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우리/조정희칼럼

사랑에 대하여 2

주방보조 2004. 2. 7. 08:51
<제2호> "사랑"에 대하여 (2) 2001년 07월 09일
앞에서 우리는 한자 문화권의 애(愛) 개념이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권의 러브(love) 개념과 정반대임을 보았습니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사랑이 "기분 좋은 것"이지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괴롭지만 참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사랑 개념은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 문화권의 러브(love)
개념을 답습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러브(love)의 세계화(世界化)

그게 문화의 세계화라면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계화를
"각 나라와 민족이 자기 걸 내 놓아서 선택 가능성을 높이고 그래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세계가 미국이나 유럽 것을 받아 들여서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 상황을 보면 그런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보다 더
햄버거와 마돈나를 좋아하고, 독일 사람들 보다 더 맥주와 하버마스를 좋아하고,
프랑스 사람들보다 더 바게뜨와 푸꼬에 열광하고, 영국 사람들보다 더 제3의 길과
기든스를 사모합니다.  물론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고려말부터 5백년 이상을 중국 사람들보다 더 공자를 섬긴
우리 조상들을 보고 지금 우리가 뭐라고 평가합니까?  세계의 중심문화(中華)에
가장 근접한 "세계화" 문화였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대주의"라면서 잊고 싶어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합니다.  사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일
것입니다.  그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실수를
통해 배우는 사람은 현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자꾸 계속하는 것은
똑똑한 것도 현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걸 "바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좀 더 심한 표현을 씁니다.  "개가 토한 것을 또 먹는다"고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 나는 일 아닙니까?  또 "돼지를 구덩이에서 꺼내 놓았더니
그리로 다시 기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개 같은 사람, 돼지 같은 민족이라고
불리고 싶으십니까?  저는 좀 거기서 빠지고 싶습니다.


*왜 성경인가?

왜 자꾸 성경을 보려고 하는 걸까요?  물론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생각과 행동의 준거를 성경에 둘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게 바로
제 생활의 잣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적인 이유 말고도, 성경은 "한국 말"과 "한국 개념"을 살피는
데에도 아주 유용합니다.  왜 그러냐구요?  좀 설명이 길고 복잡하지만,
여기서는 대강만 풀어놓겠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일본어와 서양어 및
그 개념에 물들기 이전의 한국말과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말은 20세기 전 시기를 통해 일본어와 서양어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실은 말 뿐 아니라, 전래의 개념들이 깡그리
무너지는 바람에 "한국 학문"이라는 집을 세울 벽돌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그런 게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일제 강점기 직전에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방대한 번역인 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개념이 거기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번역어를
선택할 때에도 일본어나 서양어의 침해가 있기 전의 한국 말과 개념을
고려했습니다.  

더구나 다행인 것은 이 성경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법과 고어투를 제외하고는 거의
초기 번역본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역 한글판
성경은 한국말과 개념을 연구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문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경의 사랑 개념을 보십시다.


*성경의 사랑 개념

뜻밖에도 성경이 설명하는 사랑은 애(愛) 개념을 지지합니다.  흔히 사랑의 장(章)
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즉 아가페(agape)가 그렇습니다.  이 구절은
고운 멜로디에 붙여져서 애창되고 있습니다만, 그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에
처참하고 참담한 "사랑의 실상"이 가리워진 감이 있습니다.  이미 익숙하시겠지만
그 구절을 한번 더 보십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을 정의하는 낱말 중에서 "좋다"느니 "즐겁다"느니 "짜릿하다"느니 하는
감정 형용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형용사인 것처럼 보이는 "온유하다" 조차도
원문을 보면 동사입니다.  모두 능동 동사이거나 그 부정형이기 때문에
위의 내용을 힘들여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이 짧은 구절에 "참다"와 "견디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우선
맨 처음과 맨 마지막의 동사가 "사랑은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견딘다"로
수미쌍괄식입니다.  "참다"와 "견디다"가 강조된다는 뜻입니다.  

또 마지막 줄은 앞에서 여러 가지로 정의된 사랑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딘다."  다시 수미쌍괄식입니다.  또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랑을 요약하면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꾹꾹 참는 것"

여기 나오는 "참는다"와 "견딘다"의 세 낱말은 고대 헬라어에서는 모두 다른
말입니다.  처음의 "참는다"는 마크로쑤메오(macrothumeo)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공격과 상처를 끈질기게 견딘다"는 뜻입니다.  "복수를 아주 오래 있다가
한다, 즉, 절대로 복수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두 번째의 "참는다"는 스테고(stego)인데,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덮어주고
까발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의 "견딘다"는 말은 후포메노(hupomeno)로
상대방으로 인해 생긴 불행의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다, 거기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다시 정의한 아가페(agape)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가페라는 헬라어 자체는 유쾌한 말입니다만, 그것의 성경적 정의는 좀
우울합니다.  

성경의 사랑은 한자(漢字) 문화권의 애(愛)개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 문화권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성경의 아가페(agape)는 애(愛)처럼 "뱉어버리지 말고 풀어버리지 말고 꾹꾹
참고 견뎌라"입니다.  "복수하지 말고 까발리지 말고 도망가지 말라"입니다.  

그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괴롭히지 않고 즐겁게 해주면 어떡합니까?  
오히려 나를 위해 오래 참아주고, 버티어 주고, 도망가지 않고, 함께 걸어주고,
내 잘못을 덮어주고,절대로 복수하지 않는다면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그럴 때는 마음껏 즐기면 되지요.  
그런데 그럴 때는 보통 "사랑"이란 말을 안 써도 됩니다.  행복(幸福)이라는
더 좋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幸福)이라는 말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것은 행(幸), 즉 운이 좋은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위해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감정(感情)이라기 보다는 의지(意志)

물론 성경의 아가페(agape)나 한자 문화권의 애(愛)를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고
요구하신 분은 정작 예수님 자신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뜻이겠지요.  
또 그 분은 그걸 요구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참고 견디신
전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정희야, 너도 할 수 있다."

사랑, 애(愛), 아가페(agape)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구요?  
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첫 걸음은 " 사랑이란 게 짜릿한
말초적 감정(感情)이 아니라, 끊임없이 참고 견디려는 의지(意志)"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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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봐요?  짜장면먹는 거 첨봐요?  (이런 모습까지도 참아지는 게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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