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호> [개념] "느끼다"에 대하여 (4) | 2001년 12월 09일 |
성정(性情) 격정 혹은 패션은 성경에서도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됐습니다. 야고보서 5:17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흠정역 영어성경에서는 "Elias was a man subject to like passions as we are"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정이 같다는 표현은 같은 패션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패션이 부정적으로 쓰였다는 점은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명확해 집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이 "수동적이고, 누르기 어렵고, 갑작스럽고, 세찬 감정"에 사로잡히곤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조차도 천기(天氣)를 좌우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입니다. 엘리야처럼 변변치 않은 사람도 기도를 통해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우리와 성정이 같다," 혹은 "우리와 같은 패션을 가졌다"는 표현이 긍정적일 리가 없겠습니다. 성정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딱 한 번 더 나옵니다. 이번에는 사도행전 14:15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루스드라라는 도시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본 루스드라 시민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그리이스의 주신 제우스와 그의 대언자 헤르메스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모여서 이 두 사람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법석을 부린 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이 그들을 말리면서 한 말이 바로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한 것은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이 수동적이고 주체할 수 없는 충동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곤 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도 성정, 즉 패션은 그다지 긍정적인 뜻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평범하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법석을 떠는 당신들만큼이나 우리도 수동적이고 충동적"이라는 자조적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에 따르면 엘리야가 패션, 즉 즉 수동적이고, 누르기 어렵고, 갑작스럽고, 세찬 감정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엘리야의 행적을 보면 그의 감정기복이 심했던 게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왕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일 때의 일입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려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소리지르고 춤추고 심지어 제 몸에 자해행위까지들 하면서 난리를 부렸습니다. 보고 있던 엘리야가 그들을 비웃는데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야, 너네 하나님은 어디 출타중인가보다. 아니면 낮잠을 자고 있던가." 이런 복창 터뜨리는 말을 고함쳐 가면서 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오죽 약올랐겠습니까? 때려죽이고 싶었겠지요. 대결이 엘리아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자 엘리야는 즉각 바알 선지자들을 강가로 끌고 가서 지체없이 칼로 죽여버립니다. 온통 피로 덮인 강물이 눈에 선합니다. 비웃음이 살기로 번졌습니다. 거기까지는 또 그렇다고 칩시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갈멜산의 대결 소식을 듣고도 하나님을 무서워 않고 엘리야를 잡아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브엘세바 근처의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곳의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엘리야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차라리 날 여기서 죽여주쇼." 이게 과연 방금 전에 기세좋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잡아죽였던 승리자의 말일까 의심스럽습니다. 어찌됐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호렙산까지 도망갔습니다. 여기 와서 또 한번 앙탈을 부립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 봉사했는데, 이게 뭡니까? 다 죽고 이젠 나만 남았잖습니까?" 갈멜산 대결 직전에 엘리야가 오바댜라는 선지자를 만났을 때,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살아난 하나님의 선지자가 1백명이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너스레를 보십시오. "나만 남았잖아요?"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고,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러셨습니다. "임마, 너같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칠천 명이나 더 있어." 이게 바로 두고두고 인용될 엘리야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보였던 그의 모습입니다.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가도 다음 순간 세상 무너진 듯 한탄합니다. 시시때때로 기적으로 도우시고, 자나깨나 직접 조언해 주시는 하나님을 스승(mentor)으로 모셨으면서도 그랬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꼭 조울증 환자 같습니다. 좋으면 세상이 제 것인 것처럼 떠들다가, 기분이 나빠지면 비관도 그런 비관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엘리야의 성정(性情)이고 패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아마 이런 모습을 가리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거짓말쟁이일 리가 없으므로 그 자신도 아마 그랬나 봅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
'예수와 우리 > 조정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념]느끼다에 대하여(6-끝) (0) | 2004.02.08 |
---|---|
[개념]느끼다에 대하여(5) (0) | 2004.02.08 |
[개념]느끼다에 대하여(3) (0) | 2004.02.08 |
[개념]느끼다에 대하여(2) (0) | 2004.02.08 |
[개념]느끼다에 대하여(1) (0) | 2004.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