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호> 다시 "믿음"에 대하여 | 2001년 07월 13일 |
기독교 신앙과 윤리를 "솥(鼎)"이라고 한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 솥의 세 발이라고 했습니다. 세 발이 모두 튼튼하면 신앙과 교회는 안정되어 열매를 잘 맺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개역 한글판 성경에 나타난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라는 번역어를 다른 성경 역본과 여러 사전의 정의와 비교해서 그게 원래 어떤 개념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믿음"을 "설득(說得) 당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참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설득 당했거나 설득 당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원과 어법을 정리하는 데에 매달리다 보니까 글도 딱딱해졌을 뿐 아니라, 그런 개념적 정의가 구체적으로 왜 필요한지를 밝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는 질문이 당장 튀어나올 법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믿음을 그렇게 정의하는 게 왜 필요한지, 무슨 유익이 있는지, 그런 정의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다른 개념들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고 합니다. *"믿음"이 뭐예요? 저는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기거나 슬쩍 뭉개고 넘어가는 것을 잘 못참는 편입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성경 공부를 할 때에도 엉뚱한 생각도 많이 하지만, 특히 의문이 생기면 대충 넘어가지를 못했습니다. "믿음"에 대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이 "믿음, 믿음"하는 데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말하는 투와 분위기로 보아서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은 국어 사전에 나오는 믿음과 뭔가 크게 다른 것 같기는 한데 말입니다. 게다가 나만 빼고는 모두들 그게 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궁금증이 지나치기 시작하니까 마음에 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믿음이 뭐예요?" 하고 묻고 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속시원한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나도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됐습니다.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그저 우물쭈물한 적이 대부분입니다. 마침내는 계면쩍어져서 "나도 몰라, 임마.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냐"하고서 넘긴 적도 많습니다. 그러면 질문한 사람은 마치 내가 알면서도 말을 안하는 것처럼 여기는 눈치더라고요. 교회 물도 많이 먹고 좀 세련되어 가지고는 그럴듯한 대답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아, 그건 말이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었지요. *정의(定義)와 서술(敍述)과 설명(說明) 뭐,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렇지만 "정의(定義)"는 "서술(敍述)"이나 "설명(說明)"과는 다릅니다. 서술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포르쉐가 뭐냐?"고 묻는데 "미끈하게 유선형으로 생겼고, 색깔은 빨간 색인데, 달리기 시작하면 굉장히 빠르고 ......" 하는 게 바로 서술입니다. 설명은 인과관계를 밝혀줍니다. "휘발유가 기화기 안으로 뿜어져 들어가면 실린더의 압축과 점화 플러그의 불꽃으로 폭발이 일어나서 동력이 생기는데, 이것을 바퀴에 전달하면 굉장히 빨리 달리게 되고..." 하는 게 설명입니다. 그런데 정의(定義)는 그런 게 아닙니다. "포르쉐가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독일제 스포츠카" 하면 그만입니다. 정의(定意)를 원하는 데 서술이나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의(定義)는 서술과 설명의 기초입니다. 서술과 설명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정의가 확실치 않으면 서술과 설명의 전체가 모호하고 불확실해 집니다. 사실 제대로 된 정의가 없으면 서술하거나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사전적 정의와 개념적 정의 정의(定義)에는 사전적인 정의가 있고 개념적인 정의가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말의 뜻을 푼 것이지요. 그것은 국어 사전을 보면 됩니다. 개념적 정의는 일정한 분야에서 전용(專用)되는 말뜻입니다. 개념적 정의는 사전적 정의를 바탕으로 합니다만, 거기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맥락과 틀 안에서 그 말이 사용되는 의미를 체계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 맥락과 틀까지 고려한 말의 뜻을 우리는 개념(槪念)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볼 기회가 있겠지만 개념이란 그런 맥락과 틀에 맞도록 "잘 깎이고 다듬어진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운동(運動)"이라는 말이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와 물리학에서 사용될 때에는 그 뜻에 차이가 납니다. 물리학의 운동은 일상적인 말로서의 운동에서 나온 말이지만 거기에는 물리학의 맥락과 틀 안에 필요한 다른 뜻들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물리학이라는 틀과 맥락 안에 적합한 운동(運動) 개념이 생기는 것이지요. 물리학의 운동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으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에서부터 천체의 운행에 이르기까지를 일관되게 서술하거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국어 사전의 "믿음" 혹은 "믿다"와 그 뜻이 연결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맥락과 틀 안에서 특별하게 갖는 독특한 의미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믿음" 개념을 알아야 기독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한결 쉬워집니다. *너무 쉬워서 어려워요. 그러나 어떤 말은 너무 쉬워서 개념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알다"니 "생각하다"니 "있다" 같은 말은 한국말에서 아주 기본적인 낱말들입니다. 그런데 시험삼아서 "알다"가 뭔지 한번 정의해 보시지요. 이리저리 궁리 좀 해보다가 화를 벌컥 내면서 "너, 지금 나하고 장난하냐?" 