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호> [개념] "깨닫다"에 대하여 (9-끝) | 2002년 04월 07일 |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만, 마침내 "깨닫다"에 대한 약간의 "앎"에 도달했습니다. 거기에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알다"와 차이가 없는 뜻입니다. 생각과 느낌을 동원하는 "마음을 써서 알다"입니다. 둘째의 뜻은 "이해하다"였습니다. 그것은 "사물을 알되, 그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파악한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세 번째의 뜻은 새가 알 껍질을 깨뜨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비유로 설명되었습니다. 이런 뜻의 "깨닫다"는 다른 낱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깨닫다"의 독자적인 개념임을 보았습니다. 세 가지 "깨닫다"는 사람의 "앎"을 확대하고 승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알다"로서의 "깨닫다"는 앎의 "양(量)"을 늘리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해하다"로서의 "깨닫다"는 앎의 "질(質)"을 증진시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다른 말로 설명되지 않는 고유한 의미의 "깨닫다"는 앎의 "차원(次元)"을 승화시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런 식의 정리가, 도식적인 냄새가 짙기는 합니다만,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배신자 사이퍼의 깨달음이 "이해하다"의 형태였을 것으로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깨달음은 잘못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해 내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런 이해(理解)를 우리는 오해(誤解)라고 부릅니다. 한편, 송화의 득음(得音)은 한 차원 높은 경지로의 도약입니다. 처음에는 소리에 대한 자신의 앎과 이해를 가능하게 했으나 이제는 자신을 옭죄고 있는 조건을 초월했을 때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송화의 서편제가 가능했던 것은 그녀 마음속의 한(恨)때문이었습니다. 송화의 시력을 뺏어 버린 유봉의 의도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서편제조차 넘어 득음(得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편제를 가능하게 했던 그 소중한(?) 한(恨)을 풀어버려야 했습니다. 망나니처럼만 나오던 동생 동호가 마침내 그것을 완성해 주었습니다. "어쩐지 임자 소리가 예전하고 썩 다르다 했더니만은 ......" - 아멘 -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
'예수와 우리 > 조정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사 준비와 설거지 (0) | 2004.02.08 |
---|---|
No More Crisis Please, (0) | 2004.02.08 |
[개념]깨듣드에 대하여(8) (0) | 2004.02.08 |
[개념]깨닫다에 대하여(7) (0) | 2004.02.08 |
[개념]깨닫다에 대하여(6) (0) | 2004.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