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어리석다'에 대하여 (2) 어리다.

주방보조 2004. 2. 8. 03:35
<제106호> '어리석다'에 대하여 (2) 어리다. 2003년 08월 04일
반년 전에 쓴 (그러나 횟수로는 불과 두 회 전에 쓴) 글에서 '바보'는 '팔푼이'에서 유래된 말
이라고 했습니다.  어원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보란 태내에서 충분히 자라지
못한 채 태어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요.

태내에서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신체적으로 별 이상이 없지
만 마음씀에 모자람이 생긴다고, 지난번에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현대 의학에서는 8개월째의 태아는 전반적으로 신경이 발달하고, 눈동자가 생겨서 보기 시작
하고, 청각 장치가 거의 완성되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근육과 근육을 지배하는 신
경이 발달해 태내 운동이 늘어나고, 폐가 호흡 준비를 갖춘다고 합니다.   9개월째가 되면 태
아는 몸의 태모 태지를 벗고, 붉은  빛의 피부를 갖게 되는데, 그나마  곧이어 분홍빛 피부로
바뀌게 됩니다.  성기와 호르몬 분비선들이 완성된다는군요.

이상하게도 '마음씀'을 관장하는 '뇌'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뇌는 비교적 태아의 이른 시기에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즉,  태아의 뇌는 4개월째
에 이미 '급속하게 발달하기 시작'하고 5개월째가 되면 '감각과 의식과 지능을 지배하는 대뇌
피질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그 한가지  결과로 '신경계통의 발달로 두드러져 미각과 청각
이 생기기 시작'한답니다.  

다시말해 8개월째 접어든 태아는 이미  순환계와 소화계와 뇌의 발달이 이미  거의 완성되고
신경계과 생식계의 발달이 마무리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7개월째 태아가 조산되면 살아나
지 못하지만 8개월째에 조산된 태아는 인큐베이터를 사용해 생존시킬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팔푼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신작용에 지체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째서 우리는 '팔푼이'와 '바보'를 연결시켜 온 것일까요?  그것은 태아 성장에 대한 전통적
인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정을 지키는 신으로 알려진 성조신(成造神)의 내력을 풀
어 이야기한 무가 '성조 푸리'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과약기언(果若其言)으로 그 달부터 잉태(孕胎) 잇셔/
한두 달에 이실 맷고,
삼사삭에 인형(人形) 생겨,
다섯 달 반짐 싯고,
육삭에 육부(六腑) 생겨,
칠삭에 골육(骨肉) 맷고,
팔구삭에 남녀 분별, 삼만팔천사혈공(三萬八千四血孔)과
사지수족골격(四肢手足骨격)이며 지혜총명 마련하고,
십삭을 배살하야, 지양이 나려 왓셔 부인의 품은 아히,
세상에 인도할 제, 명덕왕(命德王)은 명(命)을 주고,
복덕왕(福德王)은 복을 주고, 분접왕(分接王)은 가래 들고
금탄왕은 열ㅅ대 들고, 부인을 침노하니,
부인이 혼미중에 금광문(金光門) 고이 열어, 아기를 탄생하니,
딸이라도 방가운데, 옥(玉) 가튼 귀동자라.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태아 발달 과정에 따르면 태아의 '지혜 총명'이 마련되는 시기가 바로
'팔구삭,' 즉 8-9개월 단계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옛날 분들은 팔푼이는 지혜총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태어나 '바보'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팔푼이가 정신 작용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는 많습니다.  달수를 다 채우지
않고 출생한 사람 중에서도 사람 구실을 충분히 했던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조선 초기의 한
명회는 팔푼이도 못되는 칠푼입니다.  일곱달 반만에 출생했기 때문이지요.  성주푸리에 따르
면 '지혜와 총명'은 흔적도 없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재상을 지냈습니다.  
또 서양 삼대 천재의 하나로 꼽히는 아이자크 뉴턴이 팔푼이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지요.

그런데 '어리석다'가 반드시 태내 미성숙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태어난 이후에도 성장
이 지체되면 그 결과로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그것은 한국말의 '어리석다'와 '어리
다'가 어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그것을 반포하기 위해 쓴 책의 서문을 아시지요?  거기에 "어린
백성이 니르고저 할 바가 있어도..."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때의 어린  백성이란 어리석은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문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어리다,' 즉 '어리석다'고
한 것입니다.

출생 전의 미성숙을 가리키는 '바보'와는 달리 '어리다'는 태어난 이후의 미성숙을 가리킵니다.  
성장 과정에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야 '정상'이라고 불러 줄 수 있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한
사람을 '어리다'고 부르는 법이니까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처음으로 '어린이'라고 부르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젊은이
나 늙은이라는 말에 대칭이 되도록 만든 용어인데,  그 말에는 어린이도 어엿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용어가 애초의 의도를 달성했는지는  조금 의문입니다.  '어리
다'는 말이 '다 자라지 않았다'는 뜻과 함께 '어리석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다 자라지 않았다'와 '어리석다'가 긴밀히 연결되는 개념이라면, 그 기준이 어른이기 때문입니
다.  즉 어른에 견주어 어린이는 아직 어리석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방정환 선생은 가부장
사회에서 어린이의 인격과 존재가치를 부각시키려고  '어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개념 속에서 여전히 어른 중심의 사고방식을 배제할 수는 없었던 셈입니다.  

일정한 성장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을 '어리다'고 한다면, 사람이 성장해 가면서 거치게 되는
일정한 단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린가 아닌가를 판단할 기준이 있어야 하니까요.  실
제로 그런 발달 단계를 주장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이가 구순기에 충분히 빨지 못하면 (대개는 엄마  젖을) 욕구불만이 쌓
인다고 합니다.  항문기에 제대로 싸지를 못하면 역시 욕구불만에 쌓입니다.   또 매슬로우에
따르면, 생물학적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면 안전의 욕구가  불가능하며, 자존심의 욕구가 충족
되지 않으면 자아실현의 욕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프로이트나 매슬로우의 주장이 주로 어린 시절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과 대조적으로 에릭슨이
라는 사람은 사람의 전 생애를 발달 단계로 나눴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영아기(출생에
서 1세)의 기본적 신뢰감의 단계에서  노인기(50세 이상)의 자아통일성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간다는 것이지요.

에릭슨은 각 단계에 구비돼야 할 특성들이  발달되지 못하면 부적합성이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주도성 단계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수치감과 회의감을 갖게  되고 노인기에 자아
통일성이 갖춰지지 못하면 절망감을 갖게된다는 식입니다.  

각 발달 단계가 충족되지 못해 나타나는 욕구  불만이나 부적합성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어
리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습니다.  각 단계에 충족되어야 할 것이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입
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어리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어리석다'는 말로 재해
석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리고 그 영향을 너무너무 강하고 지속적으로 받아온 한국에서는) 공자의 성장
단계론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열다섯살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설흔 살이면 뜻을 세우고,
마흔 살이면 흔들림이 없어지고, 쉰이면 하늘의 뜻을 알게되고, 예순이면 귀가 순해져서 이해
가 넓어지고, 일흔이면 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도에 어긋남이 없어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
니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옵니다.

이 성장 단계론은 공자 자신의 생애를 서술한 것이므로 일반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지에는
의문이 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공자의  발달 단계론은 오랫동안 개인들의 발
달 단계를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돼 왔잖습니까?  감히들....

그래서 마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흔들리는 사람은 '어린' 사람, 즉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
가(주로 자평)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오십이  되어도 '하나님의 뜻'
을 이해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이걸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