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부장님-과장님-사원의 관계가 그런 가족관계 같은 항렬 개념으로 따져낼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이 조금 의문입니다. 게다가 과장님과 사원 사이에 정착된 '대리님'이나, 부장님과 과장님 사이 에 신설된 '차장님'의 직위도 역시 항렬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나이 차이가 불과 3-4년 혹 은 5-6년에 불과한 그런 직급 차이가 부모-자식 관계처럼 20-30년씩 차이가 나는 항렬 관계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하긴 나이 차이가 대여섯살 밖에 되지 않는 삼촌이나 이모도 계시기는 합니 다만.) 그보다는 오히려 선후배 관계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하여간 이런 저런 의문이 꼬리를 무는군요. 그래서 압존법이란게 그다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냥 사회적 지위가 높 은가 낮은가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가 항렬 개념까지 따져야 한다면 더더욱 복잡해 보입니 다. 그러나 어쨌든 국문법 책들과 국어연구원의 연구원께서 정리하신 위의 내용을 일단 있는 그대로 받 아들여 보기로 합시다. 그래서 그런 사회적 지위 개념과 항렬 개념을 교회내 기도 언어 관행에다가 대입시켜 보기로 합시다. 원래 이 이야기는 '기도 관행을 고칩시다'는 권고문을 검토하던 중에 나온 것이니까요. 교회내 관계에서는 항렬식 압존법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평신도나 장로님의 기도 중에 "우리 목사님이 말씀을 잘 대언하시도록...."하는 존대 표현을 쓴다면 이는 평신도/장로님과 목사님 사이에는 항렬에 준하는 질적인 신분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 겠지요. 또 평신도의 기도 중에 "장로님들이 교회의 이런 저런 일들을 잘 치리 하시도록...."하는 높임 표현을 쓴다면 그것 역시 장로님들은 항렬상 평신도보다 적어도 한 끗발 이상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한마디로 교회에서는 항렬식 압존법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평신도와 목사님 과 장로/권사님과 집사님들은 모두 같은 '항렬'에 속하는 사람들일텐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기도 에서 사용되는 존대법 관행을 기준으로 보면, 평신도보다는 집사님이, 집사님보다는 장로님이나 권사 님이, 그리고 장로님/권사님 보다는 목사님이 '항렬상' 한 끗발씩 높습니다. 조금 더 복잡한 일도 있습니다. 때로 장로님이나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성도님들 이... 하시도록..."하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가끔씩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도대체 어떤 경우일까요? 물론 이때의 성도님들은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은 물론 평신도도 다 포함한 표현이겠습니 다. 그렇다면 장로님/권사님/집사님들 덕분에 평신도들이 한꺼번에 묻어서 높여지는 경우일까요? 혹은 평신도들 중에도 항렬의 차이를 인정해야 할만큼 연세가 아주 높으신 분들이 계셔서 그런 것일 까요? 아주 헷갈리지요? 이쯤 되면 이제 '사회적 항렬'과 '영적 항렬'의 차이를 구분해 내고, 서로 다른 경 우의 수에는 어떤 존대법을 사용해야 할지 정리해 보아야 할 판입니다. 예컨대 영적으로는 같은 항 렬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나보다 항렬이 높을 경우에는....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오늘은 그만 할랍니다. 조정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