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호> [개념] "느끼다"에 대하여 (6-끝) | 2001년 12월 16일 |
격정 혹은 열정이라는 말을 보면서 정(情)은 감정(感情)과 거의 동일한 말로 생각했습니다. 또 일견 그것은 타당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앞의 "느끼다"부분에서 보았지만, 감(感)과 정(情)은 그 함축적인 의미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感情)을 합해서 써도 더 더해지는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왜 같은 뜻의 글자를 두 번 썼을까요? 아마도 한국의 한자어에서는 외자를 피하고 두자 혹은 세자 합자어를 선호해 온 관습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문제는 이제 성(性)자가 되겠습니다. 성정(性情)은 "어떤 감정이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국어사전들을 보면 "성질과 심정. 또는, 타고난 본성. 성품(性稟)"(야후), 혹은 "사람의 타고난 성질과 감정"(연세대)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한영 사전에는 성정(性情)이 one's nature, disposition, character, temper" 등으로 풀리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기질, 본성, 성품"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낱말들입니다. 두 사전의 정의를 보면 모두 "성질과 심정" 혹은 "성질과 감정"이라고 제시함으로써 성(性)과 정(情)을 대등하게 놓고서 각각이 무엇의 약자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性)은 두 사전에서 똑같이 성질(性質)이라고 했고, 정(情)은 심정(心情)과 감정(感情)으로 달리 풀리었습니다. 심정과 감정이 어떻게 다른지는 여기서 꼬치꼬치 다룰 게재는 아니지 싶습니다. 다만 두 사전의 다른 한가지 공통점인 "타고난"이라는 형용사에 주목해 보십시다. 성과 정이 모두 명사를 나타낸다면 이 "타고난"이라는 형용사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성(性)자가 "타고난"이라는 뜻으로 쓰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성(性)은 원래 그보다 훨씬 심오한 뜻을 가진 글자요 개념입니다.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 보면 성(性)은 리(理) 개념과 함께 인간(人間)과 우주(宇宙)를 움직이는 두 개의 축입니다. 리(理)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요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우주를 우주 되게 하는 것이요, 만물은 그것의 지배에 순응함으로써 제 기능을 다할 뿐 아니라 다른 만물들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우주의 근본 원리를 리(理)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나라 시대에 성립한 신유학의 전통에서였습니다. 그 전에는 리(理)보다는 하늘(天)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했지요. 그래서 우주 만물의 생성과 지속과 소멸을 관장하면서 그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천(天), 혹은 리(理)였던 것입니다. 우주를 우주 되게 하는 것이 리(理)라면,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은 바로 성(性)입니다. 유학 전통에 따르면 성(性)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즉 하늘(天)이 사람을 낼 때에 그 자신의 속성을 사람 속에 심어주는데 그것이 바로 성(性)입니다. 그래서 성(性)은 두 가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우선, 성(性)은 사람이 태어난 후에 환경이나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또 일단 일정한 성을 갖게 되면 환경이나 노력에 의해 잘 변하지 않습니다. 즉 성(性)의 두 가지 속성은 천부성(天賦性)과 지속성(持續性)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이를 성(性)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性)은 천부적이고 지속적입니다. 요즘은 성전환 수술이 가능해져서 지속성의 측면이 좀 약화되기는 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입니다. 이 성(性)은 태어나면서 갖는 속성이자 자기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性)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성정(性情)이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어 평생 유지하는 정(情)"입니다. 그것을 기질(氣質)이라고도 하고 품성(稟性)이라고도 합니다만, 저는 그게 좀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기(氣)라든가 질(質), 성(性)이라든가 정(情) 등의 개념 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점은 나중에 천착하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성정이 어떤 개념인지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정(性情)은 "타고난 정(情)"입니다. 정(情)은 감정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일곱 가지 감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와 같은 세기의 정(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喜)와 낙(樂)과 애(愛)를 특별히 많이 갖고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 되겠습니다. 반대로 노(努)와 애(哀)와 욕(慾)을 많이 갖게 되면 아주 비관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희(喜)나 애(愛)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희(喜)가 지나치면 멍청해질 것이고, 애(愛)가 지나치면 카사노바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험을 치를 때에야 "모든 정(情)을 골고루 가져서 중용(中庸)을 이루어야 한다"가 정답이겠습니다만, 어디 세상이 마음대로 됩니까? 어떤 종류의 정(情)이든 그것이 지나치면 격정과 패션의 원인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애(哀)와 악(惡)의 성분이 좀 많은 편이고, 바울은 노(努)와 욕(慾)이 좀 강했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성정(性情)이란 결국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되는 칠정(七情)의 분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영어의 템퍼라먼트(temperament)이기도 하고, 헬라어의 파토스( )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야고보와 사도 바울이 "성정이 같다"고 말한 의미가 아닐까 싶군요. 그러나 정작 타고난 칠정(七情)의 분포가 어떻게 다른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정(性情)의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정(情)에든지 지나치게 되면 격정(激情) 혹은 열정(熱情)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또 그런 열정이나 격정이 없다면, 사람 사는 재미도 훨씬 덜할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조성하신 섭리와 방법은 참 기기묘묘(奇奇妙妙)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탄스럽군요. "뜻"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각(覺)에서부터 시작해서 감(感)과 정(情)을 거쳐서 성정(性情)에 이르기까지 "느끼다"에 관련된 마음 상태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처음 질문은 아직 대답되지 않았습니다. "뜻"이 뭐냐는 뜻입니다. "느낌을 통해 이루어지는 뜻"이 감정이라고 한다면, 다른 방도로 이루어지는 "뜻"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의(意)와 지(志)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의(意)는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뜻"입니다. 지(志)는 "마음을 다져먹음으로써 이루어지는 뜻"입니다. 의(意)와 지(志)에 대해서는 다음 절들에서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정의지(情意志)가 모두 "뜻"이며, 그들간의 차이는 그 뜻을 형성하는 데에 사용되는 마음의 작용이 다르다는 데에 있음을 지적해 놓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정의지(情意志)에 모두 공통되는 요소, 즉 세 "뜻"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음이 작용해서 이루어 내는 모든 것은 바로 "뜻"입니다. 마음이 수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뜻은 정(情)입니다. 마음이 생각이나 다짐과 같은 적극적인 작용을 한다면, 그때에는 지(志)나 의(意)라는 뜻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뜻"이라는 말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 곧 뜻(意)이겠습니다. 조정희 드림.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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