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것은 그 말들이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너무 쉬워서 당연히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 말뜻을 대강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모두들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그것을 말로 정의해 내는 일에 소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 속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로 표현해 내지 못하면 왜곡과 오해가 생깁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수도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쉬운 말, 쉬운 개념이라도 그것을 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미리 막기 위해서 입니다. 기독교의 "믿음"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자주 사용되는 말인데다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말이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말로 정의하려면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서술이나 설명이라도 제대로 된 정의가 없으면 제 효과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분명하고 뚜렷한 믿음의 정의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어떤 서술이나 설명도 모호해 질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페이스"말고 "믿음"말이에요 "믿음"이라는 쉬운 말과 개념이 제대로 정의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신학의 특성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한국적"이라면서 내세울 만한 신학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쳐지는 대부분의 주류 신학 이론은 전부 외국 것입니다. 미국이나 독일이나 남미나 뭐 그런 나라에서 수입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유학파 신학자나 목회자뿐 아니라 한국의 신학교에서도 그런 나라의 신학자들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비 신학자, 예비 목회자들의 머리 속에는 한국 현실과 개념에 대한 이해보다는 외국 신학자들의 이론이나 외국 목회자들의 경험이 꽉 차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비난조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게 현실입니다. 신학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그렇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학계를 "복덕방"이라고 하겠습니까?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그 지적 재산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외국 것을 소개해서 그 소개비로 먹고산다는 말이지요.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신학이라고 유별나게 독창적일 계기는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 때문에 나타나는 아주 이상한 현상은 "믿음이 뭐예요?" 하고 묻는데, "믿음은 영어로 페이스나 빌리브라고 하는데, 페이스는 뭔가 하면...." 하는 식의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문답이 계속되어도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서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당연한 대화법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믿음에 대해 대화하면서 "일단 영어로 번역"부터 하고 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영어로 번역하지 말고 그냥 한국말 "믿음"을 가지고서 처음부터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면 안될까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한국 개념 "믿음"을 정립하고 다듬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국어 사전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 위에 다른 외국어 사전이나 기존의 연구를 살피면 됩니다. 그러나 일을 거꾸로 하는 한, 그래서 "믿음"을 다짜고짜 "페이스"나 "빌리프"나 "글라우베"로 번역부터 하고 보는 한, 한국 신학의 성립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다 아는 것 같은 개념"을 말로 풀어 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기독교의 생기초 개념을 골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린 것이 바로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었지요. 그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려고 한 것입니다. 약간의 시간과 노력과 생각을 쏟은 끝에 얻은 결론이 바로 앞의 세 글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 다시 믿음의 정의로 돌아가 봅니다. "믿음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도 이젠 대답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한테 설득 당해서 그 분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얘, 정희야, 넌 죄인이란다" 하시면 "아, 그렇군요"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설득 당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야, 넌 그냥 있으면 지옥 가, 임마. 어떻게 할래. 내 말 듣고 구원받을래?" 하시면, "지옥 가긴 싫은데요. 구원을 받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하고 나오는 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게 다 내게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버텨보는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 난 단군의 자손입니다. 아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괜히 허빵 치시지 마시죠. 지옥이라는 데가 정말 있기나 합니까?" 이러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잖습니까? 물론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웃음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내 옛날 생각을 하고서 얼굴이 좀 화끈거립니다. 아직 설득이 안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양반입니다. "당신 하나님 맞아? 나한테 한번 증명해 봐. 거짓말을 해 보란 말이야" 하거나, "여러분, 드디어 하나님이 죽었대요" 하고 소문내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스개가 아닙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철학자들이 그러고 다녔다니까요. 