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개념]헤아리다에 대하여(2)

주방보조 2004. 2. 8. 00:40
<제77호> [개념] "헤아리다"에 대하여 (2) 2001년 12월 23일


가늠하다

다음으로 "헤아리다"의 첫 번째 뜻을 푼 "가늠하다"는 낱말을 봅시다.  다시 앞의 두
국어사전을 종합해 보면 "가늠하다"는 "① (목표나 기준에 맞추어서 사물의 수준이나 정도를)
알아내다. ② (일의 상황이나 형편을) 미루어 짐작하다"라고 풀리어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가늠하다"의 두 가지 뜻이 조금 상충되어 보입니다.  우선 "목표나
기준에 맞는 정도를 알아내다"는 말에는 정확성을 추구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만, "미루어
짐작하다"는 말에는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한 가지 낱말이 정확성과 부정확성을 동시에 함의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것이
원래 의미에 가까운 것일까요?

총을 쏠 때에 우리는 "가늠자"를 씁니다.  가늠자란 "목표물을 바로 겨냥하는 데 쓰이는 총의
눈금 장치"를 가리킵니다.  목표를 명중시키려면 눈과 가늠자와 목표물이 "정확히" 일치해야
합니다.  "정확(正確)"이란 말 그대로 "똑 바르고 확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저
"짐작"으로 총을 쏘아서는 목표물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늠하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아마도 "정확성"을 가리키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가늠하다"와 비슷한 말로 "겨누다" 혹은 "겨냥하다"가 있습니다.  "겨누다"는 기본적으로
"가늠하다"와 뜻이 같습니다.  "총이나 활, 창 등으로 목표를 명중시키기 위해서 그리로
똑바로 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정확성을 추구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국어 사전에 보면 "겨누다"의 두 번째 뜻으로 "(물건의 길이, 넓이 등을 알기 위해)
대중이 될 만한 다른 물체로 마주 대어 헤아리다"도 실려 있습니다.  "대충 알아내다"는
뜻입니다.  정확성이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겨냥하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겨냥하다"는 "겨누다"가 명사화된 "겨냥"에 "하다"가
붙어서 된 말일 수도 있고, 한자어 견양(見樣)의 변형어로도 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겨냥하다"에 "대충"의 뜻이 포함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겨냥하다"가
"겨누다"의 파생어라면 "목표물을 똑바로 향하다"는 뜻과 "미루어 짐작하다"는 상반된 뜻을
가지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한국말에서 비슷한 뜻을 가진 "가늠하다," "겨누다," "겨냥하다"가 모두 "정확성"과
"부정확성"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낱말들의 뜻이 원래 정확성과
부정확성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동시에 가리키도록 만들어지거나 사용되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상반된 개념을 위해서는 보통 서로 다른 낱말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낱말들은 원래 정확성을 가리키도록 고안되었는데, 어떤 이유로든 그 뜻이
모호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어의(語義)의 엔트로피"과정이
작동한 것입니다.  어의(語義)의 혼란도를 다시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원래의 뜻을 되살려보고
언중의 필요에 따라서 그 어법을 잘 다듬고 가꾸어야 합니다.

"가늠하다," "겨누다," "겨냥하다"는 원래 "정확성"을 나타내기 위한 말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정확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뜻이 변했습니다.  그런 어의 혼란 현상은
"가늠하다"를 풀기 위해 사용된 ""미루어 짐작하다"는 말을 살펴보면 다시 한번 분명해
집니다.  

"헤아리다"를 풀기 위해 "가늠하다"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가늠하다"를 풀기 위해서
"미루어 짐작하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서 정리한 바대로 "헤아리다"의 두
번째 뜻이 바로 "미루어 짐작하다"입니다.  

이렇게 보면 "헤아리다"의 첫 번째 뜻과 두 번째 뜻에는 차이가 없어져 버립니다.  "분간하고
가늠하다"와 "미루어 짐작하다"가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전들이 이 두 뜻을
다른 항목으로 갈라놓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 두 뜻은 같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약간만 천착을 하면 그 뜻의
명확성들이 모호해져 버립니다.  어의의 엔트로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짐작하다

어의의 엔트로피 현상은 "가늠하다"를 푼 "짐작(斟酌)"이라는 말에도 나타납니다.  술따를
짐(斟)자와 술따를 작(酌)자의 합자어입니다.  술따르는 일이 "가늠하는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특히 "짐작하다"가 "목표를 똑바로 향하게 하다"는 첫 번째 뜻과는 구별되는 두 번째의 뜻,
즉 "미루어 추측하다"는 뜻으로 풀린 것이라면, "짐작하다"와 "추측하다"가 같은 뜻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인지 살피 보기 위해서 짐작(斟酌)의 파자해(破字解)를
봅시다.

