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관계에 대하여 | 2001년 07월 20일 |
모순(矛盾)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창과 방패라는 말입니다.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인데, 현대 논리학에서도 요긴하게 이용되는 개념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를 배경으로 한 그 고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무기상이 제 창을 선전하면서 "어떤 방패도 뚫습니다"고 했습니다. 곧이어 제 방패를 선전하면서 "어떤 창도 막아냅니다"고 했지요. 그러자 구경꾼이 물었습니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가장 쉬운 해석은 "각각의 설명은 그럴 듯 한데, 한데 모아서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한꺼번에 살피기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개념을 새롭게 정의(定義)해 보려고 했습니다. 우선 "믿음"은 "설득(說得) 당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참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설득 당했거나 설득 당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은 "객관적이고 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갖는 것입니다. 끝으로 "사랑"은 "힘들어도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나를 아무리 힘들게 만들어도 참고 견디고 덮어주고 보듬고 싸안아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정의들과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는 모두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행동들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개념적 정의가 그 자체로는 그럴 듯해 보여도 서로 연관시켰을 때에 "모순"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은, 서로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개념들이 서로 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들 사이에 중첩되거나 모순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 먼저 "믿음"과 "소망"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믿음(信)"이라는 한국말, 혹은 "피스티스(pistis)"라는 헬라어는 흠정역 영어 성경에서 페이스(faith), 트러스트(trust), 빌리프(belief)의 세 낱말로 번역되었음은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 영어 성경에서는 "피스티스"를 대부분 "페이스(faith)"로 번역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2백4십4개의 피스티스 중에서 2백3십9개가 페이스입니다. 한편 그 동사 "피스튜오(pisteuo)"는 대부분 "빌리브(believe)"로 번역됐습니다. 피스튜오는 신약성경에 2백5십번 정도 나오는 데 그중 2백4십 번이 빌리브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피스티스 혹은 피스튜오가 "트러스트(trust)"로 번역된 예는 드물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흠정역 영어 신약성경에는 트러스트라는 말이 전부 27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12번만 페이쏘와 피스튜오의 번역어로 등장합니다. 생각보다 적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 둘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15번의 트러스트가 엘피조(elpizo)의 번역어입니다. 엘피조는 엘피스(elpis)의 동사이지요. 엘피조는 "소망하다"는 뜻이구요. "소망하다"가 "믿다"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라다"가 "믿다"라니요. 소망이 믿음이라니요? 번역어 분석을 통해 믿음과 소망이 서로 관계 깊은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낌새는 이미 히브리서 11장1절에 내비쳐진 바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씀이었지요. 거기서 "바라는 것"이 바로 엘피스, 곧 소망이었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상이라는 말입니다. "실상"은 고대 헬라어 후포스타시스(hupostatis)를 번역한 말입니다. 원래 뜻은 "-의 밑에 놓여있는 것, 기초, 토대, 하부구조"이라는 뜻입니다. 후포가"-아래"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스타시스가 "놓다, 두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서술 형식에 주목해 주십시오. "'갑'은 '을'의 '병'이다"라는 형식입니다. '갑'과 '을'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병'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실제적으로 바꿔 봅시다. "조오치는 조정희의 아들이다"는 문장이 있다고 칩시다. (오치는 제 아들 이름입니다. 그 애를 낳고서 너무 좋아서 이름을 오치라고 붙였습니다. 지금도 이름을 부를 때에는 "조오--치"하고 부릅니다.) 조오치는 조정희와 "아들"이라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조정희는 조오치의 아빠라는 관계를 갖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정희와 조오치는 부자(父子) 관계입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상, 기초, 토대, 하부구조"라고 합니다. 믿음은 소망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토대"라는 관계로 그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초니, 토대니, 하부구조라는 말이 모두 건축 용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건축물의 비유를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믿음이 소망의 토대라면, 소망은 믿음의 상부구조가 되겠지요. 도식적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그게 어원분석에서 드러난 믿음과 소망의 관계입니다.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더라도 따라가 보면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어쨌거나 "믿음"과 "소망"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입니다. 토대는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건축물의 안정과 내실을 좌우합니다. 토대가 깊고 넓고 튼튼하면 높고 크고 안정적인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고 튼튼하면 소망도 높고 크고 안정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믿음과 소망의 관계가 비교적 명료해졌습니다. 