두꺼운 책까지 써가며 말입니다. 다들 설득이 안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한테 설득이 된 상태인지 아닌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척도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느껴지고 그럴듯해 보여서 따라야겠다고 느껴지면 설득이 된 상태라고 저는 봅니다. 설득은 됐는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일단 성경에 민감해 지면 믿음은 가진 사람이라는 거지요. 물론 "설득 당하다"는 뜻의 믿음은 기독교 신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당신은 진화론을 믿소?"라는 질문을 받으면 "네," 혹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윈의 주장을 들어보고서 내게 설득이 되면 "네"이고 설득이 안되면 "아니오"입니다. 이 정의가 비교적 적용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믿음과 우상숭배 믿음은 "설득 당함"이기 때문에 설득할 능력이 없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안됩니다. 예컨대 나는 컴퓨터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는 내 명령을 받을 뿐 나에게 어떤 주장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경계하시면서 "야, 말도 못하는 목상, 동상, 금송아지 한테 제발 절 좀 하지 마란 말이야. 쟤네들은 너희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하신 적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를 설득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빠, 총 한자루 사주세요 한편, 믿음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는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너만 믿는다"거나 "공부하는 데 컴퓨터를 너무 믿지 마세요"하는 경우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도 바로 이 경우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믿음에서는 이런 경우에도 "설득 당하다"의 뜻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하나님께 의지를 하기는 하는데 설득 당하지 않은 채로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 괴로워지십니다. 중학생 짜리 아들 녀석이 "아빠, 가게에 가서 권총 한 자루만 사다 주세요. 나한테는 안 판다거든요. 내일 학교가서 해 치울 녀석이 하나 생겼단 말이에요. 그럼 아빠만 믿어요" 했다고 칩시다. 그런 건 청소년이 갖고 노는 게 아니란다, 다른 장난감도 많잖니, 그러지 말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나 사주마, 너 나한테 맞아 죽을래. 회유와 협박이 아무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저 어디서 듣고 왔는지 새로 나온 권총 모델이 있는데 그게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실탄과 함께 말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설득부터 해야 합니다. 아무리 날 믿는다지만 그걸 사다가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따라서 기독교의 믿음 개념에는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은 포함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기대거나 의지하는 것은 믿음과는 다른 개념이며, 설득 당한 다음의 문제입니다. *설득은 "생각"을 통해야 설득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득(說得)이라는 말에 벌써 나와 있습니다. 반드시 "말"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득에는 반드시 "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설득이 오고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더구나 지금은 구약의 족장시대나 선지자 시대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펑"하고 나타나셔서 "이사 가거라"(아브라함), "신발 벗어라"(모세), "이거 먹어라"(엘리야), "장가 가거라"(호세아)고 일일이 말씀해 주시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로 설득 당한다"는 뜻을 저는 "생각을 통해 설득 당한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생각도 결국 말이라는 점은 앞에서 보았습니다.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 두 자기 중에 어느 한편이 하나님의 입장이 되면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내 속에 "하나님 입장으로서의 나"를 개발해 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생각을 깊고 명료하게 할수록 하나님께 설득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봅니다. 생각 없는 신앙과 생활은 아주 위험합니다. 오죽하면 함석헌 선생님께서 생각 없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라고 까지 하셨겠습니까. 생각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그대로 따르더라도 그것은 불순종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규칙 (십중팔구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오늘날까지 "불순종의 표본"으로 두고두고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울 왕은 그때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 전에 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잊어버렸던 것이겠지요.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게 바로 불순종으로 찍혔단 말입니다. 설득 당하지 않은 형식적 순종, 혹은 생각이 없는 순종은 불순종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라고 봅니다. *모태신앙(?), 모태교인 그래서 우리는 "생각 없이" 쓰는 말들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모태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신앙(信仰)은 믿음이고, 믿음은 "설득 당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뱃속의 태아가 어떻게 설득을 당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태아의 어머니가 설득 당해서 믿음을 갖게 되면 그게 탯줄을 타고 아이에게 전해진다는 말일까요? 좀 황당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좀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 의식이 없는 태아(胎兒)나 영아( 兒)는 믿음을 가지거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다시 낙태의 정당성 문제와도 직결되겠지요. 