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원경^^
난 편지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겨우 열흘 훈련받는데 장교후보생이 까까머리 신병아가들처럼 편지 타령이냐고...
그런데, 미안하다. 날이 추워지고 눈도 제법 내리니 고된 훈련에 잠시 누리는 너의 즐거움을 강탈한 것 같아서 말이다.
요즘 2만보로 걷기를 늘이고 매일 허덕이며 그 양을 채우고 있다.
약 5천보쯤이 오랫동안 1만5천보 걷던 습관 때문에 모자라곤 한다. 보름째 새벽 한강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이유지.
옛 육갑문 자양 나들목을 지나 한강에 접어들면 아침과 오후에 피톤치드 많이 나온다는 숲길로 간다. 밤이니 산소나 피톤치드 대신 이산화탄소가 많이 나오겠지만, 그까짓 거 거기 서서 나뭇가지사이로 보이는 별들을 감상하는 맛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다만 두 가지가 아쉽다. 하나는 오른편 농구장에 켜 놓은 밝은 조명이 별빛을 깎아 먹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는 아무도 나와 함께 이런 밤중에 감상에 젖어 공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마저도 언니 오빠들처럼 잘 자라서 어른이 되었으니 이런 늙은 아비의 넋두리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눈치 채고 픽...하고 웃어버릴 것이다마는, 늙어갈수록 더 감상적이 되어 가는 것은 인생 6십을 넘긴 이들에게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인 것이지. 유성우가 내린다고 신문에 나오면 어린 너희들을 대동하고 한강으로 나갔었다. 가로등이 너무 밝아 새벽 밤하늘에 막강한 별들조차 희미한데 미련하게 강변 둑에 기대 나란히 누워 같이 하늘을 보았었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 나태지옥을 향해 가는 어른이 된 너희들에게선 이젠 기대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안다.ㅎㅎ
오늘 새벽에도 6천보가 부족하여 한강으로 나갔다. 하늘에선 별 대신 눈이 참 착하게 떨어지고, 제법 쌓인 눈엔 고양이들 발자국과 내 발자국만이 수직으로 교차하였다. 눈이 그들의 보금자리에 뭔가 문제를 안겨주었지 싶다. 자신의 둥지를 떠나 인간의 구조물로 피난해 가는 듯 보여 녀석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눈 내리는 밤, 외로움이란 동병상련...도 없진 않았다.
헌병대 건물 가까이에 갔을 때 자전거 길을 가로지르고 위로 막 올라가는 얼룩이 한 마리를 목격 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돌아보았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가는 길을 계속 눈길로만 따라갔다. 그녀와 내가 그 시간 거기서 무슨 인연으로 만난 것인지...눈 오는 밤 아무도 없는 그 텅 빈 흰색의 무대 위에서, 하늘의 자비로 뿌려지는 흰 꽃의 화려한 반짝임 속에 묻혀 겨우 한다는 것이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마주치고 떠나버리고 나는 잠시 머물러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종쳐버리는 것이라니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수중보까지 가던 길의 내 발자국이 선연히 남아있었다. 자양나들목 입구까지, 딱 거기까지...
자양나들목을 벗어나 더 이상 한강이 아닌 현실로 접어들자 나는 내 발자국을 잊고 고양이를 잊고 흰 눈을 잊고 말았다. 한 시간의 환상이 끝났다. 2만1천보...
오늘 아침은 간편 토스트다.
이마트스프를 끓이고, 싸구려 식빵을 포도씨유에 굽고 계란 후라이를 하고 구운 식빵으로 계란을 싸서 스프에 적셔 먹었다. 딜리셔스!^^
원경아,
동료들과 함께...잘 먹고 잘 견디고 잘 도와라. 건강하게 훈련을 마치길 바란다.
2018.1.10. 너에게 미안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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