집의 비유를 쓰니까 좀 더 이해가 쉽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이고, 소망은 믿음의 상부구조입니다.그러면 "사랑"은 그 둘과 어떤 관계를 갖습니까? *믿음/소망과 사랑 집의 비유를 계속해 봅시다. 토대든 상부구조든,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어떤 건물이든 목적이 있습니다. 잠을 자는 곳일 수도 있고, 책을 모아두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일 수도 있고 볼링을 하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목적 없는 건물은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토대와 소망이라는 구조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과 인류의 구원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고 각 사람에게 영생을 베풀고자 하는 것이 믿음과 소망으로 이루어진 집이 세워진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도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해야 하는 활동이 바로 "사랑"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앞에서 사랑, 즉 아가페(agape)는 주로 능동 동사로 정의되어 있다고 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애(愛)의 개념에도 나타났듯이 다른 사람을 참아주고 견디어주고 보듬어주고 껴안고 나아가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4-8과 갈라디아서 5:22-23이 가리키는 내용입니다. 그런 능동적인 행동 혹은 성령 안에서 맺는 열매들이 바로 사랑임은 바로 앞글에서도 보았습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과는 물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의 근본 내용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두 계명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두 가지 지침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은 믿음과 소망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실천(實踐)하는 모든 행동(行動)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트러스트"와 "사랑" 지금까지 어원분석을 통해 믿음은 소망의 토대이며, 소망은 믿음의 상부구조임을 보았습니다. 또 사랑은 믿음과 소망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실천(實踐), 즉 활동이요 일이라는 점을 보았습니다. 그럼 이같은 어원 분석이 성경의 다른 구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봅니다. 우선 믿음과 사랑을 직접 연결시킨 언어학적 증거들을 찾아 보겠습니다. 트러스트(trust)는 신실하다(faithful)는 뜻의 고대 영어 트뢰웨(trEowe)가 변형된 말입니다. 트뢰웨는 다시 나무(wood)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다루(dAru)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트러스트(trust)와 트루(true)는 모두 트리(tree)와 어원을 공유합니다. "나무"라는 말이 트루와 트러스트를 낳은 것입니다. 우리는 앞글에서 "나무"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매"임을 보았습니다. 열매 안에는 씨가 있습니다. 이 씨는 자기 자신을 무수히 재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더 많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재생산을 못하는 나무는 불에 던지우게 됩니다. 이게 바로 "있는 자는 더 받아서 풍족해 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의 뜻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서술된 성령의 "열매"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정의하는 행위 동사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은 열매맺기 위한 모든 실천을 가리키는 동시에 열매의 궁극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지어진 집에서는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트러스트와 페이스의 어원이 나무(tree)에 닿아 있다는 점, 그리고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열매는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며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와 일치한다는 점 등은, 믿음의 기초 위에 세워진 소망의 집에서 사랑이 실천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빌리프"와 "사랑" 또 다른 어원적 증거로 빌리브(believe)를 보겠습니다. 이 낱말은 고대 영어의 벨레판(belEfan)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비(be)와 라이판(lyfan)의 합성어인데, 라이판이라는 말은 "허용하다, 받아들이다, 그래서 믿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고대 영어에서 이 라이판(lyfan)과 어원을 공유하는 말로 레오프(lEof)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레오프의 뜻은 "사랑스럽다"입니다. 레오프는 다시 라틴어 루베레(lubEre) 혹은 리베레(libEre)와 연결되는데 이는 둘 다 "기쁘게 하다" (to please)라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빌리브와 러브가 연결되었습니다. 사실 골치 아프게 이말 저말의 어원을 따져 보았습니다만, 상식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거기에 설득 당해 주고 받아들여 주면(믿음, 피스티스, 빌리프),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게 아니냔 말입니다(아가페, 러브, 기쁘게 하다). 믿음과 사랑 사이의 이같은 관계는 골로새서 1:23에서도 확인해 줍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믿음이 토대이고 소망이 그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5의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이 믿음에 의해 생겨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역시 토대가 먼저이고, 그 위에 상부구조입니다. 유다서 1:20에는 아예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요청하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사랑"은 "일하기" 사랑이 "힘들여 일하기"라는 점은 데살로니가전서 1:3의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또 믿음이란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을 썼고, 소망이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으면서 기다리는 것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갈라디아서 5:6에도 "믿음의 역사"는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개념이 동시에 등장하는 신약성경의 다음 구절을 봅시다. (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2)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 (3)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후 5:8) (1)의 고린도후서 13:13에 나오는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은 이미 어원을 통해서 살폈던 바 있습니다. 