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어리석다'에 대하여 (3): 미련하다

주방보조 2004. 2. 8. 03:36
<제107호> '어리석다'에 대하여 (3): 미련하다 2003년 08월 05일

'어리석음'의 의미군에 속하는 '바보'와 '어리다'를 보았습니다.  팔푼이라는 어원적인 뜻을  갖
는 바보는 선천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어리석다와 어원을 공유하는 어리다
는 후천적인 미성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보와 어린이는 충분히 자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즉 미성숙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합
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바보는 선천적,
어린이는 후천적이라는 말이지요.

어리석다와 뜻이 가까우면서 실제로 그 말과  어울려 자주 쓰이는 말로 '무디다'가 있습니다.  
한자합성어로 '둔(鈍)하다'고도 하지요.  둘 다 '날카롭다'의 반대말입니다.  그 말이 비유적으
로 쓰여서 사람이 예민하거나 빠릿빠릿하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딤'은 '바보'와 '어림' 중에서 어느쪽에 가까울까요?  그점은 좀 따지기가 쉽지 않
습니다.  우선 '무딤'은 후천적이라기 보다는  선천적인 데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딘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상' 무딘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리고  성격은 아무래도 타고나는
측면이 강합니다.  게다가 무딘 사람이 연습을 통해서  빠릿빠릿해 지는 경우는 드물지 않겠
나 싶습니다.

그러나 '무딤'이 '바보'와 동의어라고 볼 수 없는 점도 있습니다.  무딘 사람은 단지 느릴 뿐이
잖습니까?  느리더라도 결국 이해와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지요.  

물론 느리면서도 결국 이해에 도달하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의 한  갈래가 되겠고 아
마도 '어린이' 보다는 '바보'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문제는 무딘 것이 아
니라 어리석음에 있겠지요.  요컨대 무디면서도 현명한 사람도 있고 무디면서 어리석은 사람
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바보'와 '어린이'로 돌아갑니다.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원인 때문만
은 아닙니다.  그 원인과 관련이 깊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도 '바보'와 '어린이'는 질적인 차이
가 있습니다.  

'바보'는, 그 말이 비유적으로 사용된 게 아니라면, 대개  아무리 가르쳐도 어리석음을 벗어버
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그 말이 후천적으로 어리석은 이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뜻이라면, 잘 가르치고 잘 배우서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보는 교정이 불가능하지만 어
린이는 교정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좀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교육으로 어리
석음을 깨우쳐 보려는 모든 활동이 거기에 포함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조선의
유학자들이 향약을 베풀고,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 선교사들이 교
회-병원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민주화 운동기의 문인들이 소설을  쓰고 문학잡지를 만들어
냈던 까닭이기도 합니다.


(3) '미련하다'에 대하여

그런데 선천적이 아니면서도 교육을 통해서 교정이  불가능한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바보는
아닌데 그렇다고 어린이도 아닌  경우지요.  그것은 스스로 교육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미련하다'는 말을 씁니다.

야후 국어사전과 연세대 한국어 사전은 모두 '미련'을 '(태도나 행동이) 어리석고 둔함'이라고
풀었습니다만, 좀 모자라는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련함은 그저 어리석거나 둔하기만 한 것
이 아니라 거기에 '고집'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둔한 태도나 행동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는 뜻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대개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똑똑하거나 현명하
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과 태도를  '고집'합니다.  이 '고집'이야
말로 미련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스스로 바로잡으
려고도 하지 않고, 남의 조언이나 충고, 혹은 교육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미련함을 경계하는 글이 참 많습니다.  특히 지혜를 가르치는 잠언서에서는 한두
절 건너서 한번씩 미련을 조심하고 피하라고 거듭 경고합니다.  우선 잠언서 28장26절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못박았습니다.   미련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정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믿고 자기 행동이 옳다고 믿는  것은 미련입니다.  자기 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틀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자기 마음과 그 마음에서 처리
돼 나오는 정보는 확실하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니 자꾸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18장2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
만 기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야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자기가 옳을 수  밖에 없으니까
자기 이야기를 자꾸 해서 남을 깨우치고 싶은 게 당연한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말을  잘 안 들을 뿐  아니라, 자기 일도 잘  안 풀립니다.  
미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쯤해서 '아,  내가 뭔가 좀 잘 못  생각했나보다'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 틀릴 가능성을 단 1%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잘못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 수 밖에요.  일이 잘못되면 내 잘못이 아니라 제도탓이기
도 하고, 다른 사람들 탓이기도 하고, 심지어 운명이나 하나님 탓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제
말이 아닙니다.  잠언 19장3절에 보니까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고 했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남탓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일은 여전히 꼬이고 마음은 답답하고
사람들은 나를 멀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마음과 내 행동에는 여전히 잘못이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기 마음을 믿는 태도는  이젠 '고집'이라고 불러야 할 태도로 발전
합니다.  물론 본인은 그걸 고집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소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요.