그 문제는 잘 생각해 두었다가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도록 하십시다.) 사실 믿음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비지니스입니다. 남이 간섭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심지어 어머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단둘이서만 독대해서 결정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대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태 신앙이라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굳이 그런 말을 굳이 쓰고 싶으면 모태교인(母胎敎人)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내가 그런 범주에 끼질 못해서 강짜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모태교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경에 나오는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하루 종일 일했던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았던 품꾼 이야기 말입니다. 모태신앙 같은 어처구니없는 말이 생길까봐 예수님은 이미 2천년 전에 미리 그 이야기를 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해하기 쉽고 간단한 이야기를 왜 그리도 자주들 잊어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우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라네" 하면서 무게를 잡는 사람도 저는 봤습니다. 아주 큰 교회의 장로이자 한 기독교 학교의 교장이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저는 크게 실망했었습니다. 더구나 그때 저는 대학원을 마치고 사회에 막나왔을 때라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럴 때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야말로 "돌아 버리겠더군요." 저 정도의 "교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도 포도원의 품꾼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깔보는 언행을 보니까 구역질이 나오려고 하더라구요. 미국에 와보니까 조상이 기독교인이 된지 1천년 이상 된 사람들이 수두룩 하더군요. 그걸 세대수로 따지만 40대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서 "내가 40대째 기독교인"이라며 무게잡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4대의 열배인데도 말입니다. 제게는 그런 게 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러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부끄러워서 못할 언행을 당당하게들 하고 다닙니다. 더구나 그게 사회 관습으로 굳어져서 애꿎은 사람들의 마음 고생을 많이 시킵니다. *믿음과 생각의 수준 생각에는 사람마다 수준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큐가 60인 사람과 150인 사람의 생각 수준이 같을 리가 없습니다. 여섯 살 짜리의 생각과 육십 살 먹은 노인의 생각의 깊이가 다르겠지요. 하지만 믿음, 즉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생각의 수준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아이큐가 낮은 사람은 그 생각 수준에서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제 생각 수준에서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면, 그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믿음과 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바보와 어린아이는 믿음을 갖는 데에 더 유리한 입장입니다. 한번 설득 당하면 그것을 뒤집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하나님한테 설득 당했던 것을 좀 물리고 싶어요. 다른 생각이 났거든요"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다른 생각이 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다른 생각은 많이 해 볼수록 좋습니다. 그것을 자기 믿음의 체계에다가 잘 편입을 시킬 수 있으면 됩니다. 문제는 그 다른 생각 때문에 그 전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데에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개념을 읽고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도 별거 아니구만" 합니다. 그렇지만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은 유드리가 많으시구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에 관해서라면 새로운 생각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믿음 체계에 어떻게 편입시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설득의 내용 지금까지 믿음은 "하나님한테 설득 당하기"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설득의 도사라고 합니다. 한번 맘먹은 사람은 어떻게든 끝까지 설득시키시고야 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한번 하나님께 찍혔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빨리빨리 설득 당하는 것이 시간과 에너지 낭비 없는 현명한 처사라고들 합니다. 우리는 말과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께 설득 당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설득하시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라고 설득하십니까? 또 우리가 받아들여서 믿음으로 발전시키는 그 내용이 뭡니까? 이건 답이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야 천가지 만가지이겠지만, 그걸 한꺼번에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가지고 사람을 설득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뜻"이 뭔지 약간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흔히 윌(will)이라고 번역해서 약간 혼란을 줍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풀면 아주 간단합니다. 정(情), 의(意), 지(志)라는 세 한자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세 자 모두 그 새김이 "뜻"입니다. 