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네, 그럼 제 1회 원탁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메인 진행자인 강다영의 멘트와 함께, 1학년 남학생 반들이 오전 원탁회의에 참가했다.
주제는 학교 발전을 위한 방안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참 재밌는것은, 모든 남자반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의견이 있다는 것이었다.
"젊고 아리따운 여자선생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밖에도 나오는 방안들이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 아니면 절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아무도 진지하게 회의에 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재밌는 의견을 내면서 서로의 드립이 재밌다며 웃을 뿐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 축출!"
"창체시간을 취침시간으로 바꿉시다."
"체육은 일주일에 3번은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들을 학생들의 손으로 뽑아야 합니다."
"두발 자유와 복장 자유가 시급합니다."
"벌점 제도를 없애야 합니다."
"흡연 부스를 만들어서, 흡연 학생들에게 자유를 줍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조용히 화장실만 갔다올리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모두들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거나 매점을 가고, 매점에 갔다와서는 빵과 음료수를 먹으며 다시 회의실인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여러분 들어오셨으면 제자리에 앉아주세요."
회의실이 급격하게 아수라장이 되자, 강다영이 단상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애타게 말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교감선생님이 어젯밤에 원탁 사이 간격을 아주 많이 넓힌 덕분에, 남학생들이 뛰어놀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나는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급하게 무대 위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각 테이블의 퍼실리테이터 분들께서는, 쉬는시간을 지금으로부터 5분 뒤인 10시 15분까지로 정해주시고, 그 시간까지 모두 자리에 앉혀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음식냄새 나니까 제발 밖에 나가서 먹고 들어와주세요."
교감 선생님도 이 상황을 보셨는지, 내게 황급히 다가와서 지시를 내렸다.
"이거, 오후에 여자애들 반 하기 전에, 테이블을 8×4로 가지런히 정렬해야겠어. 간격이 너무 넓으니까 애들이 뛰놀잖아."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내가 잘못한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선생님. 그냥,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죠. 대체 저한테 왜그러십니까."
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하자, 겨우 체념한 듯 그녀는 교무실로 돌아갔다.
상당히 열정적인 분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나와는 맞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
오후 여자반들까지 무난하게 끝이나자, 6일동안 고생하며 준비한 원탁회의가 끝났다. 3일 밤을 새고, 2일 동안 4시간만 자면서 준비하느라, 학생회 부원들은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끝나고도 우리는 쉴 틈이 없었다. 퍼실리테이터 교육에 대한 생활기록부 작성을 우리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회 부원들의 것만 말이다.
"우리 집 언제 갈 수 있냐."
교무실에서 타자를 치던 신정화가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내게 말했고, 그 와중에 강다영은 교무실 책상에 엎드려서 잠들어버렸다. 아마 메인 진행 준비를 하느라 밤을 새버려서 그런 것이리라.
"글쎄다, 끝난건 오후 2신데 지금 4시가 다 되어가네."
나도 옆에서 신정화가 작성한 것들을 검토하며 혼이 다 빠져나갈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나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여보세요."
-네, 혹시 학생회장 분 맞으시죠?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여자 선생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졸업식 가운을 처음 담당해봐서 어떻게 졸업생들에게 배분할지 선생님들에게 여쭤봤는데, 예전부터 학생회가 다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요?"
-그러니까...이번에도 학생회가 할 것 같긴 한데 언제 시간이 날까요?
"지금 회장인 저와의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시는 건가요?"
-아니...그게 아니라...
내가 매우 공격적인 어조로 말하자, 그 선생님은 당황하신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 선생님들에게 다른 인력이 없는지 알아보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러자 그 통화내용을 듣고있던 신정화가, 도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미침?"
"응?"
"그거 학생회가 아니면 자율부가 할거 아니야. 하... 그러면 나한테 또 전화오는거 아니냐."
"그럼 너도 거절해."
"아 몰라. 학생회가 하든 자율부가 하든 난 어차피 하는거니까."
자율부 부장인 그녀의 입장으로선, 꽤나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10분 후에 다시 내 폰이 울렸을 땐, 아까 전과는 다른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지금 1교무실로 올 수 있니?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의 여자선생님이셨다.
