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호> [개념] 앎과 믿음(5) | 2001년 11월 23일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discern) (마 16:3) 며느리밥풀 꽃을 아십니까? 저는 그게 어떤 풀의 꽃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이현세씨의 만화 제목에서 보았을 뿐입니다. 실제로 며느리밥풀을 본 적도 없습니다. 야후 (두산동아) 백과사전을 보니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현삼과의 반기생(半寄生) 한해살이풀"로 풀리어 있습니다. 학명(學名)은 멜람피룸 린네아레(Melampyrum lineare)랍니다. 그 새 정보를 가지고 며느리밥풀이나 그 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몰랐을 때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아직 모자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기(서치)를 통해서 카우휘트(cowwheat)를 찾아보았습니다. 한 싸이트(http://2bnthewild.com/plants/H151.htm)에서 사진을 실어 놓았습니다. 사진을 보고 나니까 이제 "며느리밥풀과 그 꽃을 좀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삼아 그 사진을 첨부합니다). 며느리밥풀을 안다는 것은 다른 많은 풀들 중에서도 그것을 골라낼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현삼과의 반기생(半寄生) 한해살이풀"이라는 설명으로는 그게 아직 안됩니다. 그 정의에 해당하는 풀이 며느리밥풀 말고도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걸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더더우기 모릅니다. 그래서 시청각 학습이 중요한가 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피부로 느껴서 아는 것은 아주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앎입니다. 그게 바로 히브리어의 "나카르," 헬라어의 "에이도," 영어의 "퍼시브"입니다. 한국말로는 "인지하다, 감지하다"는 낱말이 사용되는데, "오감으로 알아차리다"는 원래의 의미로 보아서 "감지(感知)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느낌을 통해 알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아십니까?"하면 저는 "네"합니다. 어떻게 제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와 이러저러하게 다르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통계학(統計學) 예를 봅시다. 정규분포를 아십니까? 네. 어떻게요? 그것을 다른 종류의 분포와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은요? 사랑은 이러저러한 특징이 있어서 다른 개념들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뿐입니까? 사회학, 컴퓨터, 움베르토 에코, 한국어, 에스피에스에스, 백범 김구, 알바니, 동 이족, 조오치, 유닉스, 던킨 커피, 민중서림의 신자해, 모빌의 레귤러 휘발유 등등도 저는 압니다. 그런 것들을 다른 것들로부터 나누어 갈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어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입니다. 던킨 커피를 스타벅스 커피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던킨 커피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둘 사이의 "차이(差異)" 즉 "서로 어긋나는 다른 점"을 따라서 던킨 커피를 갈라 세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누어 가르는 데에는 "차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럼 "차이를 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안다는 것은 차이를 따라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차이를 안다"는 말은 차이의 대가 되는 "같음"을 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다"는 "같음과 다름을 따라서 나누어 가른다"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같음은 다름의 정 반대말이므로 그냥 "다름을 따라서"라고만 해도 충분합니다. 차이에 따라 나누어 갈라낼 수만 있으면 "앎"이 됩니까? 저는 그 다음에 한 단계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누어서 갈라냈기 때문에 전에 하나였던 것이 이젠 서로 다른 두 개(혹은 그 이상)가 되었습니다. 단편적인 앎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를 메꿔 주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그 메꾸는 과정은 "갈라내는 과정"에서 저절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는 같지만 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 같음과 다름에 대한 생각 자체가 그 둘 (혹은 그 이상)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가르는 과정에서 관계가 적절하게 맺어지지 않으면 새로 그것을 설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샤도네이(Shadonay)와 멜로(Merlot)는 모두 포도주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색깔이 다르지요. 하나는 투명하고 다른 하나는 빨갛습니다. 왜 차이가 납니까? 사용하는 포도의 종류가 색깔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포도주에 대해 좀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의 종류와 색깔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도입해서 차이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1992년 보르도산 멜로"와 "1993년 투스카니산 키앙티"를 나누어 갈라 보십시오. 이걸 알려면 우선 서로 다른 두 지방의 당시 포도작황, 수확한 시기, 제조할 때에 사용한 첨가제, 숙성시킬 때에 사용한 용기와 숙성 기간, 병입 방법과 시기 등의 상당히 많은 변수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지요. 그 설명에 성공하면 비로소 두 포도주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차이를 설명한다는 것은 곧 그 차이가 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물 사이의 관계를 설정해 준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변수들을 도입해서 말이지요. (같은 부분이 워낙 많으면 흔히 '비슷하다'는 말도 쓰지만 여기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조정희 드림. ----------------------------- 어떤 며느리 밥풀 꽃은 붉습니다. 젊은 여인네 입술처럼 붉은 꽃 속에 하이얀 밥풀이 두 개.... ![]() |
'예수와 우리 > 조정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념]느끼다에 대하여(1) (0) | 2004.02.08 |
---|---|
[개념]앎과 믿음(6-끝) (0) | 2004.02.08 |
[개념]앎과 믿음(4) (0) | 2004.02.08 |
[개염]앎과 믿음(3) (0) | 2004.02.08 |
[개념]앎과 믿음(2) (0) | 2004.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