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헤아리다에 대하여(1)

주방보조 2004. 2. 8. 00:39
<제76호> [개념] "헤아리다"에 대하여 (1) 2001년 12월 20일


말싸움을 할 때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라"가 그것입니다.  
물론 그다지 잘 실천되는 말은 아닙니다.  대개 싸움에 불리한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입장이 유리한 사람은 그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한테
유리한데 뭐 하러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려고 하겠습니까?  그냥 밀어붙이면 되지요.  

그런데 인류의 성현(聖賢)들이 가르친 윤리적 교훈의 핵심은 바로 "입장 바꿔 생각하기"에
모아져 있습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도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누가복음 6:31)"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현들의 궁극적인 윤리적 가르침이 이 정도로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자명하면서도 중요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고 했겠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진짜로 입장이 바뀌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가서는 "되"로 준
것을 "말"로 받게 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그런 경고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마태복음 7:2의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헤아리다"가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헤아리다"는
"느끼다," "생각하다," "깨닫다"와 함께 한국 사람들의 인식과 지각의 과정을 가리키는 아주
중요한 인식동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어법에 나타난 "헤아리다"의 뜻은 원래의 뜻에서 상당히
멀어져서 모호해졌으며, 그 때문에 거꾸로 한국 사람들의 인식 작용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저는 "어의(語義)의 엔트로피"라는 말을 쓰고자 합니다.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란 "물체의 무질서 정도가 늘어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개념이 언어 및 개념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말나 개념을 세심하게 돌보지 않고 방치하면 그 말과 개념이 갖는 뜻의 무질서도가 점차로
증가하며, 결과적으로 그 말과 개념의 뜻이 모호해집니다.  그러면 그 말과 개념의 유용성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말이나 개념을 가지고 학문이나 문학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일상적인 의사소통까지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헤아리다"는 말이 이미 상당한 정도로 엔트로피의 과정을 겪어왔다는 점을
밝히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원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날의 "헤아리다"의 뜻과 어법으로부터
시작해 과거의 문헌을 통해 원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야후 국어사전과 연세대 한국어 사전을 종합해 보면 "헤아리다"는 네 가지 뜻으로 풀립니다.  
"① (사물을) 분간하거나 가늠하다; ② (어떤 일을) 미루어 생각하거나 짐작으로 살피다; ③
(수량을) 세다; ④ (사물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르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중에서 네 번째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르다"는 사람을 주어로 해서는 쓰이지 않습니다.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의 군사는 백만을 헤아렸다"는 예문에 보이는 것처럼, 이 어법에서는
항상 사물이나 사람의 수(數)가 주어가 됩니다.    

이 글의 목적은 사람이 주어일 때 인식동사인 "헤아리다"가 어떤 뜻을 갖는지를 살피는
것이므로, 마지막 뜻은 논의에서 빼고자 합니다.  실제로 야후 한영 사전에서는 "헤아리다"를
"① 신중히 생각하다, consider; ② 추측하다; ③ 수량을 세다"의 세 가지로 풀었습니다.  
"세다"와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르다"라는 두 뜻을 한데 묶은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첫 번째의 뜻인 "분간하거나 가늠하다," 혹은 "신중하게 생각하다"라는
뜻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분간하다.

분간(分揀)은 나눌 분(分)자와 가릴 간(揀)자의 합자입니다.  "나누어 가리다"는 뜻이지요.  
그것은 "나누어 가르다"는 분별(分別)의 뜻이 아주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뜻 차이는 아주 큽니다.  

물론 그 차이는 "가리다(揀)"와 "가르다(別)"에 있습니다.  "가르다"는 단지 "차이에 따라
따로 놓는다"는 뜻이지만, "가리다"는 "그렇게 갈라놓은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내다"는
뜻입니다.  

그 점은 간(揀)자의 파자해를 보면 분명해 집니다.  간(揀)은 손 수(手)자와 묶을 속(束)자의
합자입니다.  속(束)자는 다시 나무(木)를 에워싼다( )는 뜻이므로 곧 "나무를 묶는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나무를 골라서 묶어내는 것이 바로 간(揀)자의 뜻입니다.

따라서 분간(分揀)은 분별(分別)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마음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누어 가르"는 데에 머물지 않고, "나누어 가리"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차이에 따라 구별하는 데에는 주체의
가치관이 개입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객관적인 차이를 따라서 나누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분간을 하기 위해서는, 즉 이미 구별된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주체의 가치관이 작용해야 합니다.  즉 "더 중요하다, 더 아름답다, 더 좋다, 더 필요하다, 더
유용하다"는 등의 비교(比較)와 판단(判斷)의 작용이 개입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와 판단이 가능하려면 "가리"는 활동에 필요한 "기준"과 "잣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겠지만, 분별(分別)이 "생각하다"에 상응하는 말이라면, 분간(分揀)은
"이해하다"에 상응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분간(分揀)"이라는 마음의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가치관 등의 어떤
기준과 잣대가 필요하다는 점과, 그런 기준과 잣대를 사용하는 정신 활동이 바로
"헤아리다"임을 한번 더 지적해 두는 데에 그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