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상과 리

주방보조 2004. 2. 8. 03:30
<제101호> 상(常)과 리(理) 2002년 10월 17일

이상(異常)이 없는 것을 정상(正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정상'이라는  두 낱말은 모두 상(常)
이라는 한자를 갖고 있습니다.  한자 사전에서는 '항상 상'이라고 옮기는 글자이지만, 그건 좀 엉뚱한
풀이 방법입니다.  '상'자의 풀이인 '항상(恒常)' 속에 다시 '상(常)'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적어도 그 풀이로부터 '상(常)'이 '언제나'라는  뜻임은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어법으로  '항
상'은 '언제나'라는 뜻이니까요.  "언제나 그러한 것," 즉 변함이 없는 것을 '상(常)'이라고 하는 것이지
요.  

그런데 '언제나 그러한 것, 혹은 변하지  않는 것'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변하게 되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시간(時間)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이 늙기도 하고 사랑이 식
기도 하고 아이들이 대학엘 가기도 합니다.  시간의 위력은 좀 큰  단위에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사
회든지 변하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지요?  '영원한
것' 즉 아주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또 공간(空間)이 달라지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중국 속담에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요?  장소를 달리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명품'이라면서 팔리는 좋은
물건들이 태평양을 건너오면 값이 싼 이류 상품이 되고 마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 전자 제품 중에 그런 이류 이미지를 벗어나서 일본이나 미국의 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들도 생겼습니다.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그런 걸 가지고도 아주 기분이 좋습니
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회사들 때문에 데모도 하고 그랬지만요.   같은 사람이 장소를 달리하면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는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힘을 합치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곤
하지요.  예컨대 영어 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게 있습니다.  원래 뜻은  눈앞에 두고
보지 않으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장소 개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오래 안보면 멀어진다"고 번역하곤 합니다.  '오래'라는 말을  넣어서 시간 개념
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번역이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 속담은 원래 시간'과' 공
간의 위력이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도 소원하게 할 수 있다는 복합적인 뜻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변하게 하는 세 번째의 요소는 사람들(人) 사이의 거리(間)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인간
(人間)이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인간'이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 즉 '사
람들 사이의 관계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요즘 흔히 쓰이는 '사회(社會)'라는 개념과 비슷
한 말이지요.  사회라는 말이 없었을 때에는 '세상(世上)'이라는 한자어나 '누리'라는 고유어로 표현되
곤 했었습니다.

인간(人間)이 사물을 바꿔 놓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혹은 내  친구
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빈정거리는 말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내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많은 것
이 달리 보이고 다르게 해석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래서 시간(時間)과 공간(空間)과 인간(人間)은 사물과 그 의미를 '상대적'이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그런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을 '절대적'이라고 부르지요.

상(常)은 바로 그런 시공인간(時空人間)의 위력을 견디어내는 것, 즉 절대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
다.  시간이 흐르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게 되고  사람들의 사회적 입장이 아무리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상(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상(常)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트루스(Truth)'라는 개념과 많이 닮았습니다.  서양의 트루
스도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라는 변화인자들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이 유지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
이지요.

우리는 흔히 트루스를 '진리'라고 번역하곤 합니다만, 저는 그게 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
양 사람들이 (특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트루스'를 추구해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는 옛부터 '리(理)'를 최고의 목표로 추구해 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는 점
에서는 공통되지만, 그 양자의 성격은 사뭇 다릅니다.

서양의 '트루스'는 항상 '참(true)'이어야 하고 '변하지 말아야(不變)'  합니다.  그래서 '트루스'를 한마
디로 요약하면 '불변의 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에서 추구해 온 리(理)는 변합니다.  그
냥 변하는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만  빼놓고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까지 생겼겠습니까?  

그리고 '리(理)'는 '참'일 필요가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을 따질 필요가 없는, 그
래서 참과 거짓을 초월한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 끊임없이 변하면서 참가  거짓을 초월하는
'리(理)'가 불변의 참을 가리키는 '트루스(Truth)'와 같은 개념일 수가 없겠습니다.

그 대신 '트루스'는 오히려 상(常)과 개념적으로 통합니다.  적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
다.  '참'이라는 점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참'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상(常)에 '참'  개념도 들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트루스(Truth)'와  '상
(常)'은 완전히 같은 개념이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상(常) 타령이냐고요?  

'애꾸눈 나라의 두눈배기' 이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뜻으로 '애꾸눈 나라에서는 외눈배기가  정상(正常)'이라는 말들이 스스럼없이 쓰곤  합니다.  그러나
그걸 정상이라고 부르는 데는 문제가 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상(常)이라는 것이 불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상(常)이라는 건 애꾸눈 나라에서든 두눈배
기 나라에서든, 혹은 세눈배기 나라에서라도 변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도 물론 포함해서) 별 깊은 생각 없이 말과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
서 중요한 말과 개념이 본래의 뜻과 비중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런 게 아예 관행으로 굳어지는 경
우도 많고요.  상(常)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군요.  

아무튼 '상(常)이 객지에 나와서 고생 많이 하는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입니다.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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