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느끼다에 대하여(5)

주방보조 2004. 2. 8. 00:37
<제74호> [개념] "느끼다"에 대하여 (5) 2001년 11월 25일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가문과 학력이 빵빵했습니다.  요즘
미국식으로 하면 부시 가문에서 태어나서 스와트모어 칼리지에서 학부를 마치고, 로즈
장학금을 받아서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한 다음, 하바드에 돌아와서 가르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만큼 배웠으면 사람이 좀 점잖을 법도 한데 사울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웬 나사렛
촌놈이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하고 다니다가 극형을 받아 죽었는데, 그 후에도 추종자가
많다는 소리를 듣고 영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 제대로 걸린 게 스데반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몰려들어 돌로 쳐죽인
일이 생겼는데, 그 현장에서 사울이 "내가 책임 질 테니까 죽여라"했던 모양입니다.  
스데반의 유창한 복음 설교를 듣고서도 마음이 꿈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8:1에 보면,
그의 처참한 주검을 확인하면서도 사울은 그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도 예수의 추종자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눈에 불을 켰습니다.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서 예루살렘에서 약 1백50마일 정도 떨어진 다메섹까지 예수의
제자들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1백50마일이면 알바니에서 뉴욕시티까지의 거리입니다.  
요즘은 자동차로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습니다만, 2천년 전의 1백50마일은 상당한
거리입니다.  걸어서 가야했을 테니까, 편도 사흘 길은 족히 되었겠지요.  그나마 길이라도
좋았겠습니까, 그렇다고 강도와 도적떼가 우글거리니 안전하기를 했겠습니까?  

그런 걸 다 무릎쓰고 사울은 다메섹으로 떠납니다.  참 대단한 성깔입니다.  사도행전
9;1에는 다메섹으로 떠나는 사울의 모습을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울이 얼마나 악독하게 굴었던지 회심한 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서 사귀려고 하니까 다 무서워서 설설 기면서 그의
회심을 믿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회심을 하고 나서도 그의 성격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예수님
제자들에게 바울을 소개하고 밀어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직접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가서 둘이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거기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처음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의 명석함과 바나바의 온유함이 절묘한 콤비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어쨋든 바나바는 바울을 복음전도자로 데뷔시킨 사람이자 지속적인 후원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죽이 아주 잘 맞았기 때문에 전도여행도 늘 같이 다녀서 큰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지도 절친한 이 두 사람은 안디옥에서 한번 대판 싸우게 됩니다.  마가라는
젊은이를 전도단에 끼워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언쟁을 벌인 것입니다.  싸움이 있으면
아무래도 양쪽이 다 문제가 있겠지만, 대개는 좀 더 나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원칙론과 타협론이 맞붙으면 대개 강경한 원칙론이 말발이 더 서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배신자를 끼워줄 수 없다'는 원칙론이었고, 게다가 성깔이 지독하니까 끝까지 버텼을
것입니다.  비교적 부드럽고 온유한 바나바는 마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울과
결별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말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다른 제자들을 무수히
핍박했던 제 과거를 잠시라도 생각했었다면, 과연 바울이 그다지도 마가에게 모질게 굴어도
되느냐는 겁니다.  결국 마가는 바나바의 훌륭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성정과
패션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엘리야고 바울이고, 이 정도의 성격이면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할 만 합니다.  적어도
저하고는 비슷합니다.  "욱"하는 성격 말입니다.  "성정(性情)이 같다"는 헬라어 표현은
"호모이오파테스"(`          )입니다.  "같다"는 뜻의 호모이오스(`   ios)와 파토스(   os)가
합쳐진 말입니다.  이 파토스는 동사 파스코( '    )의 명사형으로 그 뜻은 "영향을 받다,
느끼다, 감각적 경험을 하다, 겪다"입니다.  

그런데 이 파스코라는 동사에는 원래 나쁜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뜻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슬픔 등의 나쁜 감정에 휘말리다, 불쾌한 감각을 갖게 되다, 병을 앓다"는 뜻도
있지만, "큰 기쁨 등의 좋은 감정에 휩쓸리다, 매우 풍족한 느낌을 경험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사용되었을 때에는 압도적으로 나쁜 뜻이 많습니다.  42번의 파스코
중에서 40번이 나쁜 뜻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원적으로는 긍정과 부정의
양립적인 뜻을 가진 중립적인 낱말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패션보다는 한국
한자어의 열정이나 격정에 더 가까운 말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열정과 격정, 그리고 패션은 약간의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수동적이고,
누르기 어렵고, 갑작스럽고, 강렬한 감정(혹은 이모우션)"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마치 한국어 개역 성경에 쓰인 성정(性情)이라는 말이 열정(熱情)이나
격정(激情)과 동일한 말인 것처럼 서술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성경 번역자들은 열정이나 격정이라는 더 쉽고 보편적인 말 대신에 성정이라는 드문 말을
굳이 골라 썼을까요?  더구나 열정, 특히 격정은 헬라어 파스코와 영어 패션의 완벽한
번역어로서 손색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

게놈 프로젝트에 의거해서 만들어진 "맞춤 아이"가... "개놈"이 된 사연....

http://column.daum.net/Column-bin/Bbs.cgi/picture/qry/zka/B2-kCI7n/qqo/PRMY/qqat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