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스트레일리아/다섯아이키우기

학생회장 김교신 23

주방보조 2017. 6. 20. 00:42

23화.

'박근혜는 하야하라!'

페북에 들어가보니, 이태민 선배와 김재형 선배가 저 문구를 들고 서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신문사 인터뷰까지 했단다.

"국정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친 놈들, 지들은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애초에 최순실 노릇 하고 싶어서 환장했던 인간들이.'

순수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건 엄청난 위선 아닌가. 내 눈엔 그저 최순실 두 명이서 박근혜한테 '넌 나를 관리 못했으니 하야해야돼!' 라고 말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긴 글을 하나 올렸다.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면서.

-진짜 더럽고 찌질하고 치졸한 면들로 가득한 사람들이 정의로운 척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너무 혐오스럽다.
막상 더러운 짓을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거면서, 기회가 없어서 안하는게 아니라 정의로워서 안하는 것 마냥 포장하고 다니는, 졸렬하고 추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만큼 역겨운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자기 유리한 쪽으로 이리저리 붙어다니면, 그 누가 그 사람을 존경하고 믿고 따를 수 있을까.
그 사람 밑에는 그 사람과 똑같이 병신같은 사람들만 모이게 되있다. 이득만 챙기려는 그런 사람들.
진짜 존경을 받고 싶으면 자기 신념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고, 그 다음에 그것에 의한 정의를 내세우길 바란다. 추하면서 고귀한 척 하는 것은 보는 사람마저 민망하게 만드니까. 제발 그런 토나오는 짓 안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이 글을 선배들은 자신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했다.

......

수능 전 날 밤, 내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던 중에 강다영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진짜 큰일났어.

"뭐. 왜."

-신문기자한테 연락왔어. 내일 수능 응원 가는거 인터뷰 할 수 있냐고. 근데, 또 이태민 선배가 자기 인터뷰 했던 기자 한 분 소개시켜 준다 해서 신문사가 두개가 됐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

"그래서, 뭔 내용을 하는데?"

-우리가 이번에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해서 비판하는 식으로 문구 정해서 수능응원 하면 그거 찍고 인터뷰 하는 방식으로 하겠다는데?

"하...플랜카드 같은거 안만드려고 했는데..."

-오늘 밤에 만들면 되는거지! 그래서 내가 재료는 어느 정도 사왔어.

"일단 똥 다싸고 다시 전화함."

머리가 지끈거렸다. 수능 응원은 그냥 내일 새벽에 작은 북 하나만 들고 가려고 했는데, 신문사 인터뷰가 들어왔다니 하는 수 없지.
사실 오늘 연모네 집에서 2학년 남자들 다 모여서 같이 자기로 했는데, 오늘 자기는 글렀으니, 나는 그들에게 스타시티 로비에서 모이자고 말했다.

-얘들아, 스타시티 로비에서 일 좀 하다가 자자.

-몇시에 만나?

-9시쯤에 보자.

-알겠어. 언제쯤 끝날까?

-12시 쯤엔 끝나겠지.

나는 그들을 좋은 말로 구슬리며 스타시티 로비로 불렀다.

수능 응원이라는 것도 하나의 학생회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데, 고3 수험생 선배들의 수능 시험장 중에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을 골라, 새벽부터 정문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입실 시간 바로 전까지 응원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2개 학교로 나눠서 가는데, 이번엔 서민지가 광양고로 응원을 가고, 내가 덕수고로 가기로했다.

우리는 10시부터 스타시티 로비에 눌러앉아서 문구를 정하고 플랜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막상 가위도 2개 밖에 없고, 딱풀도 1개 있어서 일의 진행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아, 점점 미칠것 같다. 우리 언제 잘 수 있어?"

어느새 새벽 2시를 넘기고, 겨우 4개 정도 완성시켰을 땐, 모두가 잠들기 직전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니 일의 효율이 점점 떨어질 수 밖에.
완성된 문구는 '우주가 도와줄거야!', '최대한 답에 접근혜.', '말타고 가지말고 시험보고 대학가자!' 뭐 이런 내용 정도였다.

결국 플랜카드를 다 만들자마자, 새벽 5시 반에 우리는 덕수고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잘 시간은 전혀 없었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했다

......

덕수고에 도착하니, 이미 문 앞엔 대원고 학생회와 광양고 학생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은건가. 그래도 최대한 일찍 왔는데."

결국 우리는 정문에서 약간 떨어진 길목에 자리를 잡았는데, 플랜카드를 꺼내드는 우리에게 어떤 청년 분이 다가왔다.

"혹시, 자양고 학생회인가요?"

카메라를 들고, 머리를 감지 못한 모습을 보니 딱봐도 기자의 티가 났다.

"네, 제가 회장입니다."

내가 그의 앞에 다가가서 말하자,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일보 기자 정반석입니다. 만나서 반갑네요. 이태민 친구에겐 얘기를 잘 들었습니다."

