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호> "믿음"에 대하여 (2) | 2001년 07월 11일 |
*사람(人)의 말(言).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의 헬라어 원어들을 살피면서 "믿다"가 "말로 설득당하다"는 간단한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자 문화권의 "믿다"도 비슷한 뜻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한자로 신(信)입니다. 이 글자의 파자(破字)는 유명하니까 이미 잘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람(人)의 말(言)"입니다. 여기서도 "말"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 사람 자체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信)의 새김에는 "미쁘다" 즉 "믿음직하다"가 있습니다. 자기 말을 스스로 잘 지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 말을 믿게(받아들이게) 하기도 쉽고 그래서 미쁘다는 평가도 받기 쉽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남을 설득하고 가르치기가 얼마나 쉬워지겠습니까? *동의어가 없는 신(信) 재미있는 사실은 한자에는 "믿다"는 뜻을 가진 다른 글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믿다"는 신(信)자 하나 뿐입니다. 다른 동의어가 없습니다. 믿는 대상과 방법에 따라서 다른 글자와 결합해서 파생어들을 많이 만들기는 합니다. 신앙(信仰), 신뢰(信賴), 신임(信任), 신탁(信託), 신봉(信奉), 신념(信念) 등등의 낱말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信)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한자 문화권의 "믿다"는 오로지 "사람의 말"과만 관련되는 개념이라는 뜻이지요. *복신(福信)이면 좋았을 걸... 기독교에서 흔히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이야기를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늘 이 번역어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영어로는 가스펠(gospel) 혹은 굿뉴스(good news)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다"는 뜻의 고대 헬라어 동사 에방겔리조(evangelizo)에서 유래한 말들입니다. 어째서 뉴스, 즉 소식을 "음(音)"으로 번역했는지가 얼른 이해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거지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음(音)은 원래 "사람의 목소리"란 뜻입니다. 그냥 다른 소리는 성(聲)이나 향(響)을 쓰지요. 그래서 복음(福音)은 "복된 말소리"가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굳이 안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세례 요한의 별명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전하던 복음이 "소리"였다고 말해도 그런대로 연관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복음(福音)대신 복신(福信)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믿을 신(信)자는 "소식"을 뜻하기도 합니다. 서신(書信)은 글로 쓴 소식, 즉 편지이지요. 옛날에야 소식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서신(書信) 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편지, 복된 소식을 담은 그 편지가 바로 복신(福信)이지 뭐겠습니까? 그러니 복신(福信)이라고 했으면 에방겔리온의 원래 뜻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복신을 받아 들이고 거기에 설득을 당하면 그것이 곧 믿음, 즉 신앙(信仰)이 되는 것이지요. 초기 성경 번역자들이 처음부터 복신(福神)이라고 번역했으면 지금쯤 아무런 어색한 느낌없이 그렇게 잘 쓰고 있을텐데, 이제와서 그 문제를 제기하자니 꼭 딴지나 거는 것 같고 저도 개운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의 뜻으로만 보면 복음이라는 말 보다는 복신(福信)이라는 말이 훨씬 정확한 번역어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말과 믿음과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다소 복잡하고 장황한 느낌을 받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이 명쾌하지 못했다면 죄송합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말은 믿음의 전제 조건"인데,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이란 "참된 말, 혹은 복신(福信)으로 설득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로고스로서의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방법으로서의 현명한 언어(言語) 구사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 말(logos)에 기반을 두고 생긴 믿음(信)이 어떻게 행동(行動)과 연관되는 지 살펴보기로 하지요. 그에 앞서 사도 야고보의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그 형에 그 동생 공자님의 십대 제자(흔히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부릅니다)중에는 인척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손자 자사(子思)가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유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진력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님의 제자인 증자(曾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자사(子思)는 한편으로는 맹자(孟子)를 제자로 키우는 한편, "중용(中庸)"을 집필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할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어 노력한 끝에 결국 할아버지의 어록인 "논어(論語)"와 스승의 저서인 "대학(大學)," 제자의 저술인 "맹자(孟子)"와 나란히 유교 경전이 된 책을 집필했던 능력있고 똑똑한 효손(孝孫)이었습니다. 