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호> '어리석다'에 대하여 (5): 우(愚) | 2003년 08월 07일 |
지금까지 어리석다는 나쁜 뜻임을 보았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어리석음이든지, 그게 '바보'이든 '어림'이든, 혹은 '미련함'이든 그걸 환영하거나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들이 모두 욕설(가벼운 것일지라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사람들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잠언과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어리석음'과 '미련함'의 서술이 그렇습니다. 그 어느 구절에서도, 아마도 성경 어느 구석에서도 "너희는 이러저러하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라"고 권고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칭찬하거나 적어도 그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문화도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한자 문화권입니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 그리고 아마도 베트남에서는 오랫동안 '어리 석음'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그 긍정적인 면도 부각시켜 왔습니다. 일정한 어리석음은 유익 하다고 설명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저렇게 어리석어라'고 권유까지 합니다. 앞에서 '우(愚)'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한자이며, 경우에 따라 긍정적인 뜻 을 갖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은 슬기롭다'는 반전된 의미가 내포된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에 나타나 있습니다. "노자(老子)" "장 자(長子)"와 함께 도가(道家) 3서(三書)라고 부르는 "열자(列子)"라는 책의 "탕문(湯問)"편에 나오는 우화지요. 그 이야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기주(冀州)의 남쪽과 하양(河陽)의 북쪽 사이에 태형 산(太形山)과 왕옥산(王屋山)이라는 높은 산이 있었습니다. 산 둘레가 7백리라고 하는 걸 보니까 이게 장난이 아닌 산이었나 봅니다. 7백리면 서울에서 대구 정도는 되는 거리지요? 하여간 중국 사람들 과장법(전문용어로 '뻥')은 알아줘야 한단 말입니다. 산 북쪽 너머 기주에 아흔이 다 된 노인네가 살고 있었는데, 이름이 우공(愚公)입니다. '어 리석은 노인네'라는 말이지요. 하루는 가족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산 때문에 왕래가 불편해서 안되겠다. 저걸 깎아서 평지로 만들자." 가족들이 모두 찬성했습니다. 그 노인네에 그 가족입니다.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했던 것으 로 보이는 우공의 늙은 부인만 반대했답니다. 그러나 그 옛날에 여자 한사람이 반대한다고 일이 중단되겠습니까? 가족들은 즉각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요즘처럼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고 포클레인으로 파 내고, 불도우저로 깍아 내고, 덤프트럭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겠습니까? 택도 없지요. 그 래서 가족들은 두 패로 나뉘어서 한패는 산을 깍고 다른 한패는 흙을 져다 버리기 시작했습 니다. 흙은 '발해(渤海)'에다가 갖다 버리기로 했는데, 한짐 지고 갖다 버리는 데 딱 1년씩 걸렸답 니다. 그런데도 우공 마누님만 빼고는 가족들이 끽소리 없이 열심히 일했다는군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하곡 땅의 지수(智 )라는 사람이 우공을 찾아가 말렸답니다. 그러자 우공이 하는 말, "나는 늙었어도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 겠지만 산은 불어나는 일이 없잖느냐. 그러니 언젠가는 산이 없어질 날이 오겠지.” '슬기로운 늙은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지수는 끽소리 못하고 물러났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두 산의 산신령이 정말로 제 근거지가 없어 질까봐 옥황상제에게 찔렀 습니다. 선처를 부탁한 것이지요. 옥황상제는 우공의 역사에 감동해서 힘센 과아씨의 아들 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겨서 하나는 삭동(朔東)에 두고 하나는 옹남(雍南)에 두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한 것은 원고지 메우기만은 아닙니다. 두 주인공의 이름에 유의해 보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 사람은 '어리석은 늙은이(우공)'고 다른 하나는 '슬기로운 늙 은이(지수)'입니다. 말하자면 우공이산은 '어리석음'과 '슬기'가 한판 붙었다가 '어리석음'이 이긴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늙은이'에게는 이름에 '공(公)'까지 붙여줬습니다. '슬기로운 늙은이'는 그 냥 '늙은이 수( )'를 붙여줬을 뿐입니다. 그 이야기를 쓴 사람의 편견이 엿보이는 대목입니 다. 슬기로운 사람은 그냥 '늙은이,' 어리석은 사람은 '공'이잖습니까? 비슷한 이야기로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게 있습니다. 남송(南宋) 때 축목(祝穆)이 지은 지리서 《방여승람(方與勝覽)》과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나오는 말입니다. 당(唐)나라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은 어린 시절에 서역 무역상이던 아버지를 따 라서 촉(蜀)에서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유협(遊俠-요즘말로 는 히피가 아닐까요?)의 무리들과 어울려 쓰촨성[泗川省] 각지의 산을 떠돌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엔가 이백은 마음을 잡고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공부를 좀 해볼 요량이 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판판 놀던 사람이 공부가 재미있을 리가 없었겠지요. 때려 치우 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한 노파를 만납니다. 그 노파는 냇가에서 바위에다 도끼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백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바늘을 만들고 있다네.' '도끼로 바늘을 만든단 말입니까?' 노파는 이백의 비웃음을 뭉개면서 오히려 꾸짖듯 말했습니다. '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가 있을게 다.' 