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30:19-20)
죄를 짓고 저주가 임했을 때 그저 절망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죄로부터 돌아서면 다시 복이 임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백성들을 대하시는 초지일관 하신 방식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사람을 살게 하시려는 의지의 사랑입니다.
지키면 살 수 있는 법을 주시고, 거역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하였어도 돌이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은총을 예비 해 놓으셨습니다. 법을 주심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예비된 은총도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의 큰 줄기는 생명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이 법은 지키기 쉽고 회개는 단순명료합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29:14)
율법은 지키기 어려워 인간을 함정에 빠뜨리는 독이 아닙니다. 지키기 쉽고 알기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법입니다. 그 법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그 법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기 어려운 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지킬 수 없는 법이 되어버렸을 뿐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가 그 자체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그 나무 실과를 먹지 않을 수 없게 이끌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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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생명의 법을 받았으나 배반했고
다시 돌이켰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 우리가 죄인임을 잘 나타내는 역할에 충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라고 주신 쉬운 말씀조차 지킬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 우리의 처참한 모습을 이 율법의 역사 속에서 찾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그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최종적인 계시로서, 율법을 넘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완성 하십니다.
그러나 작동하는 원리는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너무나 쉬운 생명의 복음이라할지라도, 마음이 완고하며 비뚤어진 이들에겐 따를 수 없는, 그리하여 구원을 스스로 외면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하나님은 방식만 달리하실 뿐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 사랑의 손길을 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펼쳐 놓고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택하기를 그리고 복을 얻기를 열망하고 계시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