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호> "믿음"에 대하여 (1) | 2001년 07월 11일 |
*이 사람을 아시나요? 노암 촘스키란 사람을 아시는지요. 널리 알려진 언어학자입니다. 변형 생성문법이라는 말과 개념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을 한차례 뒤집어 놓은 사람이지요. 토마스 쿤이 학문의 패러다임 변화가 어떻게 혁명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설명해 보이기 5년 앞서서, 촘스키는 이미 언어학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쿤의 주장을 본때있게 미리 실증해 보여줬습니다. 한국에서도 언어학자 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도라면 그 사람 모르면서 가방끈 긴 행세하기 힘들 정도지요. 그런데 촘스키는 미국의 정치경제와 사회현상에 대해 입이 거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미국의 패권주의와 독재자 지원 전략을 눈뜨고 못 보는 사람입니다. 특히 미국이 개입해 전쟁만 났다하면 쫓아다니면서 말리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하노이에 가서 세계를 향해 "이 전쟁은 안 된다"고 소리질렀습니다. 미국이 니카라과에 군대를 파견하자 일부러 거길 찾아가서 반전 강연을 했습니다. 최근에도 코소보와 동티모르 사건들과 관련해 인권 침해자들과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해대었습니다. 미국의 극우파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사람입니다. 왠만하면 제 대접을 해 주는 미국 언론들도 촘스키에 대해서 만큼은 평가가 아주 인색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어떤 사람들은 촘스키를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렇게도 참신한 (누구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언어학을 창시한 학구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도 과격한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렇다는 얘깁니다) 사회 운동가의 모습을 보이느냐는 겁니다. 그 두 얼굴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제가 한번 시험삼아 연결시켜 볼까요? 시험삼아 말입니다. 저는 촘스키 언어학을 잘 모릅니다. 해설서 외에는 그의 언어학 저술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 그의 정치적 저술은 몇 권 읽어보았지만, 그의 정치, 사회적 지향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얼른 보면 그저 중구난방 같아만 보입니다. 따라서 제가 시도하는 "연결"이 촘스키의 언어학과 정치경제학의 학문적 접촉점을 찾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저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촘스키의 두 상반"되어 보이는" 모습이 "믿음"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한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페이스(faith)"나 "빌리프(belief)"나 "트러스트(trust)"가 아니라 "믿음(信)" 말입니다. 그의 학문과 생애는 "말-믿음-행동"이라는, 일관성 있게 연결되는 세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요? *"믿음"이란 "설득 당하는 것" 한국말 "믿음"은 영어에서는 페이스(faith), 트러스트(trust), 빌리프(belief) 등으로 번역됩니다. 영어 사전에서는 "페이스"는 "종교적인 믿음 혹은 신앙(信仰)"을, 트러스트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 혹은 신뢰(信賴)"를, 빌리프는 "생각이나 주의에 대한 믿음, 혹은 신념(信念)"을 가리키는 말로 각각 구별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세 영어 낱말이 과연 그렇게 다른 뜻을 가진 것일까요? "페이스"는 라틴어 피데스(fides)에서 나온 말인데, 그 동사 피데레(fidere)는 "신뢰하다"(to trust)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라틴어 어원까지는 페이스와 트러스트 사이에 뜻 차이가 없습니다. 내친 김에 더 올라가 봅시다. 피데스가 접목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어 피스티스(pistis)는 "무언가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 즉 신념"(conviction of the truth of anything, belief)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헬라어 폰트가 지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음만 발음기호처럼 적어 놓습니다. 이메일을 주시면, 완전한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영어와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다 합쳐서 말한다면, 페이스와 트러스트와 빌리프는 모두 같은 말입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용법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지 그 어원적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관련된 이 세 낱말의 근원적인 뜻이 무엇일까요? 연원이 가장 오래된 피스티스(pistis)에 대해서 조금 더 보겠습니다. 피스티스는 동사 피스튜오(pisteuo)의 명사형인데, 피스튜오는 다시 페이쏘(peitho)에서 갈라져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페이쏘의 일차적인 뜻이 "말로 설득하다" (to induce one by words to believe)입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권에서는 "믿다"가 "'말'로 설득당해 받아들이다"는 뜻이었습니다. 드디어 "말"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성경과 기독교에서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몇 가지 증거를 찾아보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1:1). 