이백은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한눈 팔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했다는군요. 그가 대시 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노파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다. 믿 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어쨋거나 우공이나 노파나 막상막하입니다. 좀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지수나 이백이 끽소리를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지수와 이백의 다른 점이 있다면, 지수는 질려서 그냥 물러 나고 말았지만 이백은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똑똑한 사람' 에게 교훈을 준 것이지요. '우공이산'이나 '마부작침' 외에도 '쇠젓가락을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鐵杵成針-철저성침)'거 나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水滴石穿-수적석천)'는 이야기들이 다 이 계열입니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우불과급(愚不可及)"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그 유명한 공자님 말 씀입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의 "공야장(公冶長)"편에서 위(衛)나라 대부(大夫) 영무 자(寗武子)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로웠고(寗武子 邦有道卽知)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邦無道卽愚) 그 지혜로움은 따를 수 있으나(其知 可及也)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其愚不可及也)." 공자의 주장은 슬기로운가 어리석은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나라에 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제대로 되고 있으면 당연히 슬기로움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개판이면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자 문화권에서는 '어리석음(愚)'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 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또 어떤 형태의 우(愚)는 하늘을 감동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역사를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루어내 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리석음'에는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거나 똑똑하거나, 사람의 정성으로 하나님 의 계획을 바꿔 놓는 것이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한번 구해 보려고 하나님과 협상(부탁)해서 의인 수를 열 명까지 줄여봤던 아브라함이 그나마 거기 가까웠을까요? 그러나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습니다. 하나님 의 섭리대로.... '사람의 어리석음'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는 것이지요. 긍정적이기는커녕 '어리석음'의 운명은 멸망입니다. 사무엘상 25장을 한번 보십시오. 다윗 과 나발과 아비가일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다윗은 동가숙 서가식 하는 처지였는데, 부자인 나발에게 "보호세"를 요청했습니다. 내 나와바리에서 목숨과 재산을 보호해 줬으니 경비를 좀 보조해달라는 것이었지요. 나발 은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을 줘서 쫓아 버렸습니다. 다윗은 이를 갈면서 4백명의 무사를 이끌고 나발을 박살내기로 했습니다. 이 정보를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로비를 합니다. 나발 몰래 다윗에게 먹을 것을 잔뜩 보 내고서 '남편이 좀 미련해서 그러니, 날 봐서라도 좀 살려 주시죠' 했습니다. 다윗은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았는데, 그 열흘 후에 나발은 하나님 손에 죽습니다. 다윗은 칼 에 피 묻히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습니다. 그런 이야깁니다. 여기서도 주목할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은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이지요. '아비가일'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아버지에게야 모든 딸이 이쁘 고 귀엽겠지만, 그 정도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 이름을 그렇게 지어 버렸을 정도니까요. 반면에 아비가일의 남편인 '나발'의 이름은 재수가 없습니다. 아비가일이 제 남편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맞는 말이었을 겁니다. 아내니까 남편을 잘 알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보다도 히브리어로 '나발'은 '어리석다, 미련하다'는 뜻입니다. 미련한 자의 결말은 가차없는 죽음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손으로.... 게다가 마누라까지 빼앗겼습니 다. 한자 문화권의 '어리석음'도 원래는 그다지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어리석음(우직(愚直)이라고도 할까요?)이나, 특정한 상황(예컨대, 난세)에서의 어리석음은 좋 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아주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리석음은 긍정 적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지요. 그렇다고 뭐가 어쨌느냐구요? 별 것 아닙니다. 뭘 어쩌자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부터 우 공이산을 버리자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어떻게든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요모조모로 따져 보니까, 그런 점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다만, 한자 문화권에 살면서 성경을 믿는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종류의 문화적 불일치를 어 떻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로 삼을 뿐입니다. 조정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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