석가님의 십대 제자(이들은 흔히 석가십성(釋迦十聖)이라고 불립니다)중에는 그의 아들이 끼어 있습니다. 남몰래 선한 행동을 잘한다 해서 "밀행(密行)제일"이라는 칭송을 들은 나후라(羅聳羅)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인척이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제자였지요. "동생이자 제자"라는 말에서 이상함을 못 느끼십니까? 저는 예수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생을 제자로 삼을 수 있었던 사람을 본 적이 아직 없습니다. 공자님과 석가님처럼 아들과 손자가 제자요 후학이 된 경우도 물론 쉽지는 않지요. 대개는 아버지가 현명하면 아들은 망나니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경우는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분야에서 나란히 능력을 발휘한 경우는 서양에서도 더러 보입니다. 그것은 아들 중에 아버지를 존경하게 된 나머지 (혹은 강요당한 나머지), 그 뜻을 이어받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 관계가 사제 관계로 진전되었던 예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생들은 형이나 누나를 아주 가까이서 오랫동안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보게 되는 법이지요. 물론 부모님도 주욱 자녀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봅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관찰과 상호작용은 부모님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형제들은 서로 고만고만할 때부터 의기가 맞아서 함께 놀다가도 갑자기 치고 박고 싸우기도 하고, 짜고서 나쁜 짓도 같이 좀 하면서 돌아다니고 그럽니다. 그런 일들은 보호자인 부모의 관점에서가 아닌, 대등한 형제의 관점으로 관찰하게 되면 아무래도 흠이나 흉잡힐 일, 서로 감정 상하고 앙금남는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형제나 남매들 사이에서는 잘해야 서로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수는 있어도, 선생으로까지 모시고 존경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친한 형제 혹은 오누이 관계가 사제 관계로까지 발전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학엘 좀 먼저 들어갔다고 동생에게 과외공부를 직접 시켜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손이 먼저 나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바람에 어디 제대로 가르쳐 지던가요? 몇 달은커녕 며칠도 못가서 "차라리 학원엘 갈래"하고서 갈라서 버립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형님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형님이야 훌륭했을 터이지만 그 동생도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형의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자란 야고보는 형님 예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어떤 생각을 가졌길래 그렇게 형의 제자가 될 생각을 하고 또 실천에 옮겼을까요? 저는 그게 아주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미친 것이, 야고보는 "행동"을 대단히 강조했던 사도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는 정식화로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만 동행했지만, 야고보는 철든 이후에만도 이십 년 이상을 형과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야고보도 아버지와 형을 따라서 목수일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늘상 아버지와 형과 함께 이집 저집으로 일을 다니면서 형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형 예수에게서 발견한 사실은 "형은 행위가 완전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바로 그 점이 야고보는 그 점을 자기 서신의 핵심 내용으로 삼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동생에게서 그런 평가와 대접을 받는 형도 대단합니다만, 그런 형을 보고 시기하거나 딴지걸기 보다는 선생으로 모시고 따라다니면서 기꺼이 설득을 당하고 믿음을 가졌던 야고보도 참 대단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님이라는 이유로 마리아를 존경합니다만, 그 존경은 야고보의 어머님이라는 이유 때문에라도 배가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형제를 사제지간으로 양육할 수 있었던 어머니. 장남이 극형으로 죽게 되었을 때야 마리아의 마음이 찢어졌겠습니다만, 형제가 나란히 동지가 되어서 활동하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어머니는 참 행복했을 거라고 추측도 해 봅니다. 어쨌든 참 대단하고 감탄스러운 가족입니다. 말과 믿음과 행함의 긴밀한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 야고보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 봅시다. *사기(詐欺)치지 말지어다 사도 야고보의 저서 "야고보서"에서 제일 유명한 메시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약 2:17)이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죽은 믿음"(약 2:26)이라는 말입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야고보 사도는 편지에서 온통 그 말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지요. 그런데 바로 그 구절 때문에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빛을 못 보는 구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22절의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권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듣고 배운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기(詐欺)치지 말란 말입니다. "속일 사(詐)"를 한번 보십시오. "잠깐 동안(乍)만 효과 있는 말(言)"이라는 뜻입니다. 얼마 안 가서 들통난다는 말이지요. 