그리고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존대법이 발달한 한국어로 번역을 하다보니까 주어가 하나님인 점을 고려해서 "말"도 "말씀"으로 바꾸고, "있다"도 "계시다"로 바꿨을 뿐입니다. 원래는 그저 "처음에 '말'이 있었다"입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 말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 말은 곧 하나님이다"라고 이어집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도 "처음에 '말'이 있었다"거나 "'말'이 창세(創世)의 재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유태인들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입니다. *태초에 "뜻"이 있었다. 한편 단군 신화에서는 환웅(桓雄)이 "수의천하 탐구인세(數意天下 貪求人世)"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뜻'을 세상에 두고 인간 세상 구하기를 원했다"는 뜻이지요. 그 아버지 환인은 이런 아들의 '뜻'을 알았다 (父知子意)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개국 설화의 서두는 "태초에 '뜻'이 있었다"가 됩니다. 유태인들의 "'말'이 있었다"와는 좀 다르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뜻"과 "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약간의 천착이 더 필요합니다. 이것은 제목을 달리해서 한번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노른자는 "말" 말이 좀 옆으로 샜습니다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말"로서 존재하시고, 또 "말"로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줄기차게 "말"로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하실 때에조차도 우선 사람과 "말"로 협상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협상하시는 부분을 읽어보면(창18장), 하나님이 얼마나 "변론"을 즐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가 사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아보려고 최소한의 의인의 숫자를 오십 명에서 시작해서, 사십오 명, 삼십 명, 이십 명, 마침내 십 명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나 축소 조정해서 요청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끈질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요청을 하나님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적절한 근거만 있으면 (혹은, 어떤 때는 그런 근거가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협상하시고 양보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의 대응책은 "사람들의 '말'을 흩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만드시기로 한 결정조차도 세 위(位)의 하나님들이 서로 의논해서 정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1:7에 보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신도들에게 "말 좀 많이 해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 좀 줄이고 생각을 하라"거나,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지요. 물론 기독교에서도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현명하게 말해라"는 교훈은 있어도 아예 "말을 자제하라"는 교훈은 없습니다. 오히려 "말을 많이 하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기도해라, 찬양해라, 회개해라, 복음을 전파해라" 등등이 바로 그겁니다. 그 중에 말 안하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실은 생각조차도 "말"입니다. 언어학자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사람의 생각도 사실은 언어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언어가 자기와 자기 자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그래서 말을 장려하되 현명하게 말할 것을 강조합니다. *선종(禪宗) 불교의 무언무념(無言無念) 불교에서는 가급적 말을 하지 말도록 권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선종에 속하는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말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 말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더 높은 가르침이요 배움이라고 여깁니다. 석가님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가섭(迦葉)은 십대제자 중 유일하게 석가님의 말로 된 가르침이 없이도 높은 경지의 불법을 깨달았다고 전해집니다. 염화미소(拈華微笑), 염화시중(拈華示衆),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 같은 "일종의 텔레파시" 이야기가 유래한 것도 바로 석가님과 가섭 사이의 무언(無言)의 가르침과 배움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한국 최대 불교종파인 조계종(曹溪宗)도 선종에 속하므로 무언(無言)과 불립문자(不立文字), 그리고 선(禪)을 강조하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선(禪)에 정진하라는 말은 "말은 하지 말고 생각을 많이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선종 불교의 아주 중요한 수행방법이지요. 생각이 결국 자신과의 대화라는 점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이나 생각은 한 가지이며, 말을 없애려면 생각까지 없애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심사현언(深思賢言)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좀 다릅니다. 깊이 생각하고(深思) 현명하게 말하라고(賢言) 가르칩니다. 