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식사 준비와 설거지

주방보조 2004. 2. 8. 00:57
<제97호> 식사 준비와 설거지 2002년 10월 09일

2003년 1월5일까지 앞으로 90일

1.
한동안 또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제정신' 유지하기도 그다지 쉽지 않군요.
실존 앞에서는 생활이,
생활 앞에서는 문화가 한참 뒷전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실존이든, 생활이든, 문화든 간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수시로 흔들리고 순간순간 정신을 놓곤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모자라는 점이 많다는 뜻이겠습니다.

두어 주일 전부터 전 나름대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저 한두 가지에 몰두해 보기로 하자.
할 수 있는 일에만 정신을 쏟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제정신을 좀 차리고 살아보자.

2.
요즘 제 하루를 짧게 요약해 보라고 한다면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준비와 설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설거지를 하고 나면 점심 준비,
점심 설거지를 하면 저녁식사 준비가 눈앞에 닥칩니다.
'전업 주부'의 애환과 고충을 새록새록 느끼고 있습니다.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면 부랴부랴 아침 준비를 합니다.
오치가 일곱시 사십 분쯤 스쿨버스를 타기 때문입니다.
여섯시 사십오 분쯤부터는 아침을 먹기 시작해야
오치는 아침식사를 하고서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오치는 먹는 것이 무척 느립니다.)

요즘 미혜씨는 아침에 무엇이든지 잘 먹지 못합니다.
억지로 죽이라도 먹어보려고 하면 금방 구토로 쏟아내곤 합니다.
그나마 아홉시나 열시쯤 되어야 간단한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일입니다.  
늦은 아침이나 점심때부터는 비교적 괜찮은데 이른 아침에는 뭐든 먹질 못합니다.)
그러니 아침식사 준비는 두 번에 걸쳐 해야 합니다.
어떤 날은 오치와 제가 먼저, 미혜씨가 나중이고,
또 어떤 날은 오치가 먼저, 미혜씨와 내가 나중입니다.

오치가 학교에 가고 미혜씨의 아침식사가 끝나면
설거지와 대강의 청소를 하고 학교에 강의하러 갑니다.
강의를 마치고 찾아오는 학생들과 조금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열두시가 됩니다.
부랴부랴 집에 돌아와서 점심 준비를 합니다.

오후 두시에는 오치가 학교에서 돌아옵니다.
그러면 오치 간식을 먹이고 숙제를 도와줍니다.
네 시쯤 됩니다.
저녁식사를 뭐로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물론 특별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걱정만 합니다.
어떻게든 저녁을 먹고 나면 오후 여섯 시.
요즘은 날이 벌써 깜깜해 지는 시간입니다.

오치가 잠자리에 들고난 다음인 밤 아홉시나 되어야
미혜씨와 저는 비교적 고즈넉한 시간을 갖습니다.
식사나 다가오는 병원 약속 같은 이야기도 하고
미혜씨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곤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녹차를 끓인다든지
과일을 준비하는 일이 생각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먹고 먹고 먹고 그리고 자고'가 계속되는 나날입니다.

식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잘 압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거기로 모아지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혜씨의 상태에서는 '잘 먹는 것'이 치병의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식사 준비와 그 뒤처리가 일과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가끔, 아니 사실은 아주 자주,
하루를 온통 식사 준비와 뒤처리에 바친다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나도 할 일이 있는데....'하는 생각이 뒷통수를 잡아끕니다.

하지만 생각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식사 준비와 설거지....

어쩌면 그것은 지금 이시기에 수행해야할 제 사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제게로 직접 하달된 명령인지도 모릅니다.
궁시렁 궁시렁 하나님한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래도 그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일이나마 '더 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요리에는 젬병입니다.  (요리왕님이 부럽습니다.)
요즘 음식 만들기를 하나 하나 배워가고 있습니다.
특히 '죽 만들기'를 배우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제가 봐도 아직 마뜩치 않습니다.
미혜씨가 군소리 없이 먹어주는 것은 아직도
그저 담백한 쌀죽뿐입니다.

그동안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호박죽, 깨죽 등을 시도해 봤습니다.
미국식 '조개죽'도 시도해 봤습니다.
(여기서는 클램 촤우더(clam chowder)라고 부릅니다.)

혹시 영양이 많고 맛도 있는 죽을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들기가 쉬우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
자세한 조리법(recipe)을 적어 주시면 젬병인 제게는 더없이 큰 도움이겠습니다.

3.
아참, 거의 잊어버릴 뻔 했습니다.
'제정신 차리기'의 일환으로 이 글을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제 게으른 글 올리기에도 불구하고
'탈퇴' 안 하시고 버티시면서 걱정해 주시는 분들에게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다만 '성경의 한국 개념'은 조금 미루고
(그걸 생각하고 조사하고 글로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랍니다.)
그 대신 요즘 제 생활을 나눌까 합니다.
그렇게 라도 해야 제가 사는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맨 앞에 내년 1월5일까지 90일 남았다고 썼습니다.
98년 1월5일은 미혜씨가 처음 진단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03년 1월5일은 만 오년이 되는 날이지요.

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오년'이라는 시간이 이상스레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건 암의 생존률을 오년으로 따지기 때문일 겝니다.
어쨋든 지금으로서는 그 만 오년이 되는날까지 좀 열심히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날 좀 근사한 '기념식(?)'을 가지기에 부끄럽지 않게 해 보려고 합니다.

그냥 아무거나 쓸 겁니다.
칼럼 제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제목도 그냥 두겠습니다.
'성경의 한국 개념'과 '치병(저는 간병)'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는
일종의 '배째라'지요.

미혜씨의 글을 읽어주시고 함께 기도해 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글과 함께 미혜씨의 글도 많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미혜씨는 그 글쓰기와 그 글에 대한 답글 읽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요즘 들어 더 그렇습니다.

4.
내년 1월5일까지 90일 남았습니다.

조정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