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호> 다시 "소망"에 대하여 | 2001년 07월 18일 |
우리는 앞에서 소망이 "확실하고 객관적인 것을 준비하며 기다리다"는 뜻임을 보았습니다. 그 소망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확실하며, 허다한 사람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객관적입니다. 또 그 바램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에 바탕을 둔다는 점도 앞글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소망에 대해 모두가 고운 눈초리만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객관성과 확실성을 의심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조차도 "그러면 좋고, 아니어도 섭섭잖은" 정도의 바램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요. 이 글에서는 기독교의 소망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하나 소개하고, 그것이 어째서 올바른 것이 아닌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꿈"과 "아편" 19세기 독일 철학자중에 포이에르바하가 있습니다. 헤겔의 관념론 철학을 비판하면서 유물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기 책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는 인민의 꿈"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아무 소용없는 일장춘몽이라는 것이지요. 포이에르바하의 후배인 칼 마르크스는 "시 같은 산문 쓰기"의 천재였습니다. 그의 가장 분석적인 글 "자본론"에 조차도 시적인 풍자와 해학, 은유와 비유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기억에 남는 말들을 곧잘 남겼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인민의 꿈"이라는 표현을 "인민의 아편"으로 살짝 바꿨습니다. "꿈"을 "아편"으로, 단 한 낱말을 바꿨는데도 뜻이 엄청 강해졌습니다. 155밀리 포탄이 원자탄이 된 격입니다. 이 말이 유명해져서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종교를 반박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 애용합니다.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거봐라는 듯이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잖아" 하고, 그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잖아, 글쎄?"합니다. *기독교의 소망(所望)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가 비판한 종교는 물론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어떤 점 때문에 꿈이니 아편이니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소망(所望) 때문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독교의 소망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하늘나라의 도래에 맞춰집니다. 바로 그 소망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 심지어 박해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면 이 세상의 고통도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설사 고통으로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참아낼 힘이 생깁니다. 미래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은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즐겁고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의 소망은 아편이라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편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아편, 맞아요. 아편은 의약용으로는 진통제로 쓰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 몰핀계 진통제이지요. 이걸 한 알 먹으면 왠만한 통증은 사라집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의 허벅지에 한 대씩 퍽퍽 꽂아주는 것이 있었잖습니까? 그게 바로 몰핀 주사입니다. 순식간에 고통이 사라집니다. 강력한 진통제지요. 또 아프지 않은 사람도 아편을 기분전환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마약(痲藥)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아편 사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강한 중독성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편은 중독성이 있는 약물인데 고통을 다스리기 위한 진통제와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한 마약으로 쓰입니다. 일견 기독교의 소망도 아편과 비슷해 보입니다.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신앙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의 소망은 참으로 필요하고도 유용합니다.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소망을 하늘에 두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본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그 소망을 따라서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고, "희롱과 채찍질"을 견디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돌"과 "톱"과 "칼"에 죽기도 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고립되어 살기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로마 박해시대의 기독교인들도 몇 세대에 걸친 땅굴 생활을 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소망 때문이었고,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 형장의 이슬로 기꺼이 사라져간 이유도 바로 그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기독교의 소망은 아편과 그 기능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활력소이자 생활의 진통제입니다. 한번 그 소망을 맛보면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다른 어떤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위안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소망은 중독성까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편과 꼭 닮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그다지도 싫어하는 것일까요?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왜 아편입니까? 그것은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한 진의가 기독교를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아편" 비유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럼 그의 비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소망이 진통제이자 기분 전환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중독성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사람들의 "감각"과 "생각"과 "의지"를 마비시키도록 악용됐기 때문입니다. 아편은 약리상 중추신경 억제제입니다. 