"아뇨, 그냥 통화로 하죠."
예의없어 보일 수는 있었지만, 사실 이 상태로는 교무실로 내려가다가 잠들어버릴 지경이었다.
-교복 가운 배분하고 정리해줄 사람이 지금 학생회밖에 없어. 이미 선생님들끼리는 다 얘기가 그렇게 끝났고.
"아니 저기요, 선생님들 의견이 중요한게 아니라 회장인 저의 의견이 가장 우선시 되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당장 내일이 졸업식인걸. 내가 제발 부탁할게. 응? 한 번만 해줘라.
"......"
미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일이 졸업식인데 아직까지 나에게 말도 안하고, 이제 와서 가운 정리해달라고 통보를 하다니. 그렇다고 학생회가 하지 않으면 내일 졸업식은 엉망이 될 것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하지요. 할게요 그럼."
-고마워 학생회장 내가 나중...
툭.
나중에 뭘 해주겠다는 빈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학생회 부원들에겐 미안하지만, 졸업식 가운 정리까지 해야 그나마 졸업생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남기진 않을 것 아닌가. 이것이 학생회에게 지금 상황에선 최대한의 덕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엔 교무부장 홍순길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어어, 교신아 내가 좀 늦게 연락해서 미안한데, 내일 졸업식 준비 좀 해줄 수 있을까? 아니 그냥 일단 지금 1교무실로 내려와줘. 졸업식 담당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해야하니까.
정말 황당했지만 홍순길 선생님과는 1학년 때부터 상당히 친한 사이였기에, 일단 교무실로 내려가긴 했다. 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학생회에게 또 뭘 시키려고.
"네 선생님, 졸업식 준비라는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번 졸업식 담당하시는 선생님이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까 너한테 미리 말을 못하신것 같은데, 일단 의자를 430개 깔아야하고, 공연 보조도 해야하고, 질서도 좀 봐줘야하고..."
아무래도 피곤해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데, 말도 안되는 상황에 처하니 내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해버렸다.
"지금 진짜 뭐하자는 건가요? 6일동안 아무래도 애들 고생 엄청 많이해서 지금 하루종일 자다가 일어나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피로가 쌓여있는데, 갑자기 지금와서 내일 졸업식 준비를 바로 해달라구요?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는것 같으세요? 뭐 작년 학생회는 고분고분 말 잘들었을진 모르겠는데, 이건 누가 봐도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방금 또 졸업 가운 430명한테 배분하고 다시 정리하는 일 해야한다고 통보받아서 지금 학생회 애들도 다 화나 있는 상탠데, 지금 또 저와 사전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시는거잖아요. 학생회가 무슨 선생님들 인력 부족할 때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종인줄 아세요?"
내 목소리에서 서러움이 터져나와, 교무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내 내 말을 들은 다른 선생님들이 그냥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5명 정도가 나를 둘러싸고 혼내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학생회장이 왜 된거야? 대체 학교에 도움이 되는 구석은 하나도 없어! 이 자식 내가 가르쳤으면 교실에서 아주 혼쭐이 나는건데."
"일하기 싫어서 저러는거죠.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뭐 상점이라도 줄까? 1,2점 주면 만족할래?"
"학생회는 원래 무보수로 학교에 봉사하는거야. 그게 아니라면 학생회의 자격이 없지."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저희 원탁회의 때문에 지금 6일 연속으로 고생한건 알기나 하세요?"
"그건 너네 사정이고. 작년까진 그게 없었으니까 우린 그런 사정까지 봐 줄 여유 없어."
"보상같은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지금 가장 학생회 애들에게 필요한 건 휴식밖에 없으니까요."
"하루만 더 고생하면 되잖아. 홍순길 선생님, 그냥 학생회한테 시키세요. 잘 달래면 되겠죠."
그리고서는 다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업무를 보시는 선생님들. 저런 미친 공무원들을 보니 나중에 커서 세금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신아, 많이 힘든건 알겠는데, 진짜 하루만 부탁하자 응? 선생님이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하잖아. 이제 자양고 떠나는데, 마지막으로 소원 한 번 들어준다고 생각하고 해줘."
