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어리석다'에 대하여 (1): 바보

주방보조 2004. 2. 8. 03:33
<제104호> '어리석다'에 대하여 (1): 바보 2003년 02월 18일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한 겨울에 무슨 '낙엽 지는 소리'냐고  하시겠지요?  낙엽 다 떨어지고 그 위에  눈이 한길씩
덮여 녹을 줄 모르는데  말이죠.  '텅 빈 마음'  이야기를 한번 꺼내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바보 같은 삶' 이야기도 곁들여 보고 싶구요.

김도향씨가 곡과 가사를 만들고 조영남씨와 함께 불러서 한동안 유행했던 노랩니다.  노래가
시종 우울합니다.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허무'스럽기 때문이랍니다.

그냥 덧없이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 버린 인생을
저 흐르는 강물처럼
멋없이 멋없이 살았죠

세월은 덧없이 흘렀고, 내 인생은 낙엽처럼 땅에 떨어졌고, 혹은  강물같이 이미 흘러가 버렸
습니다.  한마디로 '멋대가리 없는 삶'이었답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이미 늦어 버린 것은 아닐까, 몽땅 잃어버린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면 맥이  다 빠집니다.  그
래서 '흘려버린 세월'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숨을 쉽니다.  그리고는 마침
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보편적인 고백이 절규처럼 반복됩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요즘 곰곰 생각해 오던 게 하나 있습니다.  물론 골똘히 그 생각에만 파묻혀 지낸 것은 아닙
니다.  그저 한번씩 생각을 주었다가 다시  일상에 묻히곤 합니다.  대개의 시간을  멍청하게
보내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다가도 흐르는 시간이 불안해 지면 또 한번 그 생각을 되뇌곤
합니다.

'잘 산다'는 게 무얼까.  

김도향씨의 노래를 뒤집어 보면, 삶을 되돌아보고 후회할 게 없으면 잘 산  삶일 겝니다.  만
족할 수 있으면 그건 '잘 산 삶'일 겝니다.

특히 삶의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 그런 후회가 없다면 그건 정말로
'잘 산 삶'입니다.  미혜씨의 마지막 시간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입니다.  

문제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바보 같
지 않은 삶'이 뭐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적어도 '바보'가 뭔지 알아보는 게 좀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바보'를 '지능이 모자라서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는 사람(연세대 한국어 사전)'
이나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을 얕잡아 또는 욕으로 이르는 말(야후 국어사전)'을 가리키는 말
로 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음 작용'이 부족해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가
리킨다고 보겠습니다.

바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이 없는 듯  합니다.  오래 전 서정범 교수께서 한
방송에서 '바보'의 어원을 '밥'에 '보'가 합쳐진 말에서 비읍탈락이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 적
이 있답니다.  밥만 축내는 밥벌레, 곧 식충(食蟲)이라는 해석이 덧붙여졌겠지요.   그렇게 보
면 '바보'는 '밥값도 못하는 모지리'이겠습니다.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더구나  유수 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께서  제시한 설명이잖습니까?  
그러나 배주채 교수는 그런 어원 분석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한 바 있습니다.  

고대나 중세 문헌에 '밥보'라는 말이 한번도 쓰인 적이 없고, '밥보'에서 비읍이 탈락하는 음운
현상이 다른 말에서 발견된 바 없으며, 또 '밥보'와 비슷한 뜻의 '먹보'에는 '밥만 축내는 모지
리'라는 뜻이 생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한편 고대 한국말이 고대 아리아어에 뿌리가 닿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주장
속에는 '바보'라는 말이 원숭이의 일종인 '배분(baboon)'과 연결돼 있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
런 설명이 고고인류학이나 비교언어학적으로 얼마나 믿을 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러나 일단 재미삼아 한번 지적해 두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바보'의  어원 설명에서 가장  그럴 듯 한  것은 <우리말 유래  사전>입니다.  
'여덟 달만에 나온 모지리'라는 뜻으로 '팔삭(八朔)이'라는 말이 있는데 민간에서 '바사기'로 쓰
였답니다.  그것을 줄인 '바'에 인칭 접미사 '보'가 붙어서 '바보'가 되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팔삭둥이라면 신체적으로는 그다지 흠이 없어 보여도  마음 작용이 미숙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바보'가 '마음씀이 모자라는 사람,' 혹은 아주 줄여서 '마음 모지리'를 가리키는 말이었
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마음씀, 혹은 마음 작용이란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바보'는 느
낌과 생각과 뜻이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 모지리 즉 바보는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의 느낌과 생각과 뜻
이 평균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스스로에게는 그런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까요.  그는 아주 만족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불쌍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이겠습니다만.

정작 후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닌데도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온전한 마음작용을 할 능력이 있습니다.  제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뜻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도 그 사람들 중에는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과 이웃에 대해서 제대
로 느끼거나 제대로 생각하거나 제대로 뜻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삭동
이들이면서도 팔삭동이 '처럼' 사는 것이지요.  

나중에 가서야 '십삭동이'의 판단력을 가지고서 '팔삭동이'처럼  살아온 자기 과거를 돌아봅니
다.  그러니 후회가 안되겠습니까?  땅이 꺼져라 한숨들을 쉬어 대면서 '흘려버린  세월을 찾
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되뇌이는 것이지요.

십삭동이들이 팔삭동이들에게 '바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것은 좀 슬픈 일입니다.  그
러나 십삭동이들이 스스로 십삭동이이기를 포기하고 팔삭동이나 칠삭동이처럼  사는 것은 그
보다 더 슬픈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바보같이 살지 않는 삶은 무엇일까요?  팔삭동이는 팔삭동이답
게, 십삭동이는 십삭동이답게 사는 게 바로 그런  삶이 아닐까 싶군요.  나는 왜 팔삭동이나,
나는 왜 십삭동이냐를 항의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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