그런데 그게 고집인지 소신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믿는 건 좋은데, 다
른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답니다.

미련한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을 좀 우습게 압니다.  뭐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진리임에 틀
림없는 자기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의 조부라운 생각이나 데데한 행동이  성에 찰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잠언 23장9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1장7절에서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남의 말과 행동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다 보니 충돌이  불가피해 집니다.  특히 미련한 사람이
다른 미련한 사람과 충돌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불꽃이 튈 것은 말 그대로 명약관
화잖습니까?  서로 옳다고 우기는 두 미련한 사람 사이의 논쟁이나  쌈박질에는 백약이 무효
입니다.  싸움만 격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3절에서는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
툼을 일으키느니라"고 썼습니다.  이 구절에서 '미련한 자' 다음에 붙은 조사 '마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미
련은 다툼을 달고 다닌다는 말이지요.

그럼 미련한 사람이 다툼을  일으키는 메카니즘은 뭘까요?  그것은  '화내기'입니다.  미련한
사람과의 논쟁이 순리적으로 풀릴 리가 없습니다.  그  미련한 사람은 자기가 틀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논쟁에 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유일한 해결책은 '상대를 설득하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오류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누가 그 사람에게
설득을 당하겠습니까?  그러니 설득을 시도하는 그 미련한 사람이 화가  안나겠습니까?  "이
미련한 놈이 왜 내 말을 안듣는 거야"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논쟁을 시작해서 싸움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련한 사람은 아주 신속하게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잠언 12장16절에 보니까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고 돼 있습니다.  '당장에'라는
시간 부사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워낙 자기 자신을 확신한 나머지 다
른 사람이 거기에 수긍하지 않으면 '당장에' 화를 낸다는 말이지요.  

일단 화를 내고 나면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미련한 사람에게는 주워 담고 싶은
생각도 안 떠오르겠지만요.  자기가 옳으니까요.  자기가 내는 화는  '의분'이요 '공분'일 겝니
다.  그러니 그로부터 싸움이 시작되기까지는 '순식간(瞬息間)'입니다.   말 그대로 숨한번 쉬
고 눈한번 깜짝 거리는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인생은 긴 편입니다.  그러다 보면 미련한 사람이 이런저런 일에 화내고 싸움을 일으키는 경
우가 자꾸 반복되겠지요.  그렇다면 미련한 사람도  이런 '패턴'을 스스로 관찰한 끝에 '아하,
내가 미련한 놈인가보다'하고 깨달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혹시 그 미련한 사람이 그리
스도인이어서 잠언서를 읽을 기회를 갖는다면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도 커지지 않을까요?

그럴 걱정은 전혀 없습니다.  잠언서 아니라 잠언서  할아버지를 아무리 읽더라고 미련한 사
람은 자기가 미련한 사람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하던 일(화내기와  쌈박질)을 골백
번이고 골천번이고 반복합니다.  

그점은 잠언 26장11절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
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할 뿐입니다.  잠언 27장22절에서는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찌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합니다.  

