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원경이에게 보내는 위문편지...?^^

주방보조 2018. 1. 10. 11:42

 사랑하는 원경^^

 난 편지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겨우 열흘 훈련받는데 장교후보생이 까까머리 신병아가들처럼 편지 타령이냐고...

그런데, 미안하다. 날이 추워지고 눈도 제법 내리니 고된 훈련에 잠시 누리는 너의 즐거움을 강탈한 것 같아서 말이다.

 

 요즘 2만보로 걷기를 늘이고 매일 허덕이며 그 양을 채우고 있다.

5천보쯤이 오랫동안 15천보 걷던 습관 때문에 모자라곤 한다. 보름째 새벽 한강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이유지.

옛 육갑문 자양 나들목을 지나 한강에 접어들면 아침과 오후에 피톤치드 많이 나온다는 숲길로 간다. 밤이니 산소나 피톤치드 대신 이산화탄소가 많이 나오겠지만, 그까짓 거 거기 서서 나뭇가지사이로 보이는 별들을 감상하는 맛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다만 두 가지가 아쉽다. 하나는 오른편 농구장에 켜 놓은 밝은 조명이 별빛을 깎아 먹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는 아무도 나와 함께 이런 밤중에 감상에 젖어 공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마저도 언니 오빠들처럼 잘 자라서 어른이 되었으니 이런 늙은 아비의 넋두리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눈치 채고 픽...하고 웃어버릴 것이다마는, 늙어갈수록 더 감상적이 되어 가는 것은 인생 6십을 넘긴 이들에게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인 것이지. 유성우가 내린다고 신문에 나오면 어린 너희들을 대동하고 한강으로 나갔었다. 가로등이 너무 밝아 새벽 밤하늘에 막강한 별들조차 희미한데 미련하게 강변 둑에 기대 나란히 누워 같이 하늘을 보았었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 나태지옥을 향해 가는 어른이 된 너희들에게선 이젠 기대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안다.ㅎㅎ

 

오늘 새벽에도 6천보가 부족하여 한강으로 나갔다. 하늘에선 별 대신 눈이 참 착하게 떨어지고, 제법 쌓인 눈엔 고양이들 발자국과 내 발자국만이 수직으로 교차하였다. 눈이 그들의 보금자리에 뭔가 문제를 안겨주었지 싶다. 자신의 둥지를 떠나 인간의 구조물로 피난해 가는 듯 보여 녀석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눈 내리는 밤, 외로움이란 동병상련...도 없진 않았다.

헌병대 건물 가까이에 갔을 때 자전거 길을 가로지르고 위로 막 올라가는 얼룩이 한 마리를 목격 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돌아보았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가는 길을 계속 눈길로만 따라갔다. 그녀와 내가 그 시간 거기서 무슨 인연으로 만난 것인지...눈 오는 밤 아무도 없는 그 텅 빈 흰색의 무대 위에서, 하늘의 자비로 뿌려지는 흰 꽃의 화려한 반짝임 속에 묻혀 겨우 한다는 것이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마주치고 떠나버리고 나는 잠시 머물러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종쳐버리는 것이라니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수중보까지 가던 길의 내 발자국이 선연히 남아있었다. 자양나들목 입구까지, 딱 거기까지...

자양나들목을 벗어나 더 이상 한강이 아닌 현실로 접어들자 나는 내 발자국을 잊고 고양이를 잊고 흰 눈을 잊고 말았다. 한 시간의 환상이 끝났다. 2만1천보...

 

 오늘 아침은 간편 토스트다.

이마트스프를 끓이고, 싸구려 식빵을 포도씨유에 굽고 계란 후라이를 하고 구운 식빵으로 계란을 싸서 스프에 적셔 먹었다. 딜리셔스!^^

 

원경아,

동료들과 함께...잘 먹고 잘 견디고 잘 도와라. 건강하게 훈련을 마치길 바란다.

                                                                                                                                                      2018.1.10. 너에게 미안한 아빠가...

 

 

 

  • malmiama2018.01.11 07:34 신고

    훈련 중인 장교 후보생에게 정서적으로 좋을
    위문 수필입니다.
    씩씩한 원경 소위~~필승!

    답글
    • 주방보조2018.01.11 08:03

      지난번도 그랬고 충신이에게도 그랬었고...염려해주고 나선 충고^^...즉 잔소리로 귀결되기에
      그냥 일기를 써서 보낸다 생각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
      교신이는 이 편지를 읽더니 ... 누나가 울 것 같은데요...그러더군요. 그럴리가...그랬지요. ㅎㅎ

  • 한재웅2018.01.11 12:04 신고

    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배어있는 편지군요.
    사관후보생의 눈에 눈물이 그득할것이 틀림없습니다.

    답글
    • 주방보조2018.01.11 18:56

      ㅎㅎ...제가 사춘기소녀같아지는 듯 글쓰기가 점점 유치해져 갑니다.
      원경이는 안 울겁니다. 걘 예전의 원경이가 아니거든요. 아주 씩씩한 페미니스트여군장교후보생이거든요. 여린 감성은 모조리 제게 물려준듯...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상태입니다.

  • 들풀2018.01.11 22:59 신고

    하하
    원경이 눈물흘립니다
    내기합시다
    피자한판!

    답글
  • 김순옥2018.01.12 07:04 신고

    멋진 러브레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이상의 아버지는 없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원경이가 훈련중이군요.
    대단하고 멋진 원경이에게 화이팅을 보냅니다.

    저희 부부는 한얼이랑 부산행 무궁화호를 탔습니다.
    여행이라면 최고일텐데 아픈 애들 고모 응원차 가는거라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자만하지 말고 건강관리 잘해야 합니다.

    답글
    • 주방보조2018.01.12 12:46

      한얼이가 돌아왔군요.
      나이가 든다는 것이 죽어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중년이후엔 건강관리가 잘 죽기 위한 필수조건이지요.
      한얼이 고모님 쾌차하시기를 빕니다.
      원경이는
      오늘 완전군장 40키로 행군을 한다는데 날이 특별히 추워져서 고생꽤나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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