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다시 사랑에 대하여

주방보조 2004. 2. 7. 09:28
<제9호> 다시 "사랑"에 대하여 2001년 07월 19일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휘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도 많이 열린다"

눈에 익으신 구절이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용비어천가 둘째 장의 첫 부분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열매"라는 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나무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매"

나무는 뿌리가 깊어야 물과 자양분을 잘 흡수하고, 줄기와 가지가 튼튼해야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잎이 무성해야 광합성이 왕성해서 양분을 많이 만들 수 있고, 꽃이
고와야 벌과 나비를 꾀어 수정이 원활해집니다. 보기 좋은 나무, 아름다운 꽃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나무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뿌리가 깊고 줄기와
가지가 튼튼하고 잎사귀가 무성하고 꽃이 아름다워도 그것들이 모두 허사가 됩니다. 제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도 없고,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열매 맺기"는
모든 나무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서도 나무의 비유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열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잘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운다고
하신 바도 있습니다. 실제로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즉석에서
저주를 내려 말라죽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맺어야 하는 궁극적인 열매입니다. 왜
그러냐구요? 지금부터 그 점을 보겠습니다.


*열매 실(實)

열매를 가리키는 한자는 실(實)입니다. 그것을 파자하면 집안(갓머리)에 줄줄이 꿴(?)
보배(貝)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풍요롭다는 뜻이지요.

국어 사전에 나오는 열매 실(實)자가 든 낱말을 일일이 찾아서 그 뜻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실(實)자의 어법에 따르면 그 뜻이 대체로 세 가지로 묶이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참이다"는 뜻입니다. 현실(現實), 실제(實際),
진실(眞實)같은 말들이 그 예입니다. 둘째는 "씨가 있다, 그래서 힘(생산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핵실(?實,核實), 실권(實權) 같은 낱말이 그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꽉
찼다, 그래서 쓸모가 있다"는 뜻입니다. 실엽(實葉), 실죽(實竹), 실용(實用)이라는 말의
실(實)자가 그런 뜻으로 쓰였습니다.

허(虛)는 실(實)과는 반대되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꾸몄다, 그래서 거짓이다," "씨가
없다, 그래서 힘(생산력)이 없다," "비었다, 그래서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열매(實)

그럼 이제 성경에서도 이런 허실(虛實)의 개념이 확인될 수 있는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는 앞의 글에서 사랑을 정의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3:4-8을 참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바로 앞의 고린도전서 13:1-3절을 보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허실(虛實)개념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상에서 본 것처럼 사랑은 실(實), 즉 열매입니다. 열매는 기독교인이 맺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 즉 열매입니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는 말은 허장성세(虛張聲勢)라는 말입니다. 공연히
소리만 요란했지 말짱 헛것이란 말이지요. 왜 헛것입니까? 비었고 꾸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멋있지만 사랑없이 이루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과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꾸민 것은 거짓입니다.

예언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지식은 과거에 대한 이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사후의 일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와 사후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갖더라도 사랑이라는 "씨앗"이 없으면 단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힘(영향력, 생산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구제와 헌신, 자기 희생은 야고보 사도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믿음의 행위적 측면입니다.
행위는 유익함을 위한 것입니다. 열매로 말하면 먹기 좋은 살에 해당합니다. 이런 희생적
행위까지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유익함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과 믿음과 지식과 구제의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은 거짓이며 생명력도
없고,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허(虛)입니다.

그러나 사랑만 있으면 그 모든 허(虛)가 실(實)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참"이며 "씨와
힘(생산력)"이 있고 "꽉 차서 쓸모"가 있게 됩니다. 나무의 열매가 갖는 특징을 두루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實), 즉 열매입니다. 열매는 기독교인이 맺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그런데 성경에는 "열매"를 강조하는 중요한 구절이 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부분을 잠시 보기로 하겠습니다.

(22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절)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성령의 열매"라는 구절에서 "열매"라는 말이 단수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한국말에서는 단복수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으니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수(數)의 구별이 엄격한 영어성경과 헬라어 성경의 열매(karpos)도
단수로 쓰였다는 점은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아홉 가지나
나열하고 있으면서 정작 "열매"라는 말은 단수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틀림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나 필사자들이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배제합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로 하여금 "열매"라는 말을 단수로 쓰게 하신 데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첫 걸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홉 가지로 나열된 성령의 열매가 사실은 모두 한가지 열매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단수로 사용한 것이 의미있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아홉 가지를 한데 묶을 수 있는 기독교인의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사랑으로 보고 싶습니다. 물론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나머지 여덟 가지 열매를 뭉뚱거릴 수 있는 대표적인 열매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8과 갈라디아서 5:22-23의 일대일 대응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발견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1-3절에서 "열매"로서의 사랑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제시한 뒤에, 곧바로 고린도전서 13:4-8에서 사랑을 정의합니다. 지난번에는 "오래
참고 견디는 것"만 보았지만 이번 글에서는 나머지를 모두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부분을 앞에 인용한 갈라디아서 5:22-23의 성령의 열매와 나란히 놓고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두 구절에는 거의 일대일에 가까운 상응관계가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첫 번째로 지적된 것은 사랑인데, 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주제입니다.
앞에서 본대로 사랑은 열매입니다.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두 번째 열매인 희락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고전13장에서는 불의가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을 사랑으로 정의했습니다.