홍순길 선생님이 내 손을 붙잡고 말씀하시니, 나는 그냥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지금 이 상태에서 내가 거절을 해버리면, 홍순길 선생님도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빠지지 않으시겠는가. 사실 졸업식 담당도 아닌데, 지금 이렇게 나를 달래시는걸 보면 지금도 충분히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나는 부탁에 약한 사람이다. 나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있었다.
"해드리겠습니다. 부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군요."
나는 대답도 듣지않고 뒤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한 선생님이 나보고 들으라는 듯 비웃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봐요. 달래니까 넘어가잖아. 저래도 아직 어린애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것이 들끓으며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이런, 개씨발!!!"
쾅.
나는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교무실 문을 세게 닫았다. 울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불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노 표출은 이 정도 밖에 안됐다. 아마 그들도 내 욕을 들었으리라. 다만, 지금의 나를 건드리기는 너무 귀찮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겠지.
......
졸업식 아침부터 우리는 의자를 430개를 깔고, 졸업 가운 분배를 끝냈다. 별게 아닌것 같아도 20명이서 하기엔 정말로 힘들고 벅찼다.
우리는 학생회 사비로 화환까지 하나 마련해서 배치했다. 어제 신정화와 손경식이 31대 학생회에게 선물하자며 화환에 들어갈 문구를 '31대 학생회 선배님들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샤샤 32대 학생회 일동.' 으로 하자고 했지만, 내가 절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 친목집단 같았고, 내가 31대 선배들을 마음 속으로 용서했다고 해도 화환까지 선물할 정도의 호감은 전혀 없었으니까.
결국 문구는 모든 졸업생에게 졸업을 축하하는 것으로 바꿔서 주문했다.
졸업식이 시작될 쯤에, 이태민 선배가 앞머리를 올린 채로 등장했다.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꽤 잘어울리는 편이었으니.
"교신아, 졸업식 끝나고 31대 선배들이 밥 다 먹고나서 3시 쯤에 다시 모일건데, 너네도 그때까지 우리 기다렸다가 같이 사진찍고 각자 집에 돌아갈거야."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이것도 학생회 전통이니까, 3시에 운동장으로 와."
벌써 세번째 빌어먹을 통보였다.
"저희 가운 정리 하느라 좀 늦을겁니다. 애들도 지금 다들 너무 피곤해서 죽을라하는데."
"그냥 사진만 찍고 가면 되잖아. 그럼 3시 반으로 더 늦추자. 그렇게 알고있는다? 난 이제 자리로 들어가봐야해서. 3시 반에 보자. 애들한테 전달해놔."
망치로 머리통을 깰 수도 없고. 저번에 마음먹은 31대 선배들에 대한 용서는, 없던 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졸업식이 끝나고, 우리는 의자 430개를 자율부원들과 함께 모두 치운 후, 모든 3학년 반을 돌아다니며 졸업 가운을 걷었다.
그리고 가운실로 그것을 가져가서, 가운을 모두 옷걸이에 걸어 정리해놔야했다.
"애들아 고마워. 학생회 애들 너무 수고해서...내가 15만원 줄테니까 뭐라도 가운 정리 끝나면 뭐라도 사먹으렴."
맨 처음에 나에게 전화했었던 가운담당 젊은 여자선생님이 나에게 돈을 주며 말씀하셨다. 너무나도 착하신 분인데, 어제 너무 공격적으로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시간동안 가운정리를 다 마치고, 그제서야 기나긴 일이 다 끝이났다.
"풍년집가서 고기나 구워먹자."
"네 좋아요!"
고기를 먹자는 내 말에 강다영이 신이 나서 외쳤고, 그 옆에선 이민진이 잔뜩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먹고 빨리 선배들이랑 사진찍고 집가요. 진짜 죽을것 같아요."
부원들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했다. 과장이 아니고, 모두들 잠들기 직전의 상태였으니.
......
요즘 참 왜 사는지 의문이 듭니다. 너무 외로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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