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5:32-33)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계명들의 근본이 되는 계명입니다.
신명기의 십계명은 출애굽기의 십계명과 동일하며,
차이가 있다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출애굽기엔 창조의 6일 이후 안식하신 날에 따라야 한다는 설명으로 되어 있는데 신명기에선 그 대신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명령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체된 정도입니다.
가톨릭은 이 십계명을 말씀을 그대로 인용은 하나 두번째 계명을 첫째 계명과 하나로 묶고 대신 열번째 계명을 이웃의 아내와 기타로 구분하여 둘로 나눠 10을 채웁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두번쩨 계명을 어기는 것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교인들을 속이기 위하여 물타기를 한 것인데,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각설하고
십계명을 필두로 한 모든 계명들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곤고하게 하고 망하게 하기 위하여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무슨 큰 이득을 얻기 위하여 그 계명을 만들어 강요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 계명을 잘 지켜 우리의 인생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기를 기대하시며 돌판에 새기고 책에 기록하여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계명들을 잘 지키는 것은 말하자면 누구보다도 그 계명을 지키는 본인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기왕지사 꺼낸 말이니 두번째 계명과 관련하여 이야기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나무나 돌이나 쇠붙이로 우상을 만들자면 돈이 듭니다. 그것들이 불타거나 약탈을 당하면 새로 만들어야 하니 또 돈이 듭니다. 그 앞에 그것들이 먹지도 못하는데 음식을 차리면 그것도 돈입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그것들에게 소원을 빌고 하소연을 하면 심리적으로 조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시간낭비만 할 뿐입니다. 시간도 돈입니다. 뭔가 있어보이는 그 우상의 능력과 자비심을 이용하여 더 큰 욕심을 이루기 위해 더많은 음식과 예물을 바치려 돈은 더 들어갑니다. 그리고 욕심이 커갈수록 돈은 더 많이 듭니다. 게다가 욕심엔 끝이 없습니다.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없습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양심은 파괴되고 욕심만 부풀어갑니다.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니 그 끝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두번째계명을 주신 것이고, 그 계명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쓸데 없는 소비가 없이 과도한 탐욕을 부리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어찌 성실하게 살지 않겠으며 어찌 진실하지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 거기 어찌 복이 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다른 계명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십계명을 사랑의 계명으로 배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 십계명이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 십계명을 너머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주신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다른 뜻을 거기 두셨겠습니까? 십계명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