짐(斟)자는 심(甚)자와 두(斗)자의 형성(形聲)자입니다.  심(甚)은 소리를 나타내고 두(斗)가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짐(斟)은 결국 "술따르는 국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에도 이 두(斗)자가 나옵니다.  "북쪽 하늘의 일곱 별로 이루어진 큰
국자"라는 말이잖습니까?  국어 사전에서는 국자를 "국을 뜨는 기구"라며 순 한국말로
풀리어 있습니다만, "술뜨는 기구" 즉 국자(麴子)라고 쓸 수 있는 한자어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한편 작(酌)자는 유(酉)자와 작(勺)자로 된 합의(合意)자입니다.  유(酉)자는 요즘 간지의
하나로 "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원래는 "술" 혹은 "술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유(酉)자가 들어 있는 글자들은 전부다 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작(勺)은 술 퍼내는 작은
국자, 즉 구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짐(斟)자와 작(酌)자는 모두 술을 따르는 데에
사용되는 국자와 구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술을 따르는 데에도 병을 사용하니까 국자나 구기가 필요없습니다만 이 한자들이
만들어졌을 당시만 해도 술은 동이에 담그고 마실 때에는 국자나 구기를 써서 잔에 따라
마셨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짐작(斟酌)이란 원래 국자나 구기로 술을 퍼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짐작(斟酌)이 "헤아리다, 겨누다, 가늠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일까요?  

한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옛날에는 술을 아무나 함부로 마시는 음식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궁정에서 천자나 왕, 제후들이야 마시고 싶을 때에는 마음껏 마셨겠지만 (그게
주로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의 술 마시는 장면들입니다), 일반 서민들한테는 제사 때나
쓸 수 있는 귀중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술독에서 술을 퍼낼 때에는 참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쓸
만큼의 양을 정확히 떠서 흘리지 않고 술잔에 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짐작(斟酌)이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추측하다"는 뜻이 아니라 "잘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오늘날의 중국어에서 발견됩니다.  현대 중국어에도
짐작(斟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뜻은 한국 한자어의 뜻과는 사뭇 다릅니다.  현대
중국어의 짐작(斟酌)은 "깊이 생각하다, 심사숙고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문헌에 짐작(斟酌)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6세기 후반 혹은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쓰여진 "국어(國語)"인 것으로 보입니다(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도
사용되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적어도 2천5백년 동안 중국어의
짐작(斟酌)은 "깊이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에서는 그 뜻이 "미루어 알다, 혹은 추측하다"로 변했는지 이유를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술이 흔해지거나 병이 발달하면서, 퍼낼 술의 양을 정확히 헤아리거나
조심스럽거나 행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짐작(斟酌)의 뜻이 "대충
퍼내는 일"로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에서는 짐작(斟酌)의 의미가 원래대로 보존된 반면,
한국에서만 의미의 모호화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그 말의 원래적 의미를 보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었다는 설명 이외에는 달리 그 까닭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살핀 사정들을 고려하면 "헤아리다"의 첫 번째 뜻인 "분간하고
가늠하다"는 원래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깊이 생각하다"는 뜻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헤아리다"를 설명하는 말로 동원된 "가늠하다," "겨누다," "겨냥하다," "짐작하다"등의
낱말들이 모두 정확성과 세심한 주의를 가리키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확성과 세심한 주의가 "생각하다"에 적용된 것이 바로 "헤아리다"의 의미입니다.  
명중시키기 위해 총이나 활을 가늠하고 겨누는 것처럼, 그리고 흘리지 않고 술을 정성스럽게
잘 따르는 것처럼, "목표나 기준에 맞추어서 사물을 차근차근 생각하는 것"이 바로
"헤아리다"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헤아리다"의 첫 번째 뜻, 즉, "분간하고 가늠하다"란 곧 "차근히 생각해서
중요한 것을 뽑아내거나, 목표를 맞추기 위해 정확히 겨눈다"는 어원적인 뜻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