"하하하, 무슨 얘기를 했을지 참 궁금하네요. 그런데 이태민 선배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건가요?"

"태민 친구가 고3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랑 같이 플랜카드를 들고 용기있게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인터뷰를 했죠."

"아하, 확실히 용기가 넘치긴 하죠. 그건 그렇고, 그냥 말 놓으십쇼. 저한테 그렇게 존댓말 쓰실 필요 없습니다 형님."

"아 그럴까? 사실 나도 그게 편하긴해."

처음 만나는건데, 상당히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랄까. 약간 영어C 박문주 선생님이 떠오르기도 하고.

"뭐, 그러면 사진 구도를 어떻게 잡아드릴까요?"

"그냥 일자로 쭉 서서 플랜카드 내용 보이게만 해줘. 내가 자연스러운 순간에 알아서 잘 찍을테니까."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왠지 모를 이태민 선배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은, 착하고, 리더십과 용기를 갖추고, 앞장서서 정의롭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가서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가끔 도용주에게 가서 이태민 선배를 같이 깔 때 빼고 말이다.

해가 밝아오면서, 점점 시험장에 수험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학교의 응원단들의 응원경쟁도 점점 과열되었다.
7시 반 쯤이 됐을 때 이태민 선배와 김재형 선배도 덕수고에 도착했는데, 우리는 마치 미국에서 대스타가 온 것 처럼 북과 함성소리로 과하게 환영했다.

둥둥.

"자양고~ 화이팅!!"

수능 응원 도우미로 신청한 이다은이 북을 치면, 내가 자양고~ 를 외치고 나머지 도우미들과 학생회가 화이팅!! 을 외치는 식이었다.

"오, 회장님이랑 태민이랑 악수 한 번 해요. 사진 찍을테니까."

기자분이 우리에게 말하자, 우리는 서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했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가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원수였는데 말이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학생회 조직 후에 얼마 안되어서 부회장들이 나에게 등을 돌렸을 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채로 집을 가던 도중 마침 나를 위로해줄 친구들과 마주쳤다.

"교신아 어디가? 표정이 왜그래."

도용주와 윤종한, 최진수였다.

"애들아, 나 진짜 죽을것 같아. 좀만 같이 있어줘."

"마침 한솥 가던 참인데 같이 갈래? 뭔 일인지 썰 좀 풀어봐."

"알겠어. 거기 가서 얘기해줄게."

나는 한솥에 테이블에 앉아서 그들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태민 선배라고 알아?"

"아, 그 근육돼지? 저번 학생회 말하는거지?"

"응. 그 인간이 막 대선배들 무섭다 그러면서 나한테 별별 살벌한 이야기를 다 하길래, 당연히 내가 회장으로서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한테 도와달라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를 하던 도중에 다른 선배들이랑 같이 교무실에 찾아와서 자기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나를 몰아세우는거야. 그리고 학생회실로 나를 불러냈는데..."

그렇게 한창 썰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태민 선배였다.

짝짝짝짝

그가 들어오자마자 도용주가 크게 박수를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간지남 등장!!"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우리는 단체로 폭소하기 시작했고, 이태민 선배는 쪽팔렸는지 굳은 표정으로 볼 일을 다 보고 급하게 가게를 나갔다.

원래 이런 식으로 비꼬면서 환영하는게 정상인데, 지금은 한껏 웃으면서 사이좋게 악수를 하고 있다니.

'사실 나도 어떻게 보면 이태민 선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일까.'

문득 내 자신까지 혐오스러워 지려는 순간이었다.

.....

수능 응원 고생도 끝나고, 이제야 겨우 일이 다 끝났나 하며 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생활지도부장 김대영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내가 작년에 경기여고에 있을 때 하던 행산데, 자양 3동 노인 분들을 초청해서 경로잔치를 해보는게 어떻겠냐."

역시 학생회는 쉴 틈이 없었다. 학생들은 잘 알아주지 않지만, 알게모르게 하는 일이 참 많다.

"선생님, 제가 회장으로 나올 때 내세운 공약들에 대해서는 선생님들끼리 회의를 하셨나요?"

"야 이 자식아, 갑자기 그걸 왜 물어봐?"

"상관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학생회이지, 선생님들의 명령을 듣는 학생회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공약 실천을 아무것도 못한 상태에서 스펙만 쌓는 일을 한다면, 학생들은 당연히 학생회를 비판히지 않겠습니까?"

"......"

김대영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분명 자신은 웃으며 살갑게 말했는데, 얼굴을 굳히고 공격적으로 말하는 내가 영 마음에 안들었으리라.
나도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맨날 이런식으로 선생님들에게 예의없다고 욕을 먹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교신아, 내가 16년 전에, 학생회장이 지금 동창회 이사인 박동주일 때도 생활지도부장이었는데, 그 자식은 너처럼 일을 하기 싫어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학교를 바꾸기 위해서 엄청 활발하게 다녔던 놈이야. 너는 좀 박동주의 그 열정을 본받을 필요가 있어."