세 번째인 화평, 즉 평화는 당사자들이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런
평화를 깨뜨리는 것,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고전 13장에
의지해서) 무례한 것과 자랑하는 것과 성내는 것에서 찾습니다. 한 사람이 무례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참아주지 않으면 즉각 분란이 생기고 평화는 깨집니다.

또 자랑이란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 생각은 본인에게는 "교만"을
상대방에게는 "투기"를 안겨줍니다. 교만과 투기는 갈등과 싸움의 직접적인 원인이지요.

마지막으로 성을 낸다는 것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냄을 받는 상대방의 반응은 십중팔구
마주 성내는 것일 것입니다. 성냄과 성냄이 부딪히면 싸움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랑과 교만과 시기와 성냄은 모두 사랑의 정의에서 금지됩니다.

네 번째인 오래 참음에 대해서는 이미 보았습니다. 두 구절이 모두 오래 참음을 사랑의
정의이자 성령의 열매로 포함합니다.

자비(慈悲)는 성령의 열매 중에서 다섯 번째로 언급되었습니다. 자비(慈悲)의 고대 헬라어는
크레스토테스(Chrestotes)인데 이는 "도덕적으로 선함, 성실함, 관대함, 친절함"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자비의 정의는 다른 열매들과 의미가 조금씩 겹칩니다. 예컨대 도덕적 선함은 양선과,
성실함은 충성과, 친절함은 온유와 의미를 공유합니다. 유일하게 독자적인 것이 있다면
관대함이라는 것입니다. 관대함이 무엇입니까? 악착같이 내 것을 챙기기보다는 남에게 자꾸
나누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고전13장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과
통한다고 봅니다.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 양선은 말 그대로 "선(善)을 기른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악(惡)한
것을 생각지도 않는 것"과 통합니다.

일곱 번째로 지적된 성령의 열매는 충성입니다. 충성은 믿음을 가리키는 피스티스(pistis)를
번역한 말입니다. 믿음직하다, 성실하다는 뜻도 거기에는 있는 거지요. 이 역시 사랑의
정의에서 "모든 것을 믿으며(pistis)"라는 표현에 나타납니다.

여덟 번째로 꼽혀 있는 성령의 열매 온유는 사랑의 정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으니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절제는 엔크라테이아 (Engrateia)라는 낱말을 옮긴 말인데, 일차적인 정의가
"자기 통제, 즉 자기의 욕망과 정열 등의 감각적 욕구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미덕"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절제는 사랑의 정의부분에 나타난 낱말 중에서 유일하게 일대일로 대응되는 낱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만은 사랑의 정의 전반에 녹아 있다고 봅니다. 자기 욕망과
열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은 화를 내거나, 교만하거나, 시기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억누른다는 말이지요.

무례하지도 악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적된 "악한 것"의 범주에 드는
것은 대부분 자기의 욕망과 정열이 지나친 것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으려면 엄격한 자기 통제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요약하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정의와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는 완전히 같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용된 낱말들과 그 낱말들의 어법상의 의미를 비교해 보면 그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로 요약하면 사랑

사랑의 정의에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동동사로서의) 행동 지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새 계명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라"로 집약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되는 것도 가능하고도 이해할
만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열거될 수 있으면서도 결국은 사랑
하나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벼리(綱)

유교에 삼강(三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綱)은 한국 고유어로 "벼리"라고 합니다. 고기
잡는 그물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그물코들을 한데 주루룩 꿰는 굵은
밧줄이 바로 벼리입니다.

그물을 바다에 뿌린 다음, 거둬들일 때에는 수백 개의 그물코들을 일일이 잡아당기지
않습니다. 벼리만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거기 꿰어진 그물코들이 다 따라 나오면서 그물이
오무라들고 고기가 잡힙니다.

저는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신앙과 윤리의 벼리(綱)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물에서
그렇듯이 벼리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사랑이라는 벼리만 잘 갈고 닦으면 성령의 열매들이
저절로 열릴 것으로 봅니다.

물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겠지요. 처절하게 자기를 억눌러야 하고 상대방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솔직히 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성령의 열매들이 줄줄이 맺힐 것이라고 성경이 말해
줍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13장과 갈라디아서 5장을 함께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일
것으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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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열매.  열매는 나무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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