한국말에서는 감정과 생각과 의지가 모두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감정과 생각과 의도를 알아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분 좋으시면 나도 기분좋고, 하나님이 슬프시면 나도 슬퍼지는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든 그것을 알아서 감을 잡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또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이시고 싶어하시는 지 알아서 그 사업의 일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실 그것은 공평한 일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내 감정과 생각과 의지를 일일이 다 헤아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가 자신의 그것과 맞아 떨어지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성경의 말씀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봅니다. *설득 당한 사람의 행동 말과 생각으로 하나님께 설득을 당한 다음에는 행동의 문제가 기다립니다. 야고보 사도의 눈초리를 의식하게 되는 거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니까 말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는 옆에 서서 "괜찮아, 괜찮아, 하나님이 다 조치해 주실거야" 하시겠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해 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설득 당하는 일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분명히 서로 다른 일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좋은 일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그 둘이 서로 다릅니다. 믿음은 믿음, 행동은 행동입니다. 그 둘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키느냐는 하나님께 어떤 강도로 어떻게 설득 당했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결단에 달린 문제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둘은 서로 연결시켜야 할 두 개념이지 원래 하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설득을 당했더라도 곧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도 믿음은 성장을 위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의 맨 마지막 단계가 바로 신행(信行)이 완전히 일치되는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님 표현을 빌면 "제 하고 싶은대로 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從心所慾不踰矩)" 상태이겠지요.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믿음 안에서 행동이 자유로워지는 단계이겠습니다. *비오는 날 삽살개 그런데 아주 경계해야 할 것은 설득 당하지 않은 채로 행동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의 이러저러한 명령과 권고, 교회의 이러저러한 관행을 따르기는 하는데 그게 하나님께 당한 설득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떤 목사님은 "비오는 날 삽살개"로 비유하시더군요. 삽살개가 날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삽살개가 좋습니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 만큼은 제발 반갑다고 나한테 안 달려들면 좋겠단 말입니다. 그 홀딱 젖은 몸뚱이며 흙투성이 발을 해 가지고 달려들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믿음"이 생기면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하다 보면 그로 인해 믿음이 생긴다는 말은 적어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일을 하는 중에 하나님과의 대화를 계속하면 믿음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믿음의 원인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 일과 업적은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과 업적을 "경력"으로 삼아서 지위를 요구하거나, 가우를 세우려고 하거나, 무게를 잡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 눈으로는 다 헛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습관이 없는 사람에게 "일"까지 맡기면서 그런 습관을 만들도록 요구하는 것은 좀 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직 설득 당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설득 수준이 낮거나 약한 사람들에게는 일의 기회보다는 성경공부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라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설득"이라는 말로 다시 정리해 보았을 뿐입니다. *맺으면서 바울 사도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열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힐 가능성은 아예 없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기독교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믿음이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상식적인 말입니다. 어떤 일이고 억지로 하거나 뜻 모르고 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억지로 혹은 뜻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런 억지와 무의미를 벗어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미있는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설득의 주제는 "내 뜻은 이러이러하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설득과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의정지(意情志)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고,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습니다. 거칠기도 하고 중구난방인 면도 없지 않지만, 믿음 개념을 잘 세워보고 싶은 생각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글들이 너무 길어지는 경향에 저도 당황하고 있습니다만, 달리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서 그냥 올립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생각과 수정이 필요함을 잘 압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 **생각을 깊이하면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가 한결 쉽습니다. **그리고 체스에서나 신앙에서나 "첫 수"가 아주 중요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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