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앎과 믿음(6-끝)

주방보조 2004. 2. 8. 00:32
<제69호> [개념] 앎과 믿음(6-끝) 2001년 11월 27일


이젠 충분하지 싶습니다.  "알다"란 차이에 따라서 나누어 가르고,  그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다시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곧 다시 묶는
과정입니다.  차이를 잘 설명할수록  앞서 나누인 사물들은 더  단단히 묶일 수 있습니다.  
비록 나누기 이전의 모습과는  달라지기가 십상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쨋든, "알다"란 "차이에 따라 가름과  관계에 따라 묶음"의 과정입니다.   이 두 과정을
한자어로 분석(分析)과 종합(綜合)이라고도 합니다만, 별다른 뜻이 더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가름과 묶음이라는 말로도 충분하지요.

기노스코와 에이도와 에피스타마이, 야다와 나카르와 베네는  모두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앎"에 이르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감을 사용하기도 하고 마음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라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낱말들은 "앎"에
이르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이 사용하는 방법은 모두 "가름과
묶음"입니다.  그 대상이 사물이든 관념이든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앎은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대상과 목적이
같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다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앎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말(명령이나 약속, 설명과
해석)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가 왜 나타난 것인지, 어떻게 서로 연관될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설득당하거나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차이와 관계를 지적할 수는 있습니다.

믿음과 앎은 서로 연결됩니다.  믿음은 앎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가 받아들인 그것을 더 알고  싶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게을러서 앎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천박해집니다.  

김진홍 목사님 비유대로 하면, 비오는 날 반갑다고 달려드는 삽살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는 좋아서 그럴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은 아주 괴롭습니다.  

한편, 앎은 믿음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 반믿음으로  나아가게도 합니다.  알면서  
설득당하면 사람이 깊어집니다.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면 믿음을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는 사람이 믿음을 비웃기 시작하면 아주 무섭습니다.  티플리스의 신학생이던 스탈린은
정권을 잡자 수백만명을  숙청했습니다.  앎과 믿음은 상보관계에 있으면서도 조건에 따라
때로 무서운 긴장을 낳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님께 잘 설득당하기만 했다면 몰라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오는 날 삽살개는  그저 귀찮은 정도 아닙니까?  
흙탕 튀긴 옷을 갈아입으면 그만이지요.

그렇지만 혹시  길 가다가 변심한 신학생을 만나면
얼른 다른 길로 도망가는 게 신상에 이롭겠습니다.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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