선종 불교에서는 무언무념(無言無念), 기독교에서는 심사현언(深思賢言)을 강조합니다만, 어느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하기는 무척 힘듭니다. 예컨대 선종 불교에서 말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주의를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 표월지(標月指)라는 비유를 자주 듭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입니다. 진리를 달에 비유한다면 말이나 생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달은 보지 않고 자꾸 손가락만 탐구해야 소용없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주지 않는다면 달이 거기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생기지 않습니까? 게다가 "선(禪)이란 달과 같과 교(敎)는 손가락과 같다"는 주장 자체도 말로 이루어진 것이고 책에 문자로 씌여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선종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 조차도 비교적 선종의 주된 가르침과 수행 방법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에서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는 말과 글을 굉장히 많이 남겼습니다. 오죽하면 유태인을 "책의 민족"이라고까지 부르겠습니까. 엄청난 분량의 탈무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바"와 "로고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도 "말"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씌여졌는데, 히브리말로 "말"은 다바(dabaw)입니다. 이 말의 동사형은 다바르(dabar)인데 그냥 "말하다"는 뜻입니다. 다바와 다바르는 구약성경에 무려 2천6백회 정도 사용됐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총 1천3백여면이니까, 한 면당 2번꼴로 "말" 혹은 "말하다"가 나오는 셈이지요. 신약성경은 조금 더 심합니다. "말"의 고대 헬라어 단어는 로고스(logos)입니다. 로고스는 동사 레고(lego)의 명사형이지요. 로고스와 레고는 총 1천7백7십여회 사용됐습니다. 신약성경의 분량이 4백2십여 면이니까, 면당 4번 이상 그 말들이 등장하는 셈입니다. 기독교가 말하기 좋아하고, 말이 많은 종교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약성경 시대에 이르면 "로고스"는 이미 일상적인 "말"뿐 아니라 "이론, 독트린, 설명" 등과 같은 체계적인 담화(discourse)의 뜻으로도 사용되기에 이릅니다. 게다가 "신의 계시"도 바로 "로고스"였지요. 고대 그리스 신들의 계시를 신탁(神託, oracle)이라고 하잖습니까? 이 신탁이라는 말은 고대 헬라어로 레기온(legion)입니다. 레고(lego)의 또 다른 명사형인데 "짧고 간단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무당(巫堂, 혹은 신관(神官)이라고도 하지요)을 통해 전달되던 신탁이 하도 짧아서 그렇게 불렀나 봅니다. 이런 용법이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도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저 "로고스"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생명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즉 "당신이 여기 계시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제자인 요한도 예수님을 가리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일 1:1)이라고 못박았습니다. *물증(物證)보다는 언증(言證)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그리고 시체 도난설이 있은 직후에 두 제자(이들이 열두 제자 중의 두 사람인지, 다른 제자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예수님과 날이 저물도록 함께 길을 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비로소 예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사라지고 나자 그들끼리 하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14: 32). 하루 종일 눈으로 보고도 몰랐는데 말씀을 귀로 들으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더랍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은 눈으로 보여주는 물증(物證)보다 말씀으로 하시는 언증(言證)에 훨씬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제자 도마에게 하시던 말씀도 기억나십니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저는 이 말씀을 "보지 못했더라도 '듣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내가 한 말을 전해 듣고서 받아들이는 사람들," 즉 "앞으로 두고두고 '내 말'에 설득당할 사람들은 결국 나에게 직접 설득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삼년 동안이나 꼬박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수행 기간이 그들에게는 예수님께로 부터 서서히 설득당했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일관되게 "나는 '말'이다" 였지요. 그렇게 설득을 당하고 나니까 비로서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말로 설득 당하는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 본 바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한국 개념의 맥락에서는 "믿음"이 어떤 뜻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믿을 신(信)자를 풀어가면서, "말로 설득 당함"이라는 성경의 믿음 개념이 한국 및 한자 문화권의 믿음 개념과 연관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 이 할아버지가 누구냐구요? 촘스키 할아버지예요. 사람 참 좋아보이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