욥기(11장12절)에서도 한말씀 거듭니다.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들나
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려라"고 말입니다.  그 고집이 얼마만한 고집인지 넉넉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구제불능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혹시나 말입니다.  미련한 사람들도 간혹 가다가라도 올바른 말을 할 수도  있는 일 아
니겠습니까?  소 뒷걸음질에 쥐잡기 식으로라도  말입니다.  물론이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
다.  사실은 미련한 사람도 너무너무 그럴 듯하고 멋진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 내용을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과 연결되지 않은 객관적인 지혜나 진리
는 없는 법입니다.  

오죽하면 잠언 26장9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
으니라"고 했겠습니까?  요즘말로 하면 술취한 사람에게 총을 쥐어준 격입니다.  아무리 올바
른 말이면 뭐하겠습니까?  상대방을 선도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마구 찔러서 상처를 줄 뿐
아니라, 그 상처를 벌려서 소금까지 뿌려준단 말입니다.

또 잠언 26장7절에서는 "미련한 사람이 입에 담는 잠언은, 저는 사람의 다리처럼 힘이 없다"
고 일축했습니다.  태도와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잠언은 불알 깐 돼지 처럼 번식력이 없
는 것이지요.  불알 깐 돼지는 맛이라도 있지....... .

그럼 도대체 어떤 사람이 미련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미련한
사람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까?  예컨대 미련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부딪히면 어떻게 될
까요?  

성경은 벌써 그 질문도 예상하고서 미리 대답해 놓았습니다.  잠언29장9절에 보니까 "지혜로
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다고 했군
요.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던지 결국은 쌈이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이지요.  악
화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양화를 구축하고야 맙니다.

미련한 자가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나만 미련하지 않다면 사실 상관없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가 과연 미련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정리한 정보만
가지고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보다 확실한 '자가 진단법'을 제시합니다.

우선 잠언 17장21절에 보니까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다고 했고 10장1절에서는 "미련
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라고 했더군요.  한마디로 불효가 곧 '미련의 지표'인 셈입니다.  부
모님께 근심을 끼치거나 살 낙을 드리지 못하면  나는 십중팔구 미련한 놈입니다.  아니시라
구요?  다행입니다.

그러면 미련한 사람에 대한 대책은 무엇일까요?  미련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별 탈이 없을
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썌려 패는 것입니다.  잠언 26장3절에 보니까 "말에게는 채찍이
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고  했더군요.  그저 몽둥이 밖에는
다른 약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래도 미련한 사람을 말이나 나귀에 비유했군요.  그 정도면 대접을 많이 해 준
편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전래적으로 '몽둥이가 약'이라고  처방되어 온 대상이 하나 있습니
다.  그렇습니다.  '미친 개'가 정답입니다.  

미친 개가 행패를 부리면 어떤 방법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저 몽둥이로 패야 한답니
다.  그건 동물 애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개는 다 사랑해도 되지만  미친 개는 안
됩니다.  미친 개도 권리가 있다면서 내버려 뒀다가는 갓난  아이를 물어 죽일 수가 있단 말
입니다.  그러니 미친 개 만큼은 사정 보지 말고 패야 합니다.  그래야  깨갱거리면서 마룻장
밑으로라도 도망갑니다.  나중에 또다시 기어나올 망정, 지금 당장은 효과가 있습니다.

미친 개에 대한 한국식 처방과 미련한 자에 대한 성경의 처방이 똑 같습니다.  그 말은 '미친
개'와 '미련한 자'는 동격이라는 말이겠지요.  미련한 사람은 '미친 개'일 뿐입니다.  사람도 아
닐 뿐 아니라 제정신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미친 개와 미련한 놈은 그저 흠씬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답니다.  그점은 성경과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이 동시에 보장해 줍니다.  

미련한 사람을 다루는 두 번째 방법을  알고 싶으시지요?  자기 손에 피묻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국 속담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권고 사항도 그와 비슷합니다.

"미련한 자 앞을 떠나라" (잠언 14장7절).


이상, 알바니에서
어떤 미련한 사람이 보내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