링컨 미국 전대통령은 "적은 사람을 오래 속이는 일"과 "많은 사람을 잠깐 속이는 일"을 비교한 적이 있었는데, 공통점은 "결국 탄로가 난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 사기가 자기에게 향한 것이라면 그 '잠깐'이 얼마나 짧겠습니까? 남이라면 그래도 몇 시간 혹은 몇 일이나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에 대한 사기는 그 거짓말을 하는 순간 이미 스스로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스스로조차 믿을 수가 없겠지요. 자기 자신도 설득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득 당하다"는 뜻으로서의 믿음(信)은 사기(詐欺)의 반대 개념입니다. 사기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고객과 주인 사이의 믿음이 중요한 법이라는데, 다른 인간관계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믿음은 관계를 오래 지속시켜 줍니다. 서로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서로 "미쁘게 여길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관계가 돈독해지고 오래가기 마련이지요. 그런 오래 가는 돈독한 관계는 바로 거짓이 아닌 "참된 말"과 그에 상응하는 "참된 행동"의 일치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믿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에무나(emuwnah)"는 "흔들림이 없고 튼튼하여 오래 지속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또 그 동사원형인 "아만(awman)"이 "돕다, 받아들여 인정하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 것도 아마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헬라어나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원문도 웹에서 인식이 안되는군요. 또 한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참말과 믿음과 행동 사도 야고보의 주장은 "참말로 설득당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행(言行)을 일치(一致)시킬 수 있을 때에야 비로서 사기(詐欺)가 아니라 "참말에 의한 진정한 설득," 즉 "믿음"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참말"은 믿음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참말"에 의해 깊이 설득 당할 때에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일단 믿음을 갖게 되면 사기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신앙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말과 행동의 관계는 이렇듯 믿음을 매개로 해서 더욱 긴밀해 집니다. *맺음말: 촘스키의 미화(美化)를 우려하며. 유태인인 노암 촘스키는 이미 열살 때부터 대학 히브리어 교수님이던 아버지의 원고 교정쇄를 읽으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 촘스키는 언어학 공부를 통해 무언가 "말"의 본질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것을 깨달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설득당한 것이겠지요. 촘스키가 깨달은 "말"의 본질은 머리 속에만 머물지 않고, "믿음"의 뒷받침을 받아 "행동"으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그의 사회 운동은 절대로 마구잡이가 아닙니다. 그의 정치적 저술들은 언어학 저술과 마찬가지로 탄탄한 실증적 증거로 잘 뒷받침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그의 행동(주로 강연의 형태이기는 하지만)은 적절한 시의성과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빠져야 할 때 빠질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참말"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과 맥락까지도 잘 골라야 하는 법입니다. 뉴욕타임즈는 일찌감치 촘스키를 가리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살아있는 지식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역사를 통털어서 품성과 이론과 행동을 겸비한 사람, 말과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으로서 촘스키에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토마스 제퍼슨 정도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촘스키의 믿음과 행동이 로고스에 바탕을 둔 참이라면, 그래서 그의 믿음과 언행이 사기(詐欺)가 아니라면, 그 영향력은 오래 갈 것입니다. 예컨대 이삼백 년 뒤의 미국사 연구자들은 "촘스키라도 없었으면 20세기 미국의 정신 문명은 황무지였을 것"이라고 평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별로 가깝지도 않고 그의 학문 세계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촘스키를 지나치게 미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듭니다. 그저 그의 사회 비판 저술 몇 권만 읽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까지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가지 믿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맨 마지막에 가서 보면, "말과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른 시대정신을 이끌고 제대로 된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누구에게서라고 딱 집어낼 수는 없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설득 당한 것 같습니다). 촘스키가 이런 제 믿음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미화"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 **늙은이를 너무 올렸다 내렸다 하는거 아니라며 껄껄 웃으시는 촘스키 선생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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