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대의원회의가 끝나고 내가 회의실을 나왔을 때, 이태민 선배가 약간 기죽은 얼굴로 나에게 와서 물었다.
"정확히 어떻게 된거야?"
일이 또 귀찮아지겠다 싶어져서, 나는 대충 그에게 둘러대며 대답했다.
"이게 뭐 일을 진행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됐네요. 이번에 김영란 법 새로 생겼지 않습니까? 그거 때문에 그래요."
"하...그러게 왜 그런 법이 만들어져가지고..."
강다영이 그에게 어떻게 좋게 돌려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영란법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바로 수긍해버리는 모습에 나는 살짝 놀랐다.
'김영란법은 여기에 적용도 불가능한건데.'
가끔은 허풍으로 그 상황을 빠져나오는 것도 능력이다. 귀찮지 않은가.
"하하하! 괜찮아요. 어차피 욕을 먹어도 제가 먹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게 아주 익숙하잖아요."
마치 나도 욕먹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처럼 말하자, 그는 완전히 내 화술에 넘어왔는지 내 등을 두드리며 위로까지 해줬다.
"아냐. 힘내라 너도."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래."
대화를 마치고 유유히 정보관을 빠져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것으로 학생회 일에 대한 주도권은 내가 확실하게 잡은 것이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갑이 되는건가.'
하긴. 인수인계를 못받아서 그들에게 쩔쩔매던 옛날의 나와는 달랐다. 이제부터는 그들에게 아쉬울 것도 없는데다가, 학생회 부원들은 굳건하게 나의 편을 들어주니 말이다.
......
"여러분, 수능응원금 예산이 100만원이 나왔어요. 한사람당 2300원 꼴이라는데, 그냥 떡으로 결정할까요?"
"네. 그냥 떡으로 해요 무난하게."
"가성비가 그나마 제일 좋아요. 거기서 포장도 알아서 다 해주고."
수능 응원 선물을 정하는 회의도 일사천리였다. 저 예산 100만원은, 선생님들이 학교에 남는 예산을 긁어모아서 마련한 것이란다. 아예 없애는 것보단 뭐라도 주는 것이 나으니까.
"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맞춰서 떡을 마련하도록 하죠. 업체는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회의 끝!"
32대 학생회의 특징은, 회의 시작 전부터 나에게 회의가 몇시쯤 끝나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일찍 끝나면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바로 뛰쳐나간다는 것.
그래서 나는 되도록 간단하고 빠르게 회의를 끝냈다. 어차피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원들은 점점 늘어지니 말이다.
대부분의 부원들이 석식을 먹으러 가고, 학생회실에서 신정화와 같이 떡을 싸게 팔만한 업체를 알아보고 있는데, 옆에서 손경식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
"교신아, 내 생각인데, 이태민 선배 성격상 떡 받고나서 얼만지 인터넷으로 찾아볼 것 같아."
"음...설마 그정도로 악착같을까?"
"100퍼센트 확신해. 분명히 떡 2300원인거 알면 친구들이랑 교실에서 난리칠걸?"
내가 그 상황이라면,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굴진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경식, 너한테는 이태민 선배가 뭐라 안하든?"
"아아 막 김영란법 왜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면서..."
역시 아직도 속고 있는 상태인가보다. 내가 학생회 단톡방에서 부원들에게 '이태민 선배가 수능 모금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걸면 김영란법 탓을 하도록' 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마 빈틈은 없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
수련회에 갔다오고 나서, 11월 초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학생회 단톡방에선 이민진이 보낸 메시지에 모두 난리가 났다.
-제가 방금 이태민 선배한테 들었는데요, 16대 학생회장이었다는 박동주 대선배가 저희 학생회실 들어오더니 너무 더러워서 화가 엄청 나셨대요. 그래서 아마 단톡방을 만들거라는데,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요.
-미친, 근데 그걸 왜 너한테 말해?
-이태민 말은 너무 뻥이 많아서 믿을 수가 없어.
-야 진짜 이건 아닌것 같은데.
부원들의 반응을 보니, 예전처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벌써 모두 싸울 준비가 다 되어있는 듯 보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서 단톡방에 대고 말했다.
-내가 봤을 땐, 단지 16년 전에 학생회장을 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허락없이 학생회실에 무단으로 침입할 자격이 없는데다가, 우리에게 꼰대짓을 할 이유도 없어. 심지어 내가 사흘전에 경식이랑 학생회실 올라갔었는데, 전혀 더럽지 않았는데 말이야.
-맞는 말임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있으면 회장한테 안말하고 민진이한테 말해?
-그러게, 그것도 웃긴 일이네.
-학생회실 누가 마지막으로 올라갔어?
-쓴 사람이 아예 없어요. 아, 그러고보니 석훈이가 창문열고 나온적 있는데.
그러자 정석훈이 단톡방에서 처음으로 긴 문장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저번에 환기시키려고 창문열어놓고 까먹고 나갔는데, 다음 날 비가왔다고 하더라구요...정말 죄송해요. 무슨 말을 해도 핑계가 되겠지만요.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좀 더러워졌을 수도 있어요.
-아냐 괜찮아. 너무 죄책감 가지지마.
