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호> [개념] "느끼다"에 대하여 (2) | 2001년 12월 03일 |
감(感)과 각(覺) 그렇다면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느끼다"도 있을까요? 있습니다. 각(覺)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즘은 각(覺)자가 "깨달을 각"이라고 주로 새겨지지만, 사실은 "느끼다"는 뜻도 있고, "(잠이나 술에서)깨다"는 뜻도 있고 "깨닫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어원적인 뜻에 가장 가까운 것은 "느끼다"라고 봅니다. 각(覺)자를 파자해 보면 금방 나타납니다. 각(覺)은 볼 견(見)자와 변형된 배울 학(學)자의 합자입니다. 즉, "보고 배운다, 혹은 보아서 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보는 것" 뿐 아니라 "듣는 것, 냄새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을 통해서 아는 것으로 확대해석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위 오감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곧 각(覺)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미각(味覺), 후각(嗅覺), 촉각(觸覺)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각(覺)자는 원래 시각(視覺)이라는 말이지만, 그 뜻이 일반화된 이후에는 다시 볼 시(視)자를 다시 덧붙여서 "눈으로 느끼는" 시각(視覺)으로 특수화시켰습니다. 그러니 이 다섯 가지 각(覺)을 오감(五感)이라고 하기보다는 오각(五覺)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또 오관(五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오각(五覺)을 가능하게 하는 기관(器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 코, 입(혀), 귀, 피부가 바로 오관(五官)입니다. 그러므로 오각(五覺)은 오관(五官)을 통해 "느끼는 것, 혹은 그 결과"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感)과 각(覺)의 이런 차이점에 근거를 두어서, "감(感)"은 "주관적인 느낌"을, 그리고 "각(覺)"은 "객관적인 느낌"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타당한 분류는 아니라고 봅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 자체가 그다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당초 주관적이라는 말은 서브젝티브(Subjective), 객관적이라는 말은 오브젝티브(Objective)를 번역하기 위한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한문으로 옮길 때에 사용한 한자가 적합치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관(主觀)을 직역하면 "주인이 본다" 혹은 "주인의 관점"이 됩니다. 그와는 상대적으로 객관(客觀)은 "손님이 본다" 혹은 "손님의 관점"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주관과 객관의 차이는 "이해관계나 책임이 얼마나 걸려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서양식 용어대로 한다면 "주관적"과 "객관적"은 모두 "서브젝티브"가 됩니다. 굳이 오브젝티브라는 표현을 옮기려면 "물체적"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감(感)은 주관적, 각(覺)은 객관적이라는 도식적인 분류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감이건 각이건 모두 사람이 주체가 되어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각(覺)자가 반드시 오브젝티브, 즉 물체적인 측면만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의 파자해(破字解)에서도 보았듯이, 각(覺)의 어원에는 "보고서 '배운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강조점이 "배운다"에 있습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각(覺)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사용한다는 말은 그것이 반드시 오브젝티브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각(覺)에는 "느낌"뿐 아니라 "깨달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심리학의 발달에 의거해서 우리는 어떤 각(覺)도 오관(五官)의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관(五官)을 통해 받아들여진 정보는 뉴우런들을 따라 대뇌로 운송되고 거기서 "해석"됩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서 "느낌"을 갖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각(覺)의 과정은 외부의 자극에 대한 사람의 오브젝티브, 혹은 물체적인 반응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함께 대뇌 (혹은 마음)의 해석활동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感)은 주관적, 각(覺)은 객관적이라는 식의 단순 도식화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감과 각은 서로 상보적인 면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과 각은 정보의 기원이라는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즉 각(覺)은 오관, 혹은 오관에 가해진 모든 종류의 자극이 그 정보원입니다. 그러나 감(感)은 모든 사물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기억과 예측, 생각과 판단, 지식과 의지, 그리고 심지어는 각(覺)까지도 감(感)의 정보원이 됩니다. 그러나 감과 각은 "마음의 작용"을 거친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마음의 활동이 없으면 각(覺)도 완전하지 못하게 되며, 감(感)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감이나 각의 경우, 마음의 활동은 수동적이라는 점에 주의해야합니다. 앞에서 감(感)의 파자해에서도 보았듯이, 사람은 능동적으로 감(感)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정보원, 혹은 자극원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의해서 "상처를 입어야" 생기는 것이 바로 감(感)입니다. 각(覺)도 마찬가지입니다. 각(覺)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오관(五官)을 통해 자극이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런 자극이 없을 때에는 각(覺) 자체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감과 각은 모두 수동적인 마음의 활동, 즉 외부나 내부 자극이 생겼을 때 거기에 수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바로 감이요 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感覺)이라는 합성어가 만들어지고 널리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 감각이라고 하면 각의 의미군과 감의 의미군을 한데 합친 뜻으로 널리 쓰입니다. 물론 그것은 타당한 어법입니다. 앞서 본 주관,객관의 구분이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또 감이건 각이건, 거기에서는 "(수동적이기는 할 망정) 마음의 활동"이 중요한 요소라면 말입니다. "손의 감각이 마비됐다"는 예문은 각(覺)의 의미에 치중된 어법이 될 것입니다. "예술 감각이 있다"는 예문은 감(感)의 의미를 더 강조하는 어법이 되겠습니다. 감(感)과 정(情) 감각(感覺)이라는 말 못지 않게 널리 쓰이는 말이 바로 감정(感情)입니다. 이번에는 감(感)자가 정(情)과 결합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감정(感情)은 "느낀 뜻"이라는 뜻입니다. 느낌이란 "사람의 내외부 자극에 대한 마음의 수동적 반응"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통해서 생긴 뜻이 바로 감정(感情) 혹은 그냥 정(情)입니다. 다시 앞에서 본 바대로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칠감(七感)이라고 하지 않고 칠정(七情)이라고 부른다는 점에 유의해 봅시다. 즉, 그런 감정들은 감(感) 자체가 아니라, 감(感)을 통해서 생긴 "뜻"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외부 자극에 대해 마음이 수동적으로 반응해서 생기는 뜻"이 바로 정(情) 혹은 감정(感情)입니다. 감(感)자 때문에 "수동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감정(感情)의 수동성은 뒤집어 말하면 천부성이라는 뜻도 됩니다. 왜냐하면 배우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기(禮記)에 보면, "하위인정, 희노애락애오욕, 칠자불학이능(何爲人情, 喜怒哀樂愛惡慾, 七者不學而能"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정이란 무엇인가? 희노애락 애오욕이다. 이 일곱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능히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내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도 천부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정의 수동성은 곧 감정의 천부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유교에서든, 불교에서든, 칠정(七情)은 그다지 바람직한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유교에서는 수련과 정진을 통해 그런 감정에 동요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불교에서는 아예 칠정(七情)을 불법을 향한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묘사합니다. 심지어 기뻐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과 같이 사람들이 즐기는 감정까지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의 본디 마음은 어느 방향으로든 쏠리지 않는 평심(平心) 혹은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때문이 아닌가 평정심이란 높낮이나 쏠림이 없는 평평하고 흔들림없이 고요한 마음입니다. 유교와 불교, 심지어 도교에서도 평정심을 마음의 본디 상태라고 가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평정심이 흐트러지는 것은, 그것이 기쁨때문이든 두려움때문이든,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지어 감(感)자에는 "마음이 상처를 입는다"는 어원적인 의미까지 갖게 되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평정이 깨졌다는 말입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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