아편을 사용하면 고통을 잊고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아편이 인체의 "느끼는 작용"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편의 중추신경 억제력은 감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도 마비시키고 의지도 약화시킵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를 마비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활용했던 당시 독일의 사회 상황과 교회 상황을 비판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편"이었던 독일 상황 어떤 말이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대와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18세기말과 19세기초의 독일은 한국의 1970년대와 아주 흡사했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개발은 시작되었는데, 불쌍해 진 사람들은 늘어났습니다. 농민들은 제 땅에서 쫓겨나 발붙일 곳을 잃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과잉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습니다. 당시는 노동시간 규제나 최저임금 규정도 없던 시대였습니다. 또 도시 빈민은 재산과 희망을 잃고 여기저기 밀려다니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이어서 체제에 위협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또 당시는 지금처럼 민주주의 시대도 아니었으므로 선거에서 그들의 표를 걱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수가 문제였습니다. 그 엄청난 수의 농민과 노동자와 빈민들이 몰려다니면서 정부와 기업에 반기를 들 경우, 이는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19세기를 풍미한 혁명의 기운입니다. 사회주의가 체계화되기 이전에도 이미 그런 움직임이 여기저기 보이곤 했습니다. 각종 농민 반란과 기계 부수기 운동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런 혁명의 씨앗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됐던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독교의 소망이었습니다. "죽으면 하늘나라 가서 호의호식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에서의 고생과 고통은 좀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성경을 동원해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정교(政敎)는 분리(分離)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돌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말에 세뇌되어 "생각"을 빼앗긴 19세기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미친 듯이 일만 하고 반항의 정당성을 거세당함으로써 기업가와 정치가, 그리고 거기에 영합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솔찬한 이익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던 파스칼과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데까르트의 후예인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가 이런 상황을 눈뜨고 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죽은 뒤의 일을 볼모로 산 사람들을 착취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편쟁이들처럼 기독교에 취해 생각이 정지된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 말로 "의식화"지요. *기독교가 "히로뽕"이었던 한국 상황 19세기 독일에서 기독교가 "아편"처럼 사용되었다면 20세기 한국에서는 "히로뽕"처럼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암페타민의 속칭인 히로뽕은 아편과는 달리 중추신경 활성제입니다. 감각과 생각과 의지를 억제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합니다. 그래서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과 사업을 부추깁니다. 일제시대의 기독교가 바로 그랬습니다. 식민지 상황이라는 현실과는 애써 거리를 두려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일제의 정책에 부역한 것은 소망을 가진 기독교로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더구나 로마 박해시기의 기독교인들과, 무더기로 순교를 맞았던 조선 천주교인들의 결단을 생각하면 좀 창피한 일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대신 조선의 기독교회는 일제가 허용한 테두리 안에서 교회를 키우고 교인 수를 늘리는 데에 열을 올렸습니다. 아주 열성적인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사에 전래가 없다는 평가도 받았고,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히로뽕" 생각이 납니다. 현실 인식 없이 중추신경 활성제에 의지해서 천방지축 이일 저일 벌이는 사람과도 같아 보입니다. 게다가 그 교세 확장을 위한 방법이 "예수 천당"이면 족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한 책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소망이되 그것을 마치 히로뽕처럼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해방 후에도 독재 권력과 자본주의적 경제개발 과정에 비판없이 영합함으로써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들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실과 거리를 두는 듯 하면서도 사실은 권력과 재력에 영합하고 그들의 비호와 묵인아래 교세를 확장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노력은 오늘날 교회 등록 교인수가 전체 인구의 사분의 일에 달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세계 십대 교회 중에 한국의 교회가 여럿 끼일 뿐 아니라, 대도시에서는 두어 집 건너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도 같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런 양적인 성장에 상응하는 질적인 "열매"를 자랑하는 글이나 이야기는 좀처럼 듣기 힘듭니다. 기독교 소망을 히로뽕으로 사용한 역사로 읽히는 부분입니다. *아편인가 히로뽕인가 기독교의 소망은 "아편"입니까? 아닙니다. 소망은 사람들의 감각과 생각과 의지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통해 그런 기능을 억제시켜야 했다면 하나님께서 뭐하러 애초에 그런 기능을 주셨겠습니까? 기독교의 소망은 "히로뽕"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되고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의지를 과장되게 자극해서도 안됩니다. 앞에서 본 바대로 기독교의 소망은 그 자체로서 "확실"하고 "객관적"일 뿐 아니라 "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장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이지요. 요컨대, 기독교의 소망은 아편도 아니고 히로뽕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확실하고 객관적인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그것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항상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며, 그 속에서 어떻게 소망을 맞을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지 헤아리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 *양귀비 꽃입니다. 요염하지요? 관상용으로 그만이라지만 아편 만드는 원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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