-아 정석훈. 미쳤냐???
2학년들은 정석훈을 달래주고, 1학년들은 그를 진담반 농담반으로 공격했다.
-여러분, 빅뉴스 하나 추가요.
이번엔 강다영이 무슨 소식을 또 들고왔나보다.
-박동주 선배가 빡쳐서 슈퍼스타 J 저희랑 안한대요. 학생회실 들어와서 막 '이 자식들이랑 일 도저히 못하겠네.' 뭐 이런식으로 말했다는데요?
-응, 우리도 그 인간이랑 할 생각 없어.
-지가 뭔데 그러는거냐.
-학생회실 관리랑 그게 뭔상관이야.
나는 단톡방을 쭉 지켜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보다 16살이나 더 많은 사람이 왜 여기와서 난리를 치는 것일까.
-일단 지켜보도록 하죠. 슈퍼스타 J를 하든말든,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는거구요. 솔직히 학생회 말고 그거 해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내가 마무리를 짓고, 단톡방은 다시 잠잠해졌다.
......
수능 응원떡을 돌리고 나서 며칠 후에 김재형 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학교 끝나고 학생회실에서 만나자. 할 얘기가 많으니까. 부회장들도 다 데리고와.
무슨 얘기일까 과연. 아마 학생회실 관리에 대해서 또 뭐라고 하려는 것일까.
방과후에 학생회실에 도착하자, 김재형 선배와 이태민 선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어, 너네 여기 좀 앉아봐."
우리가 그들을 마주보고 앉으니, 그들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실망한게 여러가지가 있어 교신아. 일단 너 수능 모금하는거 명수가 없애라고 해서 없앤거라며. 왜 너는 학생회 선배 말을 안듣고 너와 개인적으로 친한 선배의 조언을 듣는거야? 그건 회장으로서 말이 안되는거야."
"죄송한데요, 명수형이 하라해서 한게 아니라 이미 없애려고 마음 먹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명수형 찾아가서 조언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정문에서 만나서 얘기하다가 그 형도 저랑 생각이 똑같았던 것 뿐이죠. 도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네요."
"아, 그럼 그건 오해다?"
"바로 그거죠."
그들은 나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을텐데, 뜻대로 되지 않자 이젠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너 이번에 박동주 선배님이 엄청 화나신거 알아?"
"알죠."
"아니 뭐 일단, 너한테 먼저 얘기를 안한건 미안해. 그때 당시에 난 니가 명수 말 듣고 수능 모금 없앤거라고 생각해서 너한테 말을 안한거야. 어쨌든, 너네 학생회실이 너무 끔찍할 정도로 더러워서 화가 나신건데, 넌 어떻게 생각해?"
"제가 분명히 박동주 선배가 오셨다는 날짜 3일 전에 학생회실에 왔었는데, 제가 판단하기엔 전혀 더럽지 않았습니다만. 석훈이가 창문을 열어서 빗물이 들어왔다고 해도 아까 말처럼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더러워질 일은 없어보였습니다."
"흠...너네 애들 중에 다른 애 들어온 애는 없고?"
"네. 전혀 없습니다."
"내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치킨을 먹긴 했어. 저기 쓰레기통 보면 알게될거라서 그냥 말하는거야. 근데 우린 분명히 깨끗하게 우리꺼 정리했고, 그 뒤로 학생회실에 온 적이 없어."
"32대 부원들도 들어온 적 없습니다. 솔직히 저희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더럽히지도 않았는데 왜 저희가 그 박동주라는 선배한테 비난을 받아야하죠?"
"일단 뭐...우리가 미안하다."
"네?"
"아니 우리가 더럽힌건 아닌데, 우리가 그냥 너한테 오해하기도 했고, 그 사과의 의미로 우리가 학생회실 다 정리할게."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슈퍼스타 J 너네랑 안한다고 그러길래, 나도 놀랐어"
뭔가 이상했다. 자신들이 더럽힌건 아니지만 슈퍼스타 J를 못하게 되어서 자신들이 미안하다고?
'치킨 먹고 정리 안해서 그걸 보고 박동주가 화를 냈나보군.'
답은 정해져있었다. 물론 물증은 없지만, 박동주가 화낼 이유는 그것 뿐이었다. 그가 결벽증이 아닌 이상 말이다.
"우리 오해도 다 풀었으니까, 앞으론 악감정 없이 옛날 일 다 잊고 사이좋게 지내자. 나도 너랑 잘지내고 싶다."
"그러세요."
또 시작되는 뻔뻔스러운 이태민 선배의 말에, 나는 조금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러나 그들은 대화에 만족했는지, 이제 가야한다며 먼저 나가버렸다.
"에휴. 언제쯤 철이 들까 저 선배들."
나는 저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오늘 좀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서...
'칠스트레일리아 > 다섯아이키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생회장 김교신 24 (0) | 2017.06.21 |
---|---|
학생회장 김교신 23 (0) | 2017.06.20 |
학생회장 김교신 21 (0) | 2017.06.17 |
학생회장 김교신 20 (0) | 2017.06.16 |
학생회장 김교신 19 (0) | 2017.06.15 |