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호> "소망"에 대하여 (2) | 2001년 07월 10일 |
앞글에서는 망(望)의 파자해(破字解)를 통해, 소망이 "확실한 일어날 미래의 일을 준비하며 기다리다"는 뜻임을 보았습니다. 반면 흠정역 영어 성경의 번역어인 호프(hope)는 "확실치 않은 미래의 일이 일어나기를 감정적으로 바라다"는 뜻임도 보았지요. 개역 한글판 성경과 흠정역 영어성경의 번역어가 서로 어긋나는 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어긋남은 한자로 표시하면 희(希)와 망(望)의 차이와 같습니다. 자전에서는 이 두 한자를 모두 "바라다"로 새기고 있지만 거기 담긴 함의는 서로 아주 다릅니다. 희(希)는 "어떤 확실치 않은 것을 주관적, 감정적으로 바라다"는 뜻으로 영어의 앤티시페이트(anticipate)에 가깝지만, 망(望)은 "객관적으로 확실한 일을 준비하며 기다리다"는 뜻으로 익스펙트(expect)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소망은 소망과 호프, 혹은 희(希)와 망(望) 중에서 어떤 것에 더 가까운 개념일까요? *엘피스(Elpis) 고대 헬라어로 쓰인 신약성경의 소망은 엘피스(elpis)입니다. 이 말의 첫 두 뜻이 "expectation of evil, fear"와 "expectation of good, hope"입니다. 다른 뜻들은 모두 이 두 뜻에서 파생됐습니다. 엘피스의 두 뜻이 모두 "익스펙테이션"으로 풀리어 있습니다. 확실성을 가지고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피스는 좋은 것 뿐 아니라 나쁜 것도 내다봅니다. 첫째의 뜻은 비관적인 반면, 두 번째의 뜻은 낙관적인 것입니다. 악한 것에 대한 기대는 공포를 낳고, 좋은 것에 대한 기대는 호프를 낳는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풀이대로라면 "호프"는 "엘피스"의 일부일 뿐입니다. 반면에 망(望)은 엘피스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합니다. 익스펙테이션을 가리킬 뿐 아니라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所望)은 천국(天國)에 대한 희망(希望)과 지옥(地獄)에 대한 절망(絶望)을 다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망(所望)"과 "엘피스(elpis)"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상호 번역어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엘피스(elpis)를 소망(所望)으로 번역해 낸 선배 기독교인들의 지혜가 참 자랑스럽습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에서는 때로 엘피스를 "소망" 대신에 그냥 "바램"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을 기억하시는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구절이 거기 있습니다. 여기의 "바라는 것"이 엘피스입니다. 믿음은 소망이 진짜로 모습을 드러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믿음 개념을 살펴보지 않았으니까 믿음과 소망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바램"이 원래 엘피스를 번역하기에 그다지 충분한 말이 아니라는 점만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망(望)의 뜻을 되새겨 보면 분명해 집니다. 지금까지 소망(所望)은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준비하며 기다리다"는 뜻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은 "바라다"는 소망(所望)과 익스펙테이션보다는 아무래도 앤티시페이션이나 호프로 혼동될 우려가 아주 많습니다. *성경번역자들의 한글 사랑 질문 한가지. 개역 한글판 성경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삼대덕목(三大德目) 이라는 신망애(信望愛) 중에서 유독 망(望)만 한자어(漢字語)로 번역했습니다. 신(信)은 "믿음," 애(愛)는 "사랑"이라는 고유어로 번역되었는데, 망(望)만 "바램" 이라고 하지 않고 "소망"(所望)이라는 한자어를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앞의 해석이 틀리지 않는다면, "믿음"과 "사랑"은 헬라어 개념 피스티스(pistis)와 아가페(agape)를 번역하기에 모자람이 없지만, "바램"만은 엘피스(elpis) 개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피스의 번역어로 소망이 채택되었기는 하지만 혼동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없이 "바램, 혹은 바라다"는 고유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초기 성경번역자들이 되도록 한글을 사용하려고 애썼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망(所望)과 소원(所願) 그러면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것을 감정적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 즉 호프나 앤티시페이션, 혹은 위쉬(wish)와 디자이어(desire)의 개념들은 어떤 한국말로 번역되었을까요? 호프나 앤티시페이션에 부합되는 한자는 희(希)임을 보았습니다만, 개역 한글판 성경에서는 희망(希望)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쓰지 입니다. 그 대신 대체로 소원(所願)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습니다. 소망(所望)처럼 소원도 직역하면 그저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대체로 호프와 디자이어, 위시와 앤티시페이션입니다. 불확실한 것에 대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바램이지요. 이렇게 보면 고유어 "바램" 혹은 "바라다"는 그 뜻이 포괄적이고 의미 분화가 덜 이루어진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과 소원, 앤티시페이션과 익스펙테이션을 모두 포함하는 더 큰 말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바램"이라고 해서 그것이 바람지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실제로 시편 21:2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소원(Heart's desire)을 주셨"다고 합니다. 디자이어가 소원으로 번역된 것에 주의해 주십시오. 사람의 소원도 하나님이 심어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빌립보서 2:13의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하나님은 사람에게 소원을 심어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시기까지 한다는군요. 