"뭐라구요?"

"박동주 선배를 본받으라, 이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너같은 회장 다신 안뽑혔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나같은 회장이 다신 안뽑혔으면 좋겠다는 말은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많이 들은 소리라 익숙했지만, 이건 의미가 좀 달랐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박동주 선배같은 사람을 높이면서 나를 낮춘것 아닌가?

"선생님은, 그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하세요? 참 나, 무슨 지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회실 찾아와서 우리 애들한테 꼰대짓하고, 학생회실이 더럽다면서 우리 애들 욕하고, 저를 회장으로 인정하지 말라면서 이간질이나 하는 할 일 없는 대선배인데, 지금 그 사람을 본받으라고요?"

"그래도 나 때는 그 자식이 애들 담배 피우는 것도 막으려고 담배 피우는 자식 막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그랬어 인마. 넌 그럴만한 열정이 있니?"

"그런 잘못된 열정은 없습니다만."

나는 잔뜩 화가난 표정을 짓고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일단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니가 실천하고 싶은 공약이 뭐야."

"제일 급한 것이 휴지 보급입니다. 그 다음이 하복 반바지이죠. 분명히 교장선생님께서 하복 반바지를 만들어내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일 진행이 어디까지 갔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일단 내가 화장실 휴지는 어떻게 해볼테니까, 반바지는 나중에 교장선생님하고 이야기하자. 어때, 휴지를 배급해줄테니 경로잔치를 해보는게."

어느정도 괜찮은 딜이라고 판단되었기에, 나는 표정을 확 풀고 그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괜찮네요."

역시, 그래도 김대영 선생님은 좋은 분이었다.

......

얼마 후에 바로 모든 교실에 휴지가 보급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나도 약속대로 학생회와 함께 경로잔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복 반바지는 안타깝게도, 2018년부터 시행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입고싶었는데, 이미 2017 하복 디자인과 업체계약까지 다 끝난 상태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냥 후배들한테 좋은 유산을 남기고 떠나는 건가.'

나는 학생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복 반바지를 당장 만들어서, 괜히 덥게 긴바지 입고 등교해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번거롭게 체육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일을 없앤다면, 다들 나를 칭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학생들한텐 나같은 회장 안뽑혔으면 좋겠다는 말은 안들을텐데...'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나를 싫어한다. 내가 선생님들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고 대하는 태도나, 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 그리고 수업시간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것 때문에 다른 반에서 내 뒷담화를 하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특히 내가 교장선생님 취임식 때, 전교생 앞에서 같이 사진을 찍는데 내가 먼저 교장선생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어깨동무를 한 이후부터 나에 대한 비난이 선생님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교신 그 자식은 예의라곤 눈꼽만치도 없어. 저런 애가 회장이니까 자양고가 이 모양 이꼴이지."

어떤 여자 영어 선생님이 여자 이과반에 들어가서 한 말이란다.

"괜히 센 척 하려고 교장 선생님 어깨에 손이나 올리고 말이야. 너는 그런거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이건 내가 복도를 지나가다가, 내가 아예 모르는 선생님이 나를 붙잡아두고 혼내면서 한 말이다.
난 그저 학생대표로서 친근함의 표시로 어깨동무를 한 것 뿐이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받는 비난이 너무나 상처로 다가왔다. 솔직히 화도 났다. 나같은 놈이 회장이라서 자양고가 이 모양 이꼴인게 아니라, 저런 사고방식 때문에 자양고가 유연하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양고등학굔지, 종양고등학굔지.'

사실 나도 그닥 모범적인 학생회장은 아니었다. 공부 잘하고, 선생님들에게 순종하며, 항상 고운 말만을 쓰고, 친구들을 격려하고, 운동장에 쓰레기가 있으면 줍는 바른 회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회장은 재미가 없지 않는가. 
나처럼 공부 못하고 선생님들에게 반항적이고 가끔은 욕도 하고 친구들 갈구고 귀찮으면 걍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쓰레기 버리고 하는 회장도 한 명쯤 있어야 세상이 재밌는 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박동주라는 선배처럼 흡연학생들을 때리며 단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제발 걸리진 말라며 복을 빌어줄 뿐이었다.

'아마 박동주 그 사람은 약한 애들만 골라서 때렸을거야.'

그런데 그딴 인간보다도 내가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다니.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문득 회의감이 가득 밀려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회장이라는 자리를, 내가 과연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며 지킬 가치가 있었을까.

......


반바지는 제가 졸업하고 나서야 실행이 되더군요...참...안타까운 일입니다...그리고 벌써 임기가 10일 밖에 안남았군요. 정말 기쁩니다. 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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