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느끼다에 대하여(3)

주방보조 2004. 2. 8. 00:35
<제72호> [개념] "느끼다"에 대하여 (3) 2001년 12월 06일


열정(熱情)과 격정(激情)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삼부작 "대부(代父, Godfather)"를 아시지요?  자로 잰 듯한 연출에
연기자들이 1백50퍼센트 부응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전체 내용뿐 아니라 인상적인 장면
장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3부에 나오는 알 파치노(마이클)와 앤디 가르시아(빈센트) 사이의 짧은 대화 장면을
좋아합니다.  빈센트는 1편에서 함정에 걸려 죽은 제임스 칸(쏘니)의 아들이고, 형을
대신해서 돈(Don)이 됐던 마이클은 이제 그 자리를 빈센트에게 넘겨주려고 후계자
수업중입니다.  

빈센트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침대에 누운 마이클이 숨을 몰아 쉬며 말합니다.  
"쏘니는 .... 투 머치 패션 ....(Sonny had .... too much passion)"

패션(passion)은 흔히 한국말로 정열(情熱), 열정(熱情), 혹은 격정(激情)이라고 옮깁니다.  
국어사전(야후)에는 정열을 "어떤 일에 대해 가슴속에서 세차게 일어나는 적극적인
감정"이라고 풀고 열정을 "열렬한 정열"이라고 새겼는데, 이 두 풀이는 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정열을 "--한 감정"이라고 본다면, 한문법상 감정을 나타내는 정(情)자가 뒤에
놓여야 맞습니다.  --에 해당하는 수식어가 바로 열(熱)이지요.  

재미있는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情)을 감정(感情)으로 푼 것입니다.  
정(情)=감정(感情)이랍니다.  양변을 정(情)으로 나누어 소거(消去)하면, 1=감(感)이 되지요.  
곱셈, 나눗셈에서 1은 있으나 마나니까, 다른 곳에서는 흔히 "느끼다"로 풀리는 감(感)은
여기서는 아무 뜻도 없는 공집합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이 점은 나중에 다시
한번 보십시다.

한편 "열렬한 정열"로 풀린 열정(熱情)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의 열(熱)을 "뜨겁고
맹렬하다"는 뜻인 열렬(熱烈)의 약자로, 뒤의 정(情)을 정열(情熱)의 약자로 본 것이지요.  

똑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열(熱)=열렬(熱烈), 1=렬(烈).  또 정(情)=정열(情熱), 1=열(熱).  
그러므로 "세차다, 맵다"는 뜻의 렬(烈)자와 "뜨겁다"는 뜻으로 풀리곤 하는 열(熱)은
여기서는 공집합이 되는군요.  사전적 정의를 왜 이렇게 성의 없이 만드는 지 모르겠습니다.

연세대에서 펴낸 한국어 사전도 비슷합니다.  열정(熱情)을 "뜨거운 사랑의 감정," 혹은 "어떤
일에 정신과 마음을 기울여 열중함"이라고 풀고, 정열(情熱)을 "(무엇을 하려고 하는) 강렬한
마음. 열렬한 감정"이라고 새겼습니다.  야후 사전과 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정열(情熱)과 열정(熱情)은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쓰인 한자가 같기
때문이지요.  한자의 순서를 굳이 고려한다면 정열보다는 열정이 더 낫습니다.  열(熱)은
수식어이고 정(情)은 체언이므로 한문법상 수식어가 체언의 앞에 오는 게 맞기 때문입니다.  
"불타듯 뜨거운 정(情)"이라는 말입니다.  굳이 정열을 열정과 다른 것으로 보려면 "정의
열기, 즉 정의 세기"정도로 풀어야겠지요.

열정과 비슷한 말로 격정(激情)이 있습니다.  연세대 한국어 사전에서는 격정을 "세찬
감정"이라고만 풀었습니다만, 야후 사전에서는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어려운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후자에는 세 가지 수식어가 사용됐지요.  "강렬하다," "갑작스럽다,"
"누르기 어렵다."  

나중에 다시 보겠지만, 이것은 아주 괜찮은 사전적 정의입니다.  열정(熱情)이 그 강렬함과
갑작스러움과 누르기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불(火)의 비유를 수식어로 사용했다면,
격정(激情)에서는 물(水)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격(激)은 물결이 세차게 부딪혀 흐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열정과 격정이 유사한 말이라고 하지만, 용법에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열정(熱情)은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격정(激情)은 부정적인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예문을 보십시오.  

"민수는 그녀에게 강한 열정을 느꼈다.  조국에 대해 끓어오르는 열정을 느꼈다."  그리고
"격정에 사로잡혔다.  복받쳐 오르는 격정을 겨우 억누르며 혜영은 나직이 물었다."  
강렬함과 갑작스러움과 누르기 어려움의 정도에 있어서 격정이 열정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어의 패션(passion)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웹스터 사전에 보면
패션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뜻이 "수난" 혹은 "고통을 견딤"입니다.  세 번째 이후에 가서야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상태나 능력," 혹은 "(이성의 반대로서의) 감정(emotion), 감성,
주체할 수 없는 충동적 느낌이나 확신" 등의 뜻이 나옵니다.  

요컨대 패션이란 "수동적이고, 통제가 어렵고, 충동적인 감정"이란 말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부의 장면에서도 마이클은 빈센트에게 "너는 느이 아버지처럼 패션에 휘말리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중입니다.  즉, 수동적이고 통제가 안된 충동적인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패션의 정의 가운데 이모우션(emotion)을 수식하기 위해 "수동적이다," "통제가 어렵다,"
"충동적이다"가 쓰였습니다.  "통제가 어렵다"는 격정의 "누르기 어렵다"에 해당하고
"충동적이다"는 격정의 "갑작스럽다"에 해당합니다.  다만 "수동적이다"는 격정의 수식어에
빠져있고, "세차다"는 패션의 수식어에서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 때문에 패션과 격정을 다른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패션과 격정을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의미를 "수동적이고, 누르기 어렵고, 갑작스럽고, 세찬 감정(이모우션)"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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