사랑은 나무의 열매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또 (2)의 고린도전서 13:8에서도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모든 것을 믿어야 하고(믿음) 모든 것을 바래야 한다(소망)" 고 명백히 보여줍니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임을 보여줍니다. (3)의 데살로니가후서 5:8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와 "소망의 투구"라는 표현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세상 끝 날에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로 가슴을 보호하고 소망의 투구로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마음 씀과 관계가 깊으며, 소망은 우리의 머리 씀과 관계가 깊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설득 당하는 일, 즉 믿음을 갖는 일은 사람의 머리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 역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합니다. 이성적인 작용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소망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슴으로 받아들인 믿음에 토대를 두며, 가슴으로 행동하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다시 한번 요약해 봅니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이며, 소망은 믿음의 상부구조입니다. 믿음이 깊고 단단하면, 소망이 높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사랑의 수고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입니다. 사랑이라는 열매가 없으면 애써 세워놓은 집, 혹은 애써 키워놓은 나무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믿음의 토대, 혹은 뿌리가 더욱 굳어집니다. 그 위에서 소망은 더욱 커지고 확실해 집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풍성해 지고 .... 네, 그렇습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선순환(善循環)입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원동력 이제 신망애(信望愛)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내용"입니다. 혹은 다른 말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계약(covenant)"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말씀"으로 주신 약속, 즉 "언약(言約)"입니다. 한편 사랑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글"의 형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의 형태로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입니다.애초에는 열 가지였지만 나중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가지로 축약됐습니다. "언약(言約)"이라는 말과 대구를 맞추기 위해서 십계명과 새 계명을 "언명(言命)"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중요하며, 또 기독교에서 "말"이 중요합니다. *토대와 상부구조 사족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잊어버리기 전에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동안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이 기독교적인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비판 아닌 비판(반기독교적 마르크시스트), 혹은 칭찬 아닌 칭찬 (마르크시스트적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비판이든 칭찬이든 상관없이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도 그 성경적 증거가 드러났습니다. 초기 마르크스의 사회철학을 요약하라면 "토대와 상부구조, 그리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실천"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토대란 경제,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가리킵니다. 또 상부구조란 경제의 토대위에 세워지는 법, 도덕, 의식, 철학, 문학 등의 인간의 다양한 의식작용과 그 결과를 가리킵니다. 해석의 내용과 이론적인 함의는 다릅니다만,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축학적 비유가 그대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토대이고 소망이 상부구조입니다. 나무의 비유를 사용하면, 성경에서는 믿음이 뿌리이고 소망이 줄기와 가지와 이파리입니다만, 마르크스에게서는 경제가 뿌리이고 법과 도덕과 철학과 문화가 줄기요 가지요 이파리입니다. 상부구조는 토대에 이파리와 가지와 줄기는 뿌리에 근거를 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 초기 저술에서 강조되어 마지않았던 "실천(praxis)"은 기독교 신앙과 윤리에서 행동을 강조하는 "사랑(agape)"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마르크스가 실천을 강조한 정도는 바울 사도와 야고보 사도가 사랑(agape)를 강조한 정도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오랜 랍비 전통의 가문에 태어난 마르크스가 유태적 교육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어린 시절에 받은 성경 교육이 얼마나 끈질긴 영향을 미쳤는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비유가 마르크시즘의 전문용어처럼 이해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비유적 설명의 근원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조정희 드림. ---------------------------------------------------------------------------------- *믿음은 소망의 토대입니다. 사랑은 그 집의 존재 목적이고요. *집을 바위 위에 짓더라도 어리석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생각을 건너 뛰면 그렇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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