게다가 그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우리가 소원을 개발할 때에는 하나님 수준에 맞도록 좀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편 흠정역 영어성경에는 빌립보서 2:13의 소원을 "윌(will)"로 번역했습니다만 정확한 번역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는 쎌로(thelo)인데, "마음에 품다, 의도하다, 원하다(desire, wish)"는 뜻입니다. 쎌로와 디자이어는 의지(will)가 아니라 소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호프는 "불확실한 것에 대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바램"이며, 반면에 소망은 "확실한 것에 대한 객관적이고 확신에 찬 바램"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확실/불확실," "주관/객관," 그리고 "감정적/이성적" 이라는 개념의 쌍들이 다시 한번 확인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소망은 어떤 면에서 "확실"하며 "객관적"이며, "이성적"인가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의 소망은 "확실"합니까? 기독교인들의 최대 소망은 구원(救援), 혹은 영생(永生)입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이고,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는 결국 같은 말입니다. 맥락에 따라서만 서로 달리 사용될 뿐이지요. 성경에서는 구원과 영생의 "확실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옮겼느니라" 동사의 시제가 과거형인 점에 주의해 주십시오. 믿는 사람은 구원과 영생을 이미 받았답니다. "믿음"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이 좀더 명확해 질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믿으면" 이미 상황이 끝난 것이라는 점만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랍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객관적입니까? 그러면 기독교인들의 소망(所望)은 어떻게 "객관적"입니까? 이점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객관적(客觀的)이라는 게 뭔지부터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사물을 보는 관점을 "오브젝티브(objective)"와 "서브젝티브(subjective)"로 나눕니다. 오브젝티브는 대상(對象)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대상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물(物)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일(事)입니다. 그래서 사물(事物)이라고 하면 사람의 마음 작용의 대상을 총체적으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는 오브젝티브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가진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렌즈(lenz), 필터(filter), 채(screen) 등을 가지고서 사물을 선별적으로 파악하게 되면 이를 서브젝티브라고 합니다. 오브젝티브와 서브젝티브의 구분은 철학과 과학을 공부할 때에 아주 중요한 관찰법인 것이 사실이고 가급적이면 서브젝티브 보다는 오브젝티브의 관찰법을 권장합니다. 한국말에서는 서브젝티브를 주관적(主觀的), 오브젝티브를 객관적(客觀的)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번역어들은 오브젝티브와 서브젝티브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특히 오브젝티브와 객관적이라는 말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객관(客觀)이란 "손님의 눈, 시각"이라는 말이고 주관(主觀)이란 "주인의 눈, 시각"이라는 말입니다. 손님이건, 주인이건 생각과 관찰의 주체가 사람입니다. 사람인 이상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배제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객관적(客觀的)이라는 말이 "손님, 즉 제3자"의 시각이라는 말이라면 이는 당사자들이 얽매이는 이해관계에서는 다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자신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서양말의 기준으로 보면 객관적이라는 말조차도 오브젝티브가 아니라 서브젝티브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굳이 오브젝티브라는 말을 번역하려면 아마도 물적(物的)이라는 말을 써야할 것입니다. 사물적(事物的)이라는 말조차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事)는 그 자체로서 오브젝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도 오브젝트는 오로지 물(物)만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물론 비유적인 용법으로 일(事)에 대해서도 오브젝티브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입니다. 일(事)은 원래 주체(主體)가 개입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서브젝티브와 오브젝티브의 구별이 주관과 객관의 구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보면 주관과 객관은 모두 서브젝티브입니다. 오브젝티브라는 말을 번역하려면 물적(物的), 혹은 물체적(物體的)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앞에서 기독교의 소망(所望)이 "객관적"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손님의 눈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당사자인 내 생각이나 느낌 때문이 아니라 (이런 것은 주관입니다),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다른 손님들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사람들이 증명해 주는 바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증명해 줍니까? 그 내용이 바로 "이러므로"입니다. 이 "이러므로"는 그 앞장인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가리킵니다. 거기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지 못한 것의 증거"(히브리서 11:1)라는 대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증인들을 동원한 바 있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 부부와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라합과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그 밖의 수많은 선지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믿음으로써 자신들의 소망을 실현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저자인 사도 바울은 그 증인들을 일일이 모두 헤아리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인해 이루어진 소망은 "허다한 증인들"이 입증한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신약성경 시대 이래로도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폴리갑과 유스티누스 같은 초대의 교부들, 테르툴리아누스와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로마시대의 지도자들, 핍박을 회피하지 않았던 로마시대의 이름없는 기독교인들, 제롬과 아퀴나스 같은 중세의 신학자들과 수도사들, 위클리프와 쯔빙글리,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과, 아프리카와 남미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정약용, 정약종, 황서영 같은 조선의 초대교회 순교자들과,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올바른 성경 신앙의 수호자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허다한 증인들이 기독교의 소망이 확실한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조선과 일제와 한국 시대의 증인들만 헤아리려도 바울처럼 "제게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객관적인 증거가 안되겠습니까? 소망이라는 것이 어차피 물(物)이 아니라 사(事)라면 물적(物的) 증거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터입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증거로서 이처럼 "허다한 증인들"을 동원할 수 있는 일이 기독교의 소망을 빼면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소망은 객관적이라고 한 것이지요. *기독교의 소망은 이성적(理性的)입니까?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소망이 호프처럼 감정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것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성(理性)이라는 말이 그다지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점은 다른 글에서 밝히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각, 이해, 판단하는 힘"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 말을 그냥 쓰기로 하겠습니다. 앞에서 망(望)의 개념을 보면서 우리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일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다"는 뜻으로 이해하면서, 그 두 방법이 "바라보다"와 "내다보다"라고 정리했습니다. 바라보다는 "경험"과 "관찰"을, 내다보다는 "생각"과 "해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었지요. 그렇습니다. 소망은 경험과 관찰, 생각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기다림입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그것은 확실하고 허다한 증인들까지 있는 소망입니다. 기독교의 소망이 감정적인 면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이성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소망(所望): 엘피스보다 더 엘피스적인 개념 처음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가 솥(鼎)이라면 그 세 다리 중의 하나가 소망(所望)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헬라어 엘피스(elpis)의 번역어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확신을 가지고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는 엘피스의 두 번역어, 즉 개역 한글판 성경의 소망(所望)과 흠정역 영어 성경의 호프(hope)의 뜻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소망은 엘피스의 완벽한 번역어인 반면에, 호프(hope)는 엘피스가 담고 있는 "바라는 바"의 "확실성"과 "객관성"을 다소 결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호프는, 소망(所望)과 엘피스(elpis)와는 달리, "부정적인 일에 대한 예측이나 기다림"을 표시할 수 없다는 단점을 가졌음도 지적했습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希望)"과 "지옥에 대한 절망(絶望)"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엘피스를 번역하기 위해 "바램"이라는 고유어를 사용하지 못한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램은 소망(所望)뿐 아니라 소원(所願), 익스펙테이션 뿐 아니라 앤티시페이션, 망(望) 뿐 아니라 희(希) 개념도 포함하는 다소 포괄적이고 모호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소망(所望)은 엘피스(elpis)의 훌륭한 번역어일 뿐 아니라, 엘피스라는 헬라어가 전해 주지 못하던 생생하고 깊은 의미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망(望)의 파자를 통해서 우리는 소망을 갖는 데에는 "경험과 관찰과 생각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엘피스(elpis)에서는 이런 의미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해서 소망(所望)은 엘피스보다도 훨씬 더 엘피스적인 번역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소망이 무엇인지 깨달으려면, 호프나 엘피스 개념을 공부하는 것보다 소망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른 길입니다. 물론 서로를 비교해 살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초기 한글 성경 번역자들은 일찍이 그런 작업을 거쳐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19세기 말,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성경 번역을 위해 애쓰신 신앙의 선배들께 감탄과 존경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저는 초기 성경 번역자들의 번역 실력이 그들의 신앙 수준만큼이나 훌륭했음을 새록새록 느끼곤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 **제가 소망을 두고 있는 미래 한국의 재목. 